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을 며칠 앞두고 기미년 독립만세의 상징이 된 충남 천안 아우내에서 한국과 일본의 학자, 교수, 시민단체 활동가 50여명이 모여 2박 3일간 한일평화심포지엄을 열었다.
행사는 한국측 평화교육연구회와 일본측 일한평화교육연구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행사로 1997년 1회 대회 이후 5회를 맞이하고 있다. 이번 심포지엄의 주제는 “역사적 화해를 통한 평화교육”이었다.
역사적 화해? 누가 누구와 화해를 한다는 것이지? 일본하고 우리나라가?
주제어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필자가 심포지엄 참가를 저어하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심포지엄 참가를 통해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았던 자신에 대해 이내 후회하게 되었다. 어두운 과거사를 덮고 지나자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용서해 주자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화해란 한일 양국의 근현대사 인식에 대한 논의를 통해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와 편견을 조금씩 줄이면서 이해를 넓혀 가는 것을 지향한다.
물론, 이 심포지엄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아니며, 특히 일본에서 참가한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본 사람들의 성향과는 조금 다른 특이한 사람들이었음을 먼저 밝혀두고 싶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만난 일본 교사와 교수들은 자신의 과거사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있었고 역사가 바로서야 하며 앞으로의 한일관계가 평화적으로 발전되어 가야 한다는데 공감하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심포지엄에서 주된 이야기거리는 역사교과서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일본이 식민지 통치 정당화를 위해 어떠한 교육정책을 펴왔는가?, 일본에서 차별 받고 있는 재일민족학교 문제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등이었다. 심포지엄을 소개하는 글이 아니므로 내용은 생략하고 심포지엄에서 생긴 세 가지 고민을 풀어놓고 함께 나누고자 한다.
통일교육 속에서 과연 평화를 지향했는가?
첫 번째 고민은 ‘통일교육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분노를 조장하고 적개심을 키워주지 않았는가?’였다. 2년 동안 클럽활동으로 민족화해연구반을 지도해 왔다. 아이들과 첫 시간을 보낸 곳이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이었다. 현실의 통일 문제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우리민족이 분단된 현대사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사관 앞에서 3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일제에 의해 얼마나 우리 민족이 황폐화되었는지, 이후에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했다. 역사관 견학을 통해 아이들은 식민지 지배를 비로소 몸으로 느끼며 자기문제화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며 은근히 만족하곤 했다.
그러나, 견학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우리도 힘을 길러 다시는 일본이 넘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아니면, ‘일본인들은 정말 지독하게 못된 사람들이라서 구제불능이며 상종할 가치도 없다? 무시해 버려야 돼!!’
필자의 교육은 분노에 머물렀다. 증오심을 키우는데 익숙했다. 비뚤어진 애국심, 그릇된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부추긴 것은 아닌가에 대해 반성해 본다.
앞으로의 교육활동에서는 아이들이 역사를 바르게 인식함과 동시에 분노를 어떻게 평화 지향적인 자세로 승화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로 남게 되었다.
진실을 노래하는 교육은 완벽한가?
두 번째 고민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올바른 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가?’였다.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다보면 당연히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 미국의 세계지배전략, 미국의 이라크 침략 등에 대해 자연스레 얘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문제의 본질을 좀더 잘 알려줄 요량으로 TV 프로그램을 녹화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도 하고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이미지 자료를 수업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수업을 통해서는 진실과 정의를 이야기 하고자 하였다. 진실을 말하면 아이들은 나의 마음을 다 이해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필자는 아이들이 과연 진심을 받아들여주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수업에 대해 반성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대한 이야기를 수업에서 소재로 다룰 경우에 접근하는 방식은 아주 간단했다. ‘전쟁의 원인이 무엇이고,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어느 정도고, 미국이 전쟁을 통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이고, 얻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문과 방송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일목요연한 사건의 개요를 아이들이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 그것으로 수업의 목적이 달성된 것으로 흐뭇해하곤 했다.
아마 아이들은 이라크라는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했을 것이다. 좀더 나아갔다면 전쟁은 참 무서운 것이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 진전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전쟁을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야 했다. 이라크 민중의 아픔을 내 형제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렇다면,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분노하면서 동시에 평화의 소중함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세상을 흑백논리로 가르치지 않았는가?
세 번째 고민은 ‘식민지 지배를 한 일본은 무조건 나쁘고 피해자인 우리나라는 무조건 선량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서 시작되었다. 역사뿐만 아니라 어떠한 갈등을 접하면서 선 아니면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당연시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반성이다.
우리는 일본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도 그러했다. 일본은 가해자, 한국은 피해자라는 사고가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이분법은 단순하면서 위험하다.
식민지 지배 하에서 친일을 했던 행적이 분명한 지식인에 대해 일제의 폭압 속에 그 지식인의 고뇌가 얼마나 컸을 것인가 운운하며 두둔하는 사람을 본적이 있다. 일제 앞에 한국인은 모두 피해자라는 궤변이다. 한편, 일제가 그들의 침략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그 나라에 살고 있던 일본 민중들을 얼마나 가혹하게 착취했는가에 대해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일제 지배하의 조선에서도 일제에 빌붙어 부를 누리며 편안하게 산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일본에서도 지배자의 폭력에 의해 많은 민중들이 탄압을 받았음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그동안의 교육활동에서 아이들에게 이러한 관점도 있을 수 있음을 제시해 주지 못한데 대한 안타까움이 있다. 권력기관으로서의 국가와 그 속에 살고 있는 민중들을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으며, 동시에 민중의 관점에서 전쟁과 지배를 바라보며 해결점을 모색하도록 해야 옳았다는 생각이다.
글 속에서 필자가 심포지엄 기간 동안 생각했던 고민과 해법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럼 앞으로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자신이 없다. 평화지향적인 사고와 행동을 노래하고 싶지만 현실에서 얼마나 잘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장담할 수 없다.
다만, 민족과 국가, 세계를 이야기하면서 보다 더 학생을 배려하고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늘 되새기며 깨어 있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통일이라는 주제를 아이들과 나눔에 있어서도 극과 극의 상반된 입장을 합치는 무거운 의미의 통일이 아니라 양극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다양한 가치들이 있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다양한 가치들이 대립하지 않고 함께 공존해서 살수도 있음을, 혹 갈등이 있더라도 평화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는 수업 시간으로 승화시키고 싶다.


제가 글에서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평화와 통일을 이야기할 때 기본이 되어야 할 마음가짐과 그런 이야기를 보다더 사려깊게 해야 함을 말한 것인데요...
통일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모두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님께서 주장하시는 이야기가 이 시대에 보편적인 이야기에 포함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