| 통일뉴스는 1991년《청년과 군대》(92년 일본어판 출간), 2001년《반갑다 군대야》를 저술하면서 늘 ‘자식을 마음놓고 군에 보낼 수 있는 군대’와 관련해 강연과 글쓰기를 하고있는 군사평론가 김삼석 씨의 ‘김삼석의 군 바로 세우기’를 정기적으로 싣는다. 김삼석 씨는 1993년부터 1997년까지 4년간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2003년 6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활동하면서,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의 보안사령부가 국방부, 안기부, 문교부, 대학, 법무부, 병무청, 경찰 등의 국가기관과 함께 학생운동탄압의 하나로 실시한 녹화사업과정에서 의문사한 사건을 조사한 바 있다. 연재 글은 군입대를 앞둔 한 젊은이에게 선배로서 군생활을 편안하게 안내하는 식으로 실린다. 주제는 ‘입대에서 제대까지, 사병의 월급에서 군의문사까지, 바늘에서 인공위성까지, 군통수권에서 주한미군까지, 미 군산복합체에서부터 북의 선군정치까지, 반공이데올로기에서 통일 군대까지...’ 등 수십 편이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군을 좌우 양쪽의 눈으로 바라보는 ‘김삼석의 군 바로 세우기'는 매주 금요일에 싣는다. - 편집자 주 |
● 말죽거리 잔혹사인가, 보안법가족 잔혹사인가
이른바 감옥을 법무부가 지은 국립호텔이라고 부른다. 호텔 방은 0.75평 크기. 팔도 제대로 못뻗는다. 사람이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는지는 경험하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감옥에 자식을 보낸 어머니는 손주들에게 '아빠는 유학갔다'고 '공부하러 갔다'고 거짓말을 한다. 아빠를 찾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 군 수사기관이 50년 이상 젊은이들을 국립호텔에 ‘유학’을 많이 보냈다. 문제는 ‘유학’은 ‘유학으로만 끝나지 않고 가족들까지 괴롭힌다는 데 있다.
20년 전 나종인씨 가족에게 뻗친 국가보안법에 의한 다른 사건 관련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 뒤 현재진행 중인 이석기씨 가족에게 잔혹할 정도로 이어지고 있는 지금은 2004년 12월. 이석기씨 가족 유린사건을 살펴보기 위해 84~5년 남매간첩단 조작사건인 나종인 씨 사건을 다시 살펴보자.
국군보안사령부(현 기무사)는 1981년쯤에 체포한 남파 간첩한테서 ‘나경애라는 여자 간첩이 고향에 다녀왔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는 첩보를 얻어냈다. 나경애라는 이름만 갖고 전국의 호적을 뒤졌으나 그럴 듯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경혜’로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해서 이쪽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전남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 781번지 나석균씨(사망)의 장녀가 나경혜(1932년 생)였다. 나경혜는 6.25 전에 월북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 약 70일간의 보안사의 잔혹한 고문
보안사 대공처 수사관들은 근 4년간 가족들을 미행하다가 별로 단서가 나타나지 않자 사건을 깨기로 했다. ‘깬다’는 것은 혐의자들을 일단 연행하여 조사를 시작한다는 거다. 나경혜 씨의 동생 나종인(52)씨는 서울에서 삼화 엔지니어링이라는 전자 자동제어기 수입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나씨는 1984년 10월5일에 영장없이 불법연행돼 약 70일간 보안사 서울시 송파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나씨는 서울대 전기공학과에 다니던 1960년, 그리고 제대 뒤인 1965년에 남파된 누나를 따라 북한에 갔다가 왔으나 간첩 활동을 한 사실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두 번의 월북은 공소시효가 끝나 처벌대상이 되지 않았다. 나종인 씨는 보안사가 자신을 계속범으로 만들기 위해, 나씨가 업무 차 일본을 드나든 것을, 일본에 있는 임갑순이란 북한공작원에게 첩보를 제공하기 위해 잠입한 것으로 조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안사는 영장없이 구금했던 나씨를 84년 12월말에 일단 집에 보냈다. 보안사는 나씨에게 20년 전 월북했을 때 안내한 사람을 찾으면 용서해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 뒤 넉 달간 나씨는 ‘공포에 질려 정신나간 사람처럼 돼’ 기억을 더듬으면서 서울근교를 헤매고 다녔으나 성과가 없었다. 보안사는 1985년 4월초 나씨를 구속, 간첩죄로 기소했다. 나씨는 검사 앞에서, 또 1심 판사 앞에서는 자백했다가 징역15년이 선고되자 2심에서는 검사와 보안사에 속았다면서 범죄혐의사실을 부인했으나 상고가 기각되었다. 한 월간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 아들과 86세의 노모를 생이별시킨 기무사
약 20년 뒤, 그것도 민주화되었다고 인권의 시대가 열렸다고 샴페인을 터뜨리던 봄녘 어느 날. 제2의 나종인 남매 사건은 이석기씨 가족 사건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 씨 가족과 국가보안법과의 악연은 이석기씨가 이 법을 위반해 쫓기던 1992년 3월부터 시작됐다.
이석기(42)씨는 수배생활 10년 째인 2002년 5월 경 이른바 민족민주혁명당(아래 민혁당) 사건으로 잡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기소돼 2003년 3월 경, 2년6월의 형이 확정되었다. 그 해 6월에는 암투병중인 80대 노모를 만나기 위해 특별휴가를 받기도 했다. 이씨는 2003년 8월 광복절 특사때 가석방됐다. 이 씨의 석방으로 이야기가 끝이 나면 사실 국가보안법이 아니다.
이 씨에게는 노모(86)외에 넷째 누나 경선(48)씨와 셋째 누나 경진(52)씨가 있다. 고통의 화살은 작은 누나인 경선 씨에게 향했다. 경향신문 사회부 권재현 기자의 2004년 12월20~4일 치의 보도에 따르면 1980년 국방부 국방정보본부 공채시험에 합격, 부이사관(3급)의 직위에까지 오른 경선 씨에게 불행이 시작된 것은 2002년 봄. 민혁당 사건에 연루돼 도피중인 남동생에게 올케를 통해 7백여만원의 생활비를 보내주고, 12차례에 걸쳐 걱정어린 안부의 전자메일을 보낸 것이 화근이 됐다. 이를 알게 된 국방부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 ‘공무원으로서 품위를 손상시켰다’며 정직 2개월의 징계조치를 한 것.
● 국가보안법 거부자 이석기 누나의 눈물
경선씨는 2003년 2월 국방부를 상대로 정직처분 취소청구소송을 냈다. 2004년 1월, 서울행정법원은 경선 씨가 국방부를 상대로 낸 정직처분 취소청구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2004년 12월15일, 서울고법 제5특별부(부장판사 이종찬)는 ‘민혁당 사건으로 수배 중인 친동생의 도피생활을 도와준 경선씨에 대해 국방부가 내린 정직 2개월의 징계를 취소한 1심 판결은 부당하다’며 국방부가 낸 항소를 기각했다. 국방부가 계속 상고를 하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지금까지는 경선 씨가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끝나면 또 진짜 국가보안법이 아니다. 소송의 뒷면에는 지나온 날이 가시밭길 그 자체였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22년간 국가를 위해 헌신해온 경선 씨로서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처벌이었다. 징계 뒤에도 그는 꼬박 사무실로 나와 자신의 무죄를 항변했다. 책상이 치워져, 앉을 자리도 없었으나 사무실 구석에 앉아 ‘나홀로’ 근무를 했다. 그러나 직장 내 따돌림은 더 큰 고통이었다. 1심 승소 뒤 복직을 했으나 가깝던 선.후배, 동료들조차 등을 돌렸다. 무슨 대화를 나누다가도 경선씨가 나타나면 말을 끊었다. 3기암과 투병중인 팔순의 노모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던 그녀는 혼자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경선씨는 특히 기무사(사령관 송영근 중장)한테서 가혹한 행위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선씨 언니 경진씨는 “경선이는 동생 석기가 복역 중이던 지난해 6월께 군 기무사에 의해 눈이 가려진 채 어디론가 끌려가 조사를 받은 뒤로는 말 수가 더욱 줄었다”며 “경선이는 ‘암실’에서 공포 속에 떨어야 했다고 전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결국 원인을 알 수 없이 팔다리에 힘이 풀리는 ‘다발성 경화증’에 걸렸고 올 11월 중순부터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경진 씨도 “결혼도 하지 않고 일생을 국가에 충성해온 동생에게 어떻게 1년 동안 보직도 안 주고 무슨 ‘전염병 환자’ 다루듯 할 수 있느냐”며 울먹였다.
여기에다 경선씨는 기무사 조사 도중 구토 및 하혈까지 했던 것으로 드러나 ‘강압수사’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또 경향신문 12월21일자 1면 ‘국보법에 누나가 쓰러졌다’라는 기사가 나간 뒤 이씨의 언니 경진씨는 국방부한테서 ‘더 이상 문제삼지 말아 달라’는 회유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 승소소식을 듣자 기도가 막혀 버린 누나
울먹임은 끝이 없고, 소송의 뒷면에서 가시밭길이 엎친 데다 덮쳐 버렸다. 국가보안법과의 질긴 싸움을 끝내는 순간, 2심 소송을 이긴 12월15일, 그 다음 날 경선씨는 메인 목이 막혀버렸다. 언니 경진씨는 “어제(15일) 끝난 항소심 재판부도 너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긴 싸움을 벌이느라 얻은 ‘다발성 경화증’으로 몸이 굳어있던 경선씨는 그만 들뜬 마음에 과일 한 조각을 목에 넣었다가 기도가 막혀버렸다.
급히 삼성서울병원 중환자실에 옮겨져 지금껏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경선씨는 인공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식사도 코에 연결된 호스로 하고 발목주사를 맞는 등 위중한 상태다. 군복 입은 직원들을 보면 심각한 스트레스에다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언니 경진씨는 설상가상으로 군복 입은 직원들까지 차단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언니 경진씨는 병원 중환자실에서 정부의 부당한 정직처분에 맞서 싸우다 쓰러진 동생 경선씨 곁을 지키고 있다. 그는 “하나뿐인 고3 아들의 정시지원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으나,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뒤틀려버린 슬픈 가족사를 이제 정리할 시점에 집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고 했다. 국방부 쪽의 진정 어린 사과 한마디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동생이 이 상태에서 더 나빠지면 청와대 앞에서 삭발 단식이라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의도에서는 1300명을 넘어선 국가보안법 철폐 단식농성단의 목숨을 건 투쟁이 진행중이다.
경선씨측 변호인 심재환 변호사(법무법인 정평)는 “20여년 국방부 근무기간 내내 성실하게 일했던 그에게 남동생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가해진 시련은 여성으로선 감내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진씨는 이 모든 ‘역경’을 가슴에 고스란히 끌어안은 채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보안법과의 전면전에 나서기로 했다. 우선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면 경선씨의 명예부터 회복할 계획이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 힘든 과거를 보상받을 참이다. 또 막내 석기씨가 제기한 ‘간첩 혐의’에 대한 명예회복 청구소송도 적극 도와, 보안법이 만든 잔혹한 가족사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계획이다.
● 국방부와 기무사의 사과를 촉구하며
84~85년 나종인 가족 사건은 나경애와 이름이 비슷한 나 씨의 여동생 나경혜로 시작된다. 죄라면 이름이 비슷한 죄 뿐이었다. 나씨 가족들을 4년간 미행하다가 별로 단서가 보이지 않자 일을 저지른 보안사 대공처 수사관들, 그들의 못된 버릇은 모질게 오래가나 보다.
21세기에도 살아남은 기무사 수사관들이 이석기씨를 수사하면서 국방부에 근무하고 있는 누나 경선 씨와 무슨 대단한 단서라도 있는 것처럼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국방부와 기무사는 국가보안법으로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까지 마음대로 짓밟아도 되는 것인가. 2~30년이 지나도록 변화하지 않는 데가 국방부이고 기무사이다. 군개혁은 요원하다. 여동생과 누나의 눈물을 모아 가족의 이름으로 기무사의 해체를 촉구한다.
그래야 가족과 군이, 민중과 군이, 국민과 군대가 하나가 되는 군민일치, 군병일치가 될 수 있다. 서로에게 필요한 물과 고기가 되는 것이다. 연말연시 전방에 사진 찍으러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보안법 완전폐지와 기무사를 해체하는 게 더 급하고 중요하지 않을까. 이석기씨 가족의 조속한 쾌유를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