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선택이란 것이 있다. 더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 순간의 선택이 운명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일은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가 역사적 물결의 한가운데일 때 더욱 그러하다. 우연이었다. 내가 평화단체들의 평화크루즈에 참여한 것은 도선배가 다른 집회에 초청되어 나와 같이 할 수 없게 됐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일단 시간을 보낼겸 선상여행이나 하라는 것이었다. 의미없는 여행은 싫었지만 얼떨결에 떠밀리듯 배에 타고 말았다. 그리고 배에 타서 안내자료를 받아보고서야 이배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게 됐다. 일제때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이 가혹한 노동으로 혹사당하던 해저탄광으로 이들은 이곳에서 원폭피해까지 당한다. 다카시마(高島)와 하지마(端島)가 바로 그 섬들이다. 나는 하지마를 보는 순간 온몸이 긴장되었다. 섬을 한바퀴 도는 동안 한순간도 그들 건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군함도란 별칭답게 섬은 마치 콘크리트로 만든 요새처럼 그리고 엔진을 켜고 달려들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울산하면 현대이듯 나가사키하면 미쯔비씨이다. 나가사키항 전체가 미쯔비씨에 포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함도는 바로 이 미쯔비씨가 소유한 섬이었다.
경상도와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많은 조선인이 강제 연행되어 왔다. 그들이 배에 실려 도착하면서 이 섬을 보았을 때의 느낌이 어땠을까 지금 관광을 하며 보고 있는 나의 느낌이 이러할 진대...상상이 가지 않는다.
사진에서 보여지듯 섬은 도망갈 수 없도록 콘크리트로 된 해안 절벽과 숙소와 공동목욕탕 두 가지 목적으로만 세워져 있다. 이들 섬위의 지상건물은 지하로 해서 해저로 연결되는 탄광을 위한 건물로 지상 건물들은 지하해저탄광을 위한 부속시설일 뿐이었다. 조선인과 중국인은 서로 보지 못하도록 구역이 나누어져 있었고 중국인들의 피해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작업은 아침 7시와 저녁 6시 두 번씩 맞교대로 이루어졌다. 이들에게 지급된 식사는 현미와 보리밥 반종지에 된장같은 국물 한 그릇이 다였다. 임금은 지급되지 않고 통장에 입금되었다. 결국 피폭으로 사망한 조선인과 가족들에게 이들 임금은 지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45년 8월9일 또다른 제국 미국에 의해 나가사키 중심지에 핵폭탄이 투하됐다. 나가사키의 다른 탄광과 군수공장에 징용되었던 조선인들과 함께 군함도의 조선인들도 원폭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배가 흔들린다. 군함도는 쉽게 감정을 내비치지 않을 기세인 듯 요지부동이지만 유일한 조선인 탑승자인 나는 흔들리는 배안에서 어찌할 줄을 모른 채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감시
도 선배가 한 집회를 마치고 다른 집회로 바쁘게 이동하고 있었다. 도 선배가 말했다. 경찰이 따라오고 있어... 어디에라고 반문하듯 고개를 돌리자 증명을 할테니 보라는 듯 일부러 한 블럭을 더 돌았다. 과연 우리가 시험삼아 멈추면 따라 멈추며 서툴게 바로 뒤를 따라오는 차량이 있었다.
이들의 감시는 사실은 이미 사세보부터 시작되었었다. 시노자키 선생을 만나 배에 오르기 위해 부두에 서있을 때 건너편에서 서너 명의 선그라스들이 한 명의 사진기를 숨긴 채 우리를 열심히 찍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나가사키에서 그 많은 사전집회를 마치고 길을 이동할 때마다 이들 어설픈 감시조들은 과도한 야근에 시달리며 우리의 뒤를 밟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커튼을 슬쩍 들춰보니 두 명의 그림자가 숙소앞 자판기의 조명을 환하게 받으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의외였다. 일본은 공산당을 인정하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그런데 평화단체들을 이토록 밀착감시한다니 한국에서도 흔한 일은 아닌데, 물론 그들이 나를 감시할 목적은 아니었지만 한국을 떠나기 전 박 선생님의 염려와 일본에 도착해서 도 선배의 우려가 모두 현실임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왜 그리도 선배들께서 준비를 강조했는지 이젠 알게 되었다.
히로시마와 다른 나가사키
히로시마평화박물관에서의 몇 가지 불쾌한 문구들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일본이 원폭의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논리의 바탕에 가해자의 반성이 결여되어 있음으로 해서 생긴 묵운 감정들이었다. 나가사키는 달랐다. 조선인원폭희생자위령비가 나가사키피폭지공원 안에 중요한 장소에 위치해 있었다. 히로시마는 공원다리 건너 한쪽 구석에 위령비가 위치해 있던 것을 민단이 총련을 제치고 공원안으로 이동시켰다. 조선인이 아닌 한국인위령탑으로 위령비가 서있었다. 나가사키는 조선인이란 이름으로 위령비가 서 있었다.
다음날인 8월 9일 맨 첫 행사도 조선인원폭피해자위령제였고 일본의 평화단체들은 물론 매스컴도 히로시마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동원되어 높은 관심을 보였다. 무엇보다 조선인피폭문제가 일본의 피폭문제보다 중요한 문제임을 누구나가 자각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히로시마와는 다른 것이었다.
위령제는 물론이고 전체 평화집회에서도 재일조선인2세라고 소개하는 도 선배는 매우 중요한 연사였다. 모든 자리에서 현재의 한일연대의 새로운 과제로 유엔사 해체 문제가 얘기되었다. 히로시마에서부터 집회에 참석해온 단체들은 이제 이 문제를 거의 정확히 알 정도가 되었다. 걷기명상 전에 광화문 여중생추모집회에서 만났던 나가사키 평화단체분들을 다시 만난 것도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그분들은 이곳에서 거의 핵심으로 일하는 자원활동가들이었다. 그들의 소개로 유엔사 해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평화학교수님을 소개받기도 했다. 만나게 된 나가사키의 작은 사설 평화박물관인 오카 선생의 평화박물관이 있었다. 비록 작고 전시물들이 세련되진 않았지만 일본이 원폭의 피해자이기 전에 가해자임을 통렬히 반성하는 내용들이었다. 그곳엔 일본인 피폭자보다 조선인과 중국인 피폭자들의 고단했던 역사가 살아 있었다. 2층엔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는 신문기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이라면 미국에 대한 비판이 정당하다. 그리고 격에 맞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