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사진작가)


 
사진작가보다는 평화운동가로 알려진 이시우씨가  6월 20일 새벽 '유엔사 해체'를 내걸고 걷기명상에 나섰다.

서쪽끝 강화도에서 동쪽끝 고성까지, 다시 고성에서 부산까지 약 1천km의 대장정을 무사히 마친 그는 7월 23일 일본으로 떠났다. (수신전용 전화 001-81-090-8357-8263)

당초 두 달여에 걸친 일본에서의 2천km 대장장은 일본 현지 평화운동단체들의 일정때문에 부득이 10월이후를 기약하게 됐다.

그러나 오끼나와에서 진행되고 있는 헤노코마을의 미군기지 건설저지 농성자에 결합한 뒤 8월 4일 오사카로 가 원자폭탄 피폭지인 히로시마(8월 6일)와 나가사키(8월 9일)를 거쳐 사세보까지 걷기명상을 계속한다. 그는 8월 13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그의 이번 장정은 우연이 아니다.
일찌기 비무장지대(DMZ) 일대에 대한 사진작업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고독한 발걸음은 '(사)통일맞이'의 휴전선평화통일대행진과 함께하며 힘을 더해갔고, 한국대인지뢰대책위 활동과 더불어 전국 각지의 미군부대 답사는 주일미군기지까지 이어졌다.

통일뉴스 전문기자로서 NLL(북방한계선)과 유엔사, 주한미군의 핵 문제 등에 대한 천착도 쉼없이 진행됐다.

통일뉴스는 그가 매일밤 기록하는 모든 여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재할 예정이다. 이 글은 이시우 홈페이지(
http://www.siwoo.pe.kr)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편집자 주


8월 4일

한글자판에 내가 얼마나 익숙해져 있었는지 실감한다. 오늘 처음으로 한글로 작업을 하자 작업 속도가 다르다. 틀이 내용을 규정하진 않지만 틀이 효율성은 규정한다.
  
오끼나와에서의 이야기를 하자 도유사 선배님은 추가 설명을 해주었다. 이하요우이치 현기노완시장은 노동조합운동출신으로 오끼나와 현 의회 의원을 거치고 시장이 되었다. 그는 타이라목사가 자신과 절친한 친구사이라고 했다.

아리메 마사오란 유명인사가 있다. 소학교 선생인데 72년 오끼나와 복귀까지 투쟁을 지도해온 분들이 다름아닌 학교 선생님들이라고 한다. 72년 복귀당시는 베트남전쟁 중이었고 미군기지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평화헌법 9조 위반이라고 반발하였다고 한다. 그 뒤 오랜동안 그러했지만 당시 선생님들이 최선봉이었고, 다음이 미군기지노동조합원들 이었다고 한다.

오사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던 도 선배님과 히로시마로 향한다. 이제부터는 차로 이동한다. 1차걷기 명상이 마무리된 셈이다. 이제 일본에서의 2차 걷기명상을 조직하기 위한 일정들만이 남았다. 만나야할 사람들과의 인연이 이제 많은 것을 이루게 할 것이었다. 히로시마의 간판이 보이고 얼마 안되어 나타난 갈림길에 요나고로 가는 표지가 서있다. 요나고엔 북의 통신을 늘 감청하는 자위대 부대의 코끼리우리가 위치해 있다. 작년 내가 일본에 왔을때 이와쿠니에서 요나고까지 무턱대고 오려고 했던 생각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지, 특히 그리고 또 하나 당시 투박한 지도로 히로시마와 요나고의 거리를 계산한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실감한다. 한국전 당시 미군의 상륙작전을 가장 망설이게 했던 것이 정확하지 않은 지도였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친다. 내 인생엔 그렇게 지도가 운명의 화두 처럼 따라 붙는다.

우리는 우선 히로시마 근처의 미요시란 곳으로 간다. 고보댐을 보기 위해서이다. 더 정확하게는 고보댐을 만드는데 강제동원되어 죽어간 조선인들의 유골을 수년 째 발굴하여 한국 천안에 송환케한 일본인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도유사선배가 이시우를 위한 재일조선인 문제 이해시키기 차원의 배려였다. 그는 무리하지 않게 그러나 집요하게 나를 재일조선인 문제 속으로 끌고 갔다. 국제연대 특히 한-오끼나와 연대를 개척해 낸 그에게 가장 큰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재일조선인문제였다.

미요시에 도착했다. 산골에 위치한 한 작은집의 2층에는 사무실이 있었다. '빈고 후레아이 고우보우(備後ふれ合い工房)' 빈고는 옛날 미요시의 지명이다. 오사카를 난이와로 토쿄를 에도로 부를때의 이름이다. 후레아이는 첫 만남을 의미하며 고우보우는 사무실을 이야기한다.

'빈고 후레아이 고우보우(備後ふれ合い工房)'는 일제점령기 일본의 댐 건설이나 도로건설에 강제동원되어 사망한 채 땅에 묻힌 한국인들의 시신을 찾아내어 발굴하는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모임이었다. 유골 발굴 작업은 6년간을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이루어졌고, 이들 유골은 절에 일단 모셨다가 작년에 드디어 천안 망향의 동산으로 이장시키고 나서 일단 정지되었다고 했다. 우선 강제연행된 동포를 아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거의 돌아가셔서 유골을 찾기 힘들게 되었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레슬링 선수 김일을 생각나게하는 인상의 야마다씨와 청년 같은 쓰가모토씨가 우리를 맞는다. JR철도노조 출신이었다가 작년에 은퇴하고 새로운 일을 찾으며 이일을 맡아하고 계신다고 했다. 여기와서 안 사실인데 평화운동에 가장 관심이 많은 것은 노동조합과 노조출신의 어르신들이었다. 얼마 뒤 유골을 봉안했던 절의 스님이 합류하셨다. 그는 북의 묘향산에서 본 스님처럼 삭발하지 않은 너무 평범한 아저씨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대처승이 사회운동에 더 적극적이라고 도 선배가 귀뜸해준다.

사람들과의 화제는 유골송환이후의 조직문제에서 유엔사문제로 옮겨 갔다.
도유사 선배와 다니는 곳마다 유엔사문제 얘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놀라워 했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나 지금 이런 사람과 이런 얘기를 하고 있어' 하는 식으로 사람을 오도록 권하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오랜만에 보는 조직의 마술사였다.      

8월 5일

1940년부터 고보댐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전시동원령에 따라 양은이며 철이며 모든 것을 동원하던 시절 전기야말로 중요한 군수산업자원이었다. 문제는 당시 식민지민이란 이름하에 조선인과 중국인을 강제동원한 것이다. 고보댐은 저수용량대신 낙차가 중요했기에 산 높은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때문에 댐으로 가는 길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계곡이 이어졌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몇 개나 되는 발전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 발전소는 산에 터널을 뚫고 물을 낙하시켜 발전을 했다한다. 고보댐을 올라가는 길에 미요시시 기미타손(君田村)지소에 들렀다. 우리로 치면 읍사무소가 된다고 했다.

이곳에 들어서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한글 표지판이었다. 도선배는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는 듯 설명을 했다. 게시판에는 1959년 조선인들이 귀국하면서 기념식수한 나무란 설명이 붙어 있었다. 도선배에게 처음 이곳을 소개해준 후꾸마사선생의 말에 의하면 이곳엔 과거 공산당 세력이 아주 컸다고 한다. 그러니 조선말로 게시판이 붙어있는 채로 읍사무소 한복판에 보존되고 있으리라.

산길을 따라 얼마를 더 올라가자 댐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것이 나타난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 그토록 수많은 조선인이 죽었다니 아닌 것 같았다. 역시 상식은 맞았다. 이것은 고보댐이 아니고 고보댐 아래에 있는 수위 조절용 댐이란다. 이름은 꾸쯔가하라(沓原)댐이다. 도선배가 여기에서 멈춘 이유가 있었다. 고겟스소(湖月莊)라는 건물흔적이 얼마 전에 올 때까지 여기 있었단다. 고겟스소란 댐으로 물을 막으며 자연스레 호수가 생기고 이 호수를 배경으로 달이 뜨면  일본군과 관리들이 이곳에 기생들을 옆에 앉히고 온갖 추태만상을 보이던 곳이라 한다. 도 선배는 처음 이곳을 보았을 때 2차대전을 그린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던 요정집과 분위기가 똑같아서 단번에 어떤 건물인지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엔 강제동원된 댐공사를 피해 도망하던 조선인들을 잡아 고문하던 고문장이 있는 곳이었다 한다. 조선인들의 비명과 호수의 달빛을 보며 즐기던 일본인들의 도락이 함께 하던 역설의 현장이었다.

고보댐은 좁은 협곡사이에 높게 건설되어 있었다. 지금처럼 포장로가 있었을리 만무한 당시의 수송수단은 삭도였다. 일종의 짐을 실어나르는 케이블카이다. 지금도 삭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도선배는 후꾸마사 선생의 말을 옮겨 설명했다. 당시 삭도에 실려온 콘크리트를 쏟아 붓는데 콘크리트가 잘 섞이고 공기층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댐 아래에서 콘그리트를 휘 젖는 일을 조선인들이 하고 있었다. 허술한 삭도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만큼 콘크리트를 쏟아 붓지 못했고 결국 아래에서 일하던 조선인들 위로 콘크리트가 쏟아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조선인들은 그 아래에서 모두 콘그리트에 묻히고 말았다. 이들의 시신은 댐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댐위를 걷는자들이여 신발을 벗어들고 그들이 깨어나지 않도록 경건히 발을 떼시라.

히로시마원폭돔이 멀리서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순례객들이 줄을 이어 걷고 있었다. 내일은 고이즈미수상까지 참석하는 세계적인 행사일이다. 행사준비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전시관을 올랐다. 오랜시간 꼼꼼히 보고 또 본다. 핵을 잘 안다고 스스로 생각해왔지만 내 의식에서 결여되어 있는 것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생생한 피해에 대한 현장인식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논리와 달라서 보고 또 보고를 계속하여도 관성화 되지 않는 그 무엇이었다.

일본에 오기 전 급할 때 사용하기 위한 일본어를 배우는데  많은 선생님들의 수고가 동원되었다. 그중 하나가 '물좀주세요'란 뜻의 '미즈오 쿠다사이'였다. 카데나 탄약고를 이틀에 걸쳐 돌아보며 걷고 있을 때 살인적인 8월의 폭염에 탈진상태에 이르러 만난 첫 사람에게 건넨 말이 바로 '미즈오 쿠다사이'였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나의 상상력은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예수의 그 고단함으로 인도되어 있었다.

원폭자료관의 전시물중에 나의 눈을 끈 것이 있었다. 원폭을 당한 히로시마 사람들이 일그러진 신체와 8월의 폭염에 견디다 못해 절규한 말이 바로 '미즈오 쿠다사이 물좀 주세요'였다는 설명판이 그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고통이 조금씩 내 몸에 전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오래동안 자리를 뜨지 못한 채 전율하고 있었다. 물 한모금의 절박함으로 우리의 평화운동은 항상 새로 시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자료관의 원폭에 대한 설명은 자세하나 자신의 피해자로서의 측면과 가해자로서의 측면중 피해자로서의 측면이 강조되어 있었다. 피해자로서의 인식은 전세계에 핵무기 사용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보편적 가치로 일본인을 안내 할 터였다. 그러나 가해자로서의 반성 없는 피해의식에 대한 경도는 반핵평화운동에 대한 큰 장애물로 보였다.

전시물중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 식민지 조선인들 중 일하기 싫어하는 자들이 일본에 건너와 있다가 피폭 당했다는 설명이다. 히로시마가 폭격대상이 된 것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주공부대였던 5사단과 군수보급창등 핵심 군사시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엔 철도가 도쿄에서 히로시마까지 연결되어 있었기에 갑오농민전쟁을 탄압했던 일본인부대도 히로시마항구를 통해 출발했다. 히로시마의 침략사가 원폭피해사로 가려질 순 없는 것이었다. 베트남의 전쟁범죄 박물관에도 일본인들이 돈을 내서 세운 히로시마 원폭피해관 박물관입구에 크게 세워져 있다. 이전에 그것을 보며 내가 존중했던 것은 공교롭게도 일본의 원폭피해가 아니었다. 그들보다 더한 상흔을 가진 베트남이 일본의 상처를 껴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고통을 체험한자만이 진정한 평화로 나아갈 수 있다. 물 한모금의 그 절박함이 항상 평화운동의 출발점이 되어야한다. 다시 자신을 그 자리에 세우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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