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새해가 밝았다.
격동의 2004년에 나는 다시금 내 삶을 되돌아본다.
대학교 2학년 때 여름 농활을 전남 곡성으로 가게 되었다.
그 당시 농활은 자체 규율이 매우 엄격하여 농민들로부터 일절 대접받아서는 안되었고(주민들의 항의로 나중에는 풀렸음),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끝임없는 노동의 연속이었다. 오전에는 농사일을 배우고 오후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마을 주민들을 찾아뵙고 농촌 생활을 전해 듣거나 글을 가르쳐 드리는 경우도 있었고, 늦은 밤에 농활 일일평가회를 하다보면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아침에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보면 몸 여기저기서 벌레가 물고 간 자국이 수군데가 생기곤 하였다.
더운 여름날 산 중턱에 만들어진 손바닥 만한 계단식 논에 들어가 모를 심는데 모가 팍팍 꽂히지 못하고 물 위로 둥둥 뜨게 되면, 나이 드신 어르신께서 ‘모 심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여’하며 시범을 보여주셨는데 어찌나 손놀림이 빠른지 무척 놀라왔다. 모를 심거나 피 뽑을 때는 거머리가 달라붙어 떼어내느라 애를 쓰곤 하였다.
고추밭에 들어가 잡초 뽑을 때, 땀이 비오듯 하고 조금만 있어도 허리가 아파서 여러번 허리를 펴야했는데, 그때마다 여전히 묵묵히 일하는 농민들의 모습에 죄스러워 ‘서툴기는 하지만 정성껏 해야지’하는 마음을 다지곤 하였다. 오줌과 똥을 섞어 만든 덩어리를 손으로 잘 다듬어서 밭작물에 곱게곱게 얹기도 하였다. (어릴 적 학교 가는 길 주변은 온통 논밭이었다. 나에게 있어 논밭은 바라보는 풍경의 한 장면이었다)
그때 우리가 지내던 집에는 누군가가 가져온 여러가지 책들이 있었는데 무심결에 잡은 ‘전태일 평전’은 나에게 큰 놀라움과 감동을 주었다.
배움과 상관없이 사람이 어찌 이토록 순결하고 양심껏 살 수 있을까, 역사와 생산의 주역인 민중들이 오히려 억눌리고 있는 현실과 이 현실을 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전태일’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나는 과연 기득권을 훨훨 털어버리고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서 나의 농활 태도는 엄숙 그 자체로 바뀌었다. 이후 나는 대학을 마칠 때 까지 매년 곡성을 다녀갔다.
대학을 마치고 교사가 된지 17년째로 접어드는 지금 나는 위기감을 느낀다.
노정권의 자주성은 미국의 힘에 눌러 땅에 떨어지고 정치는 지배세력들의 정쟁으로 민중들의 가슴마다 구멍이 뚫리고 미국을 위시한 초국적 자본과 권력에 기생하는 재벌등의 지배층들의 경제소유와 운영으로 빈부격차가 날로 커지고 민중들의 경제적 삶이 점점 피폐해지는요즘 역으로 교직의 주가는 올라가고 제 집이 있는 부부교사로서의 생활은 예전에 비해 여유롭다.
통일활동을 하면서 이곳저곳의 시민사회단체에서의 교사에 대한 대접은 한 것에 비해 남다르다.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우대해주고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교사는 위험하다’며 열외를 시켜주려고 한다.
학교 현장에서의 사회 현실 교육은 학생, 일반교사들의 처지와 조건을 고려하여 여과되고 또다시 걸려져서 다가가고 있다. 이것은 ‘학교’란 조건하에서의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런 전반적인 사정들이 나의 통일활동에서 치열성을 떨어뜨리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렵고 힘겨운 투쟁은 노투사와 청년학생들에게 맡겨지고 여전히 힘겨움에 받히고 사는 민중들의 삶에서 이탈되어 편온한 생활에 안주하는 것은 아닌지, 민중들의 힘과 땀으로 이루어낸 현실 무게를 느끼지 못한 채 너무 손쉬운 통일활동, 통일교육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본다.
하여 영화 ‘박하사탕’의 마지막 장면에서 달려오는 기차 앞에 선 김영호의 ‘나 돌아갈래’하는 외침을 2004년 새해에 소리쳐 보고자 한다.
나 다시 돌아갈래, 민중 속으로!!
나의 청년시절 농활 갔을 때의 그 마음 그 자세로 다시 민중들의 삶을 느끼기 위해 떠나보고자 한다. 이 땅에 사는 이들의 진정한 평온과 위안은 아늑한 공간에서 듣는 품위있는 음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저 멀리 해외여행’에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이 땅을 가꾸고 키워온 민중의 품으로 갈 때 진정으로 찾아지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올해 두서너 가지 계획을 세워본다.
첫째 올 여름 때 민주노총 통일선봉대에 참가하고자 한다. 며칠이 될지 모르겠지만 서울에서 지원하는 선생님들과 함께 통일선봉대에 나가서 강열한 태양을 맞으며 여러 사업장을 방문하거나 투쟁의 현장에 서보고자 한다.
둘째 지회에서 주최하는 농활에 학생들과 함께 참가해 보고자 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땅의 의미를 느껴보고자 한다.
셋째 겨울에는 농수산물시장에서 공장등에서 1주일간 허드렛일을 해보고자 한다.
하여 내 마음과 몸에 휘감겨 올라오는 편안과 개인성을 넘어 민중의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