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빚 받을 것 있으면 계속 독촉해야 돼요. 일정한 기간을 두고 독촉하지 않으면 민법상으로도 무효거든요."

남북회담 등으로 북한과 30여년 상대하며 익힌‘입담’실력일까. 정세현(59.丁世鉉) 통일부 장관은 달변의 재담가로 통한다.

6.15 남북정상회담 4주년을 계기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답방'을 촉구한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자 대뜸 '빚쟁이 독촉론'으로 응수했다. 지난 25일 오후 3시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의 통일부장관 접견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답방 촉구는 서울 답방 약속을 받아낸 분으로서 그것이 실현되지 않고 있는데 대한 일종의 환기성 발언으로 원칙론적 말씀인 셈입니다." 북핵 문제가 여전히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답방 약속을 지키거나 노무현 대통령과 '2차 정상회담'을 열 조건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도 '핵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돼야 정상회담의 의미가 있다'고 말씀했듯이 '의미 있는 회담'이 되려면 북핵 문제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야 하겠지요." 26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선 제3차 6자회담이 폐막됐다. 남.북한과 미,중,일,러등 6개국은 '한반도 비핵화의 첫 단계 조치로 핵동결 범위.기간.검증방법과 상응조치를 구체화하기로 하는 등 8개항의 의장성명 채택 등 나름대로 성과를 얻었다.

정 장관은 어떻게 평가하고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 궁금해 전화를 걸어봤다.

"최대 성과는 북한도 매우 진지한 대안을 내놓고 특히 미국이 아주 구체적인 협상안을 내놓았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의 회담은 예비회담이고 이번부터가 본회담이 라고 얘기해도 되지 않을까요. 특히 미국쪽의 입장이 북핵문제 해결에 급진전을 보일 만한 상황이 아닌 만큼 이번에 큰 물꼬를 트지는 못했지만 미국이 전향적으로 나왔다는 것은 좋은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전화 회견 내용 역시 그대로 옮겨적으니 바로 기사체 문장이다. "원래 논리적으로 말을 잘했나"고 물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더니 교수가 되고 싶었는데 팔자에도 없는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다"

1945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쟈무스(佳木斯)시에서 태어난 지 100일만에 부모를 따라 전북 임실에 정착한 그는 전주 북중 졸업 후 서울 유학길을 떠났다.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통일부장관으로 노무현 대통령 정부에서도 통일부 수장을 맡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잇는 가교(架橋) 통일장관을 2년여 수행해 오는 등30여년 '통일 일꾼'으로 살아온 그는 원래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서울대 외교학과 석사 졸업 후 박사 과정에 등록했는데 1977년 대학 은사인 이용희(작고) 전 국토통일원 장관의 권유로 국토통일원 4급 별정직 시험에 응시, 관계에 투신했다. 1982년에는 모교인 서울대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의 대외관계 전개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취임 일성으로 '국민과 함께 하는 대북정책'을 주창한 그는 요즘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열린 통일포럼 강의에 열중하고 있다. "교수가 못된 한(恨)이 어느 정도 해소되겠군요"라고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작년 3월27일 열린통일 포럼을 시작한 이래 지난해 한해 18회 강의를 했습니다.교수의 꿈을 이뤄보려고 한 것은 아니고요(웃음), 국민과 함께 하는 대북정책이 돼야한다는 생각에서 나서게 된 겁니다. 국민정부의 대북정책은 국민과 함께 하는 측면이 조금 부족해 정권 말기에 이를 둘러싼 남남 갈등이 심화됐다는 점에서 열린포럼 등 '국민과 함께 하는 대북정책'을 평화번영정책의 추진원칙 중 하나로 정하게 됐지요."

'평화번영정책의 전도사'인 그는 쌍방향 대화식으로 정부정책을 설명하면 듣는 쪽에서 대안을 제시하고 비판하기도 하는 등 굉장히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장에서 얻는 좋은 대안은 그 자리에서 채택, 남북대화나 남북교류현장에서 적용해오기도 했다고 은근히 자랑했다.

국민의 정부 5년간 통일부장관이 5명이나 교체됐다. 2002년 1월29일 당시 홍순영 장관 후임으로 통일정책 사령탑을 맡은 이래 그는 참여정부의 초대 장관으로 현정부내 최장수 각료 타이틀을 안고 있다. 통일부장관으로서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국민의 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발전시킨다는 노 대통령 취임사 때문에 아마 참여정부에서 일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덕분에 북쪽에도 상당히 좋은 메시지가 됐다고 생각하고 우리 국민에게도 대북정책이 일관성을 가지고 추진되겠구나 하는 인식을 심어준 것 같습니다. 대북정책의 안정적 추진이나 한반도의 안정적 관리, 또는 남북관계 발전의 방향성 유지 등에 좋은 인상을 준 것 같습니다."

남편으로 아빠로, 아들로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통일부 직원들은 정 장관이 격무 속에서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한 부인(김효선.59)을 조용히 뒷바라지하는 등 그의 '외조'를 귀감으로 삼고 있다. 정작 그는 "아내 덕분에 채식을 오래 하다 보니까 더 건강해졌다"고 부인에게 공을 돌렸다.

"집사람이 건강으로 고생한 적이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면서 식생활 습관을 바꿔완전히 채식주의자로 돌아섰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건강이 좋아졌다. 지금은 펄펄난다."

그래도 가정에서 어떤 '학점'을 받고 있느냐는 질문에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이다.

"요즘 같은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비싼 것도 잘 사주고 명품도 사줘야 하는데, 우리 시대에는 명품이 없기도 하지만 우리 애들이나 집사람이나 그런 것들을 거의 구경해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집에 와본 뒤 통일부가 원래 돈이 없는데 이긴 하지만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하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어요."

4남2녀 중 장남인 그는 중학교 때 부모 품을 떠나 전주로 갔다가 고교 때 서울로 유학을 왔다. 교육을 중시하는 가정의 장남 역할을 하다 보니까 전주에 정착하면동생들도 전주로, 서울로 올라오면 서울로 따라 올라왔다. 그의 표현대로 '전주 지사장', '서울 지사장'을 역임하면서 동생들을 엄하게 다스렸다. 그래선지 동생들에 게는 아직도 인기가 없단다.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는데도 동생들이 말을 거는 것조차 어려워한다는 것.

'지사장' 얘기로 파안대소했던 그는 부모님 얘기에 이르자 눈시울이 붉어진다.

"부모님과 오랫동안 떨어져 살다 보니까 별로 그렇게 싹싹하게 대하지 못했습니다. 아버님이 20여년 전 돌아가셨지만 혼자 계신 어머님(80)은 제가 늘 '인상이나쓰고 말도 고분고분하게 하지 않는 점을 매우 섭섭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제가가족들을 대할 때 마치 남북대화할 때 북쪽 대표에게 하는 식이어서 어머니는 제가 웃을 줄도 모르는 놈으로 알고 있을 겁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그는 1998년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 비료회담시 심각한 표정 때문에 남북 수석대표 사진이 바뀌어 북측단장으로 보도된 적도 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외신들은 누가 북측 대표인지 분간이 잘 안 된다고 얘기도 했다는 것이다.

지난 24일 통일부 장관 정례 브리핑. 정 장관은 오는 7월8일 김일성 북한 주석사망 10주기를 앞두고 방북을 신청하는 민간 또는 시민단체 인사들에 대한 대책을 묻는 질문에 단호한 어조로 '법대로' 원칙을 강조했다.

"일상적으로 진행돼 온 교류협력 차원의 방북 신청은 개별적으로 검토할 방침입니다만 조문을 위한 북한 방문은 승인할 수 없습니다. 또 방북 목적에 위배된 행동을 할 경우 남북교류협력특별법에 따라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정 장관은 "북한이 남북관계를 경색시키고 있다고 비난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렇게 된다면 북측 사람들이 현명치 못한 것"이라고 못박았다.

남쪽에서 남북협력을 끌어가고 있는 통일부나 관련 인사들이 얼마나 어려운 여건 속에서 때론 역풍을 맞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비전을 가지고 책임을 다하고 있는 데 북쪽 입맛대로만 해달라고 한다면 현명치 못하다는 것이다.

"남쪽에서 화해협력을 끌어가는 사람들이 그냥 순풍에 돛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북쪽 당국이 알아야 합니다. 또,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이런 상황에서 조금씩이라도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젊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도 한번쯤은 의미가 있는 것 아니냐는 식의 생각을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휴일에는 서울 근교의 산사를 찾아 다도를 즐기거나 강변 카페에서 차 한잔하면서 머리를 식히곤 한다는 정 장관은 채식과 아침마다 꼭 40~50분 동네 뒷동산을 산책하는 것이 건강 유지의 비결이라고 들려준다.

그는 슬하에 1남 1녀를 뒀다. 아들은 미국 퍼듀대학 전기공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고, 딸은 하버드대학에서 북-중관계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4.15 총선 이후 열린우리당내 차세대 지도자들의 입각설이 나돌면서 개각 대상에 오른 그에게 2년여 재임기간 보람과 아쉬움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보람은 지난 2000년 9월18일 시작됐다가 곧바로 중단된 북측 구간의 철도 도로공사를 재개해 오는 10월중 연결하게 된 점입니다. 통일부가 먼저 국민적 합의를 일궈내고 국회 동의를 받은 뒤 북한측에 자재와 장비를 보내는 방식으로 해서 철도도로가 연결되게 됐습니다. 철도,도로 연결 등을 계기로 비무장지대(DMZ)에 서쪽에 250미터, 동쪽엔 100미터 폭의 평화회랑이 생긴 것도 큰 보람입니다. 또 이 덕분에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사업 등이 탄력을 받게 됐지요.끊어졌던 민족의 혈맥을 이어낸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또 이달초 설악산에 서는 장성급회담이, 평양에서는 장성급회담이 열렸는데 이러한 쌍끌이 회담이 적잖은 성과를 낸 것도 이런 분위기에서 기인된 것이지요. 다만, 철도와 도로 공사가 2002년 9월18일에야 재개됐는데 좀 더 일찍 했더라면 남북관계에 더 많은 진척이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는 '향후 통일정책의 추진 방향'에 대해 "우선 군사분야의 신뢰구축 증진 등남북간 긴장 완화에 중점을 둬야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군사분야의 긴장완화와신뢰구축을 더욱 심화,발전시켜 나가야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경제사회 분야의 협력이 군사 분야 협력을 이끌어왔는데 앞으로는 서로 서로 이끌며 발전해나가는 선순환 구조가 되도록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군사적긴장완화가 현저히 감지돼야 경제사회문화 교류의 도약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최근 한 언론과 회견에서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의 심정을 밝혔던 정세현 장관.

그는 개각 얘기에 아랑곳 없이 어제도, 오늘도 묵묵히 열린포럼 현장인 이곳, 저곳으로 달려간다. '내일 장관직을 내놓더라도 통일의 씨앗을 뿌리며 물과 비료를 주겠다'는 소박한 꿈을 가진 농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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