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에 영국 `런던타임즈`에 실린 기사 <러시아, 일본, 고려의 실제 상황>이란 글을 보면, "일본은 줄곧 고려(조선)를 번속(藩屬)으로 간주해 왔으며 이는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다"고 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러시아와 주도권 쟁탈을 시작하던 때이었습니다. 이 기사는 일본이 고려 남부를 2세기부터 지배하다가 6세기에 고려인에게 축출 당했는데 그 때 사망한 일본의 왕이 실지를 회복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이 기사는 임진왜란과 청일전쟁도 이 유언의 실천 과정으로 보고 결론적으로 일본은 1600년 동안 힘써 고려를 쟁탈했는데 쉽게 남에게 내주겠냐고 하면서 일본과 러시아의 쟁탈전에서 일본이 이기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기사는 임나일본부설에서 말하는 4세기보다 2세기씩이나 더 늘려서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요.

사정이 이러한데도 우리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 전혀 배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공한 사람이나 역사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임나일본부설이라는 말조차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외국 사람을 만났을 때 그들이 이런 논리를 들이대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면 일본 학자들은 무슨 근거로 이러한 황당한 주장을 하는 것일까요?
첫째는, 그들의 역사책인 `일본서기`가 근거입니다. 그들은 임나일본부의 존재와 한반도 남부 지역 지배에 관한 내용이 `일본서기`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둘째는, 광개토대왕비입니다.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에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왜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다가 고구려에 패한 기록이 몇 군데 보이고 있는데, 이 기록이 왜군이 당시에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고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중국 남북조시대 남송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송서(宋書)`입니다. 이 책에는 왜의 무왕이 스스로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가야), 진한, 모한(마한) 등 7국의 왕임을 칭하면서 남송의 황제에게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자 남송의 황제가 그에게 백제를 제외한 6국의 왕이라는 관작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에 따라서 당시 왜왕이 일본 열도는 물론 백제, 신라, 가야까지도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일본의 이소노까미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라는 칼입니다. 1873년에 이 칼의 앞뒷면에 새겨진 글이 소개되면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칠지도의 실물로 추정되어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물로 제시되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372년에 백제의 사신이 신공황후에게 칠지도 한 자루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칼이 바로 그 실물이며 `바쳤다`는 것은 백제가 왜의 속국이었음을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칠지도(七支刀)
주는 사람이 백제의 왕세자로 되어 있고, 받는 사람이 왜왕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로 볼 때 칠지도는 백제가 친선외교의 제안으로 왜에
주었던 일종의 하사품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금까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라고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주장이 왜 터무니없는 것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첫째, 일본이 200년씩이나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면 우리 나라 기록에 조그만 실마리라도 나올 텐데 그와 비슷한 기록도 전혀 없습니다. 임나일본부설의 가장 유력한 근거로 말해지는 것이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인데, 그 책은 앞뒤가 맞지 않고 연대에도 많은 오차가 있어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욱이 `일본서기`보다 8년 전에 편찬된 `고사기(古事記)`라는 책에는 신공황후가 임나를 정벌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만약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라면 일본 역사에서는 매우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전혀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것이 `일본서기`에서 조작된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을 근거로 내세우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비문은 4세기의 일을 다루고 있는 것인데, 이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와 관련된 기사는 6세기 중엽을 다룬 내용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광개토대왕비의 비문 내용에 대한 이들의 해석이 잘못 되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들이 비문 내용을 조작하였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습니다. 광개토대왕비가 이들 주장의 근거로 제기된 것은, 만주에 밀정으로 파견되었던 한 일본군 장교가 1884년 비의 가탁본을 일본에 갖고 들어간 뒤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5년간의 비문 해독 작업 끝에 그 내용을 발표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런데 여러 탁본, 사진, 해독문을 대조해 보고, 당시의 정황들을 조사한 결과,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전후 3회에 걸쳐 비에 석회칠을 하고 비문을 가공하여 내용을 변조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비문 내용의 변조 여부는 아직 확실하게 증명되지는 않았습니다.

셋째, `송서` 역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기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왕이 주장하는 7국 중 임나와 가라는 모두 가야를 가리키는 말인데 왜 중복해서 주장을 하는지, 또 이미 망해서 사라진 진한과 모한의 왕이라고 왜 주장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들로 볼 때 남송에서 왜왕에게 수여한 관작은 명예직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송에서 왜왕이 주장한 나라 중 백제를 제외하는 것을 보면, 남송은 이미 사라진 진한과 모한이나 자신들과 외교 관계가 없는 신라와 가야의 왕이라고 왜왕이 주장을 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제와 남송은 외교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왜왕이 백제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왕이 7국의 왕이라고 주장을 했든, 남송이 왜왕을 6국의 왕이라고 인정을 해줬든, 그것이 지배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칠지도`는 백제가 왜왕에게 바쳤다기보다는, 오히려 하사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여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기에는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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