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번 장정은 우연이 아니다. 일찌기 비무장지대(DMZ) 일대에 대한 사진작업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고독한 발걸음은 '(사)통일맞이'의 휴전선평화통일대행진과 함께하며 힘을 더해갔고, 한국대인지뢰대책위 활동과 더불어 전국 각지의 미군부대 답사는 주일미군기지까지 이어졌다. 통일뉴스 전문기자로서 NLL(북방한계선)과 유엔사, 주한미군의 핵 문제 등에 대한 천착도 쉼없이 진행됐다. 그가 이제 혼자서 길을 떠났다. 비바람과 땡볕만이 기다리는 길 위에 홀로 텐트에서 자는 것을 '원칙'으로, 인터뷰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유엔사 해체를 위한 고독한 싸움에 돌입했다. 흔한 휴대폰 하나 없이 살아온 그에게 유일한 세상과의 연락은 김미옥 한국대인지뢰대책위 전 간사가 맡았다. (전화 019-314-6465) 통일뉴스는 그가 매일밤 기록하는 모든 여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재할 예정이다. 이 글은 이시우 홈페이지(http://www.siwoo.pe.kr)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편집자 주 |
파도
태평양을 건너 밀려온 바다는 대지 앞에서 더 밀려오지 못한 채... 자꾸 뒤에서 미는 얄궂은 바닷물에 수줍은 듯 뒤로 도망치곤 한다. 번갈아 밀고 뒷걸음치는 바다가 만들어 내는 파도는 그렇게 전설이 되었다. 끝없이 밀려와서는 손도 내밀지 못하고 뒷걸음만 치는 수줍음의 동화가 되었다. 바다가 쉼없이 어루만져 닦아 놓은 모래거울에 이유없이 글을 써본다. ‘모든 그리운 것들은 떠나지 못하고 서성인다.’ 파도는 더 이상 다가서지 못하는 대지를 떠나지 못한 채 그렇게 서성이고 있었다.
파도에서 사랑과 꿈을 상상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바다에서 전쟁을 상상하며 기획하는 자도 있다. 전쟁으로 인한 죽음에 영웅의 칭호를 붙임으로서 애초의 전쟁의 상상력은 비로소 합법성을 인정받는다. 장사해수욕장에는 포항상륙작전 전적비가 서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유인용 작전에 800명의 학생들은 학도병의 이름으로 운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오늘 차가운 비석의 영웅이 되어 고단하게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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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뢰전에 주목하라
올해 4월 21일 서태평양 기뢰대항전 훈련이 있었다.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공동주관으로 말라카, 싱가포르 해협 근해에서 실시되는“2004년 서태평양 기뢰대항전훈련”에 한국 해군은 훈련분대 사령관(김정식<金正植> 대령, 해사 32기)의 지휘하에 기뢰부설함 원산함(MLS : Mine Layer Ship, 3300톤)과 기뢰탐색 소해함 옹진함(MSH : Mine Sweeping Ship, 880톤) 등 기뢰전함 2척과 폭발물 처리반(EOD : Explosive Ordnance Disposal) 요원 14명이 참가했다.
이번 훈련은 호주, 싱가포르, 일본, 인도네시아, 중국 등 총 15개국, 20척의 함정과 폭발물 처리반 186명이 참가하며 미국, 러시아, 베트남 등 3개국이 참관국 자격으로 참가했다고 한다.
미 해군의 유일한 기뢰전 지휘함(MCS)인 1만8,000톤급의 인천함(INCHON)이 처음으로 한미 연합 기뢰전 훈련에 참여한다고 했다.
군 관계자는 8일 “인천함이 10일부터 사흘간 부산 앞바다에서 우리 해군의 기뢰부설함 및 소해함 등과 함께 연합 훈련을 하게 된다”며 “그동안 북한의 대규모 기뢰부설을 통한 항구 봉쇄에 대비하기 위한 연합훈련을 여러 차례 실시해 왔으나, 승무원 1,400여명을 태운 인천함이 가세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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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뢰전은 2차대전 때는 나름대로 중요한 해전의 한 부분을 차지했지만 국방예산 감축압력은 이 인기 없는 분야를 사정없이 해체시키다시피 했다. 한국전쟁 특히 원산상륙작전을 앞두고 비로소 미군은 기뢰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소해작전은 아주 특별하고 위험하고 어려운 작업이다. 이 작전은 매력적이거나 사람들이 알아주는 작업도 아니다. 2차대전 동안 미 해군 태평양 소해함대는 525척에서 550척의 소해함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 개전 당시에 해군 소해세력은 4척의 소해함(3척은 관리상태)과 6척의 소해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태평양전쟁시 활동했던 기뢰전 인력의 99%가 예비역으로 전환되었다. 그나마 이러한 예비인력도 1945-1950년 사이에 예산삭감과 해군의 기뢰전에 대한 관심 소홀로 삭감되어 소수만이 유지되고 있었다. 소해장비와 소해전술의 개발에 대한 미력한 노력만이 있었을 뿐이다. 2차세계대전시의 막강한 소해세력들은 실제적으로 해체되고 없었다.
1946년 3월에 태평양함대 기뢰전 사령부를 일본해역에 있던 지휘함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동시켰다. 소해함의 배치는 해군참모총장의 손에 달려 있었다. 기뢰부설함(소해함과는 구별)은 대서양함대에 배치된 4척을 제외하고 모두 퇴역시켰다. 기뢰위치 측정함들도 대서양 함대에 배치된 3척을 제외하고 고철이 되었다. 소해함정 기함들도 모두 팔리거나 고철이 되었다. 해군기뢰전 전비태세에 가장 큰 타격을 가한 것은 1947년 1월에 니미츠 해군총장의 명에 따른 태평양기뢰전 사령부의 해체와 기뢰전 세력의 대폭적인 축소였다. 이것은 1948년 해군의 예산삭감에 따른 부득이한 조치였다. 태평양 함대의 소해세력은 계속 감소되었고 남은 세력은 태평양 함대 지원부대와 순양구축함부대로 분산되었다. 태평양 함대사령부에는 단지 3명의 기뢰전 전문장교만이 참모로 남아 있었다. 해군장관은 1948년 기뢰전 특기를 폐지하라고 지시했다가 유효일 이전에 이를 취소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기뢰전에 대한 훈련 축소와 관심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기뢰연구와 훈련을 위한 예산과 전문요원을 유지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게 되었다. 구축함 타입의 소해함은 대잠전과 예인선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본에 정박중인 6척을 제외하고는 진주만, 괌, 산디에고 등 전략적 항구의 방어를 위해 보내졌다. 함대지원부대장은 이러한 함정에서 소해장비를 철거했다. 기뢰전에 대한 해군의 일반적인 관념은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없는 일반 장교들도 이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소수의 젊은 전문장교들에 의해 많은 검토와 전략적 연구가 있었으나 지휘관 수준에서는 기뢰전에 많은 훈련과 경험과 연구가 요구되는 전쟁분야로 여겨지지 못했다. 그들은 현대해전에서 기뢰가 바다를 제어하는데 얼마나 심각한 장애물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었다. 기뢰 절단기는 더 이상 기뢰로부터 자함을 보호하기위해 군함에 설치되지 않았다. 소자 시험 설비도 태평양으로 한정되었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에 발견된 음파탐지기로 기뢰를 탐지할 수 있도록 성능개선을 시킬 수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소해훈련은 제한을 받았고 대신 대잠전과 수중물체 인양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할당하였다.
1950년 6월25일 당시 미 해군은 2개의 구축함 소해전대와 2개의 함대 소해전대 그리고 21척의 소해함(AMS), 2척의 소해보트(MSB)를 해군에서 운용중이었다. 태평양에는 기뢰전을 지휘할 수 있는 사령부가 없었고 기뢰전 수행책임이 순양, 구축함사령부와 태평양지원사령부로 이원화되어 있었다. 해군태평양사령부는 12척의 소해함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전쟁해전사, p.158)
그러나 한국전에 이은 냉전은 이들 교훈을 쉽게 잊혀지게 했다.1960년대 중반이후 제해권 개념이 대양에서의 해상통제 및 해상에 대한 공간 통제에서 수중에서의 우세 및 통제(Control the undersea realm)로 전환되었다. 왜냐하면 이는 미국과 구소련이 정의하고 있는 해군력을 궁극적 연관성(Ultimate Co-relation)이 있는 해양분야에서 군사적 힘으로 간주되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수중분야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연안전이었던 한국전쟁에서 대양전략을 요구하는 냉전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냉전의 해체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던 미 해군은 걸프전에서 자신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군종으로 전락해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 소련의 핵잠수함 등을 상정한 대양전략은 소규모 분쟁에서 무용지물이었다. 창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바늘로 쓸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미 해군에 퍼진 위기의식은 몇 년의 연구끝에 새로운 방향을 결정한다. ‘바다에서’가 아닌 ‘바다로부터’의 전쟁개념을 확정한 것이다. 해군 독자적 작전의 시대를 접고 지상전을 지원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하게 된 것이다. 다시 전통적인 재래전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고 기뢰전 교리는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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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해전사, p.152)
유엔사 후방기지병력의 한미훈련 참가
한국전쟁사를 다룬 책을 기원으로 하기에 위의 기록은 한반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미국의 해외 전쟁 경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기에 한반도에서의 기뢰전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2003년 3월 22일 포항항에는 일본 사세보의 대기뢰전 함정인 가디언과 패트리어트를 비롯한 소해함정들이 부산스럽게 오가며 소해작전을 펼치는 모습이 포착됐다. 새벽부터 움직이던 선박사이에서 하얀 물기둥이 솟고 얼마 안 되어 폭음이 귓전에 울려왔다. 기뢰를 발견하여 폭파시키는 장면이었다. 오전 내내 그것이 전부였다. 기뢰전이 얼마나 지루한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이 훈련은 월포 독석리 해안에서 진행된 상륙훈련과 같은 장소는 아니었지만 그와 연관되어 다른 장소에서 따로 훈련되는 것이라 했다. 원래는 소해작전이 성공한 후에야 상륙작전이 가능한 것이다. 즉 북에 대한 선제 상륙작전연습이라고 의심을 받는 독수리 훈련중 상륙전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사세보해군기지는 일본에 위치한 유엔사 후방기지중 하나이다. 한미연합훈련이란 이름으로 실제는 이들 유엔사 후방기지병력이 한국에서의 군사훈련에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대기뢰전은 일상훈련인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미 해군의 미래혁신과제와 전환전략에 입각해서 보면 가볍게 보아 넘길 범주가 아님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 올해 4월에 있었던 2004년 서태평양 기뢰대항전훈련은 한국과 미국과 더불어 일본이 여러 나라와 섞여 연합훈련을 치른다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런 종류의 훈련에서 일본 자위대에 대한 동향을 감시하는 것은 한국전 당시를 회고할 때 유엔사의 이름아래 일본 자위대까지 동원되는 체계가 가동되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이 된다.
일본군의 한국전쟁 참가
원산상륙작전시 미 해군은 기뢰전력 부족을 보완하기 위하여 20여 척의 일본 소해정을 사용할 수 있도록 유엔군사령관에게 승인을 받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1950년 10월 2일 미 극동해군참모부장은 소해부대의 부족을 이유로 일본측의 협력을 요청, 일본은 GHQ의 명령문서를 일본정부에 지령하는 절차를 거치도록 미 해군에 요구하였고, 5일 예정했던 소해정들은 시모노세키 가라도(唐戶)에 집결 완료하였다.
10월 6일 17시 극동해군사령관 죠이 중장은 운수성장관에게 일본소해정 사용에 관한 지령을 하달하였으며 같은 날 20시, 일본 소해대는 제7통합임무부대 지휘관 스트러블 중장의 지휘하에 제95.6소해·호위임무부대군 TE 95.66으로서 편입되어 10월 7일 09시에 출동명령이 하달되었다. 이 소해대는 10월 7일 12시, 제1소해대가 인천으로 출항, 10월 8일 04시 제2소해대가 대마도를 향하여 출항, 10월 10일 이른 아침 원산만에 도착하여 소해를 실시하였다. 일본 소해대는 소해작업 중 촉뢰 사고로 부상 22명, 행방불명 1명의 손실을 입었다.
전쟁 당시 일본의 역할은 미국 측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미국은 장차전을 대비하면서 대소 전쟁차원에서 일본을 아시아의 거점으로 육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일본의 지원활동은 비밀리에 실시되었다. 어쨌든 일본은 평화헌법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이를 어겼다. 미군의 요청문서 하나에 의해서... 일본이 자발적으로 협조했다면 일본은 전범국으로서의 의무를 포기한 것이고, 유엔군사령부의 강권에 의한 것이었다면 미국이 일본을 제2의 전범국으로 만든 것이다. 자세한 연구가 더 이루어져야겠지만, 미국도 일본도 책임을 면할 길은 없다.
어쨌든 일본은 한국전에 소해부대를 파견하는 과정을 통해 유엔사의 아래 전시동원체제에 편입되었고, 그것은 한국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가능한 것이다. 요시다-애치슨교환각서는 유사법제보다도 선행하는 효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