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창(서울 잠실고등학교 교사)


12월 31일까지 통일 뉴스 ‘교사의 통일 이야기’ 원고를 제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서도 시간이 많이 있다는 생각으로 아예 원고 쓰는 일을 접어두고 있었다. 원고 마감 날짜가 가까워 올수록 무슨 약속이 그렇게 많았던지. 결국 원고 제출 마지막 날짜, 2003년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전 날 새벽까지 가까운 후배들과 새벽까지 술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기는 했지만 집을 일찍 떠나야 하는 일이 있었다.

어느 종교 단체에서 주관하는 연수프로그램을 오래 전해 신청해 놓은 터였다. 그것도 거금 20만원을 내고 참가 신청을 접수했기에 돈이 아까워서라도 불참할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연수 기관이라 서둘러 집을 출발했다. 비록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컴퓨터가 있는 곳이기에 그곳 연수 기관에 양해를 구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 곳에 가서 원고를 보내면 가까스로 마감날짜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무엇에 대해서 쓸 것인가를 구상한 글의 얼개를 담은 디스켓도 빼놓지 않고 챙겼다.

그러나 대단한 착각이었다. 종교 단체에서 주관하는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장소에 도착 한 시간도 예상을 빗나갔고 참가서 작성을 마치면서 모든 짐을 자발적으로 압수(?) 당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 불필요한 물건은 연수가 끝날 때까지 짐이 될 것이라는 안내자의 설득에 갖고 간 많은 짐(시계, 디스켓, 핸드폰, 메모지 등)을 고스란히 안내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원고 마감날짜를 꼭 지켜 달라는 친절하게 알려준 분의 실망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이 겹쳐 나타났다. 이미 연수기관에 모든 것을 저당 잡힌 나는 연수를 마칠 때까지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일은 뒤틀어졌다. 원고 날짜를 지키지 못한 이유였다. 미안할 뿐이었다.

연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간도 모르고 강행되는 ‘나를 찾는 여행’은 잠까지 못 자게 하는(물론 졸기는 했다.) 고문까지 당하면서 계속되었다. 시간에 대한 개념을 잊어, 해가 있는 방향을 통해서 대략 시간을 짐작했을 뿐이었고, 날이 밝고 어두워지는가를 통해서 낮과 밤이 구분되었을 뿐이다.

연수 둘째 날 밤이었다. 연수를 담당하는 진행자가 단어를 제시하면 참가자들이 연상되는 단어를 돌아가면서 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었다. 진행자를 포함해서 20명이 방안에 둥그렇게 앉아 있었다. 두 세 개의 단어를 하고 났을 때는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진행자는 ‘뱀’을 제시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징그럽다.’, ‘교활하다.’,‘사악하다.’라는 등의 말이 나왔다. 진행자는 잠시 진행을 멈추고 명상 시간을 위해 눈을 감게 했다.

프로그램 진행 시작 전과 중간에 그리고 끝났을 때는 명상을 했기에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다. 진행자는 눈앞에 뱀이 있다는 것을 상상해보라고 하면서 뱀이 정말로 징그러운가를 생각해 보라고 했다. 10m 앞에 있는 뱀이 바로 5m 앞쪽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똑바로 보라고 했다. 징그러운가를 보라고 했다. 숨소리 들리지 않는 속에서 진행자가 다음 과정을 진행하기 위해 준비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사람들은 각자 상상과 생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눈을 뜨라고 했다.

눈을 뜨는 순간 참으로 놀랄 일이 눈앞에 벌어졌다. 참석한 여성분들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둥그렇게 앉아 있는 참석자 한 가운데 1m가 넘는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장난감 뱀인가 싶었다. 그러나 장난감 뱀치고는 너무나 정교했다. 조금 있더니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진짜 뱀이었다. 참가자들은 또 한 번 놀랐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자기 몸의 몇 백 배되는 덩치 큰 사람들 한 가운데 있는 뱀은 위축되었는지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간간이 고개를 들고 두리 번 두리 번 거릴 뿐이었다.

안내자는 뱀을 잘 보라고 했다. 징그러운가, 소름끼치는가, 사악한가를 잘 보라고 했다. 여성 참가들은 뱀과 마주 대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고 눈을 감기도 했고 돌아 않기도 했다. 뱀은 훈련을 받기나 한 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안내자는 돌아 앉아 있는 여성 참가자 중 한 명을 불러 세웠다. 소리치며 울부짖는 여성 참가자를 뱀 쪽을 향해 세발짝 앞으로 다가 서도록 했다. 앞쪽으로 향하고 있는 여성 발자국은 최대한 보폭을 좁게 했다.

또 다시 세 발자국 앞을 향하도록 했다. 앞을 향하던 여성 참가자는 뒤로 자빠듯이 도망갔다. 안내자는 뱀만큼이나 냉정하게 참가자를 몰아쳤다. 뱀이 도망가라고 했는가를 물었다. 참석 여성자는 무섭다고 했고 소름끼친다고 했다. 안내자는 뱀이 무섭게 했고, 소름끼치게 했는가를 다시 물었다. 결국 안내자의 지시에 따라 여성 참가자는 다시 뱀 앞 쪽으로 나가야 했고 뱀을 마주 보아야 했다.

여성 참가자의 온몸이 떨렸다. 그런 여성 참가자에게 안내자는 이번에는 뱀을 잡아보라고 했다. 무서운 것은 여성 참가자만이 아니었다. 지켜보고 있는 다른 참가자 모두 긴장했고 안내자가 자신을 지목하지 않은 것에 다행스러워 했다. 나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까지도 뱀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응시하고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여성 참가자가 가까이 오자 뱀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뱀의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여성 참가자들은 소리를 쳤다. 안내자는 다시 모두에게 뱀이 참가자들을 무섭게하고 있는가를 물었다. 그렇게 진행되는 가운데 첫 번째 여성은 뒤로 물러 앉게 되었다. 다음 사람에게 순서가 돌아갔다. 상황을 피할 수 없게된 여성 한 분은 사시나무 떨 듯 하면서 뱀을 만졌다. 사람 손이 닿는 것이 싫은 듯 뱀은 몸을 뒤틀었다. 안내자는 다시 뱀을 두 손으로 잡게 했다. 뱀을 똑바로 쳐다보라고 했다. 뱀의 눈과 날름거리는 혀를 자세히 보라고 했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정신을 차린 참가자는 뱀의 앞부분을 잡고 뱀의 머리를 마주 대했다. 나중에는 뱀의 숨쉬는 것을 느끼기 위해 뱀을 목에 둘러야 했고, 뱀을 괴롭힌 것에 대해 사과하는 뜻으로 입맞춤까지 하고서 다음 사람에게 넘겼다. 그렇게 해서 참가자 모두는 뱀과 마주대해야 했다.

‘징그럽다.’, ‘교활하다.’,‘사악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입관이었고 편견이었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이미 그렇게 인식되었을 뿐, 뱀은 징그럽지도 않았고, 소름끼치는 것도 아니었으며 동그란 눈은 다른 애완 동물처럼 순수하고 맑았다.

그렇다. 통일 운동에 대한 출발점은 아직도 왜곡된 생각을 사실(진실)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교정하는가에 있다. 우리들 마음속에 담겨 있는 적대 의식을 지우지 못하고는 통일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북한 동포들이 당하고 있는 아픔이 있다면, 그 상처를 보듬어 주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역사와 민족에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북녘에 있는 제자들에게 교육 기자재 보내기 운동을 위해 많은 동료 교사들을 만났다. 흔쾌하게 동참하리라고 생각했던 젊은 선생님조차 주저했다. 한 번 말을 건네고 잊을만 하면 다시 또 에둘러서 이야기 했다. 나중에는 눈빛 마주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했다. 내가 못생겨서였을까? 그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미남은 아닐지라도 남에게 역겨울 정도의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에 대한 부담보다 아직도 많은 선생님들에게 북한은 부담스러운 것이다. 교사가 북한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어찌 학생들에게 북한에 대한 올바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바람직한 통일에 관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통일 운동에 시작은 바로 내 옆자리에 계신 동료 교사에게 북한을 바로 이해시키는 일이다. 통일 일꾼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북한에 대한 왜곡해서 인식하고 있는 동료교사들을 어떻게 만나야할까?를 좀더 고민하며 보낸 2003년이었다. 새해에는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는 결심으로 글을 마친다.

사족, 뱀은 결코 징그럽지 않았다. 뱀은 사람을 무서워 피할 뿐이다. 만약 피하지 않고 대들고 있다면 그것은 독사이다. 독사, 조심해야 할 것이다. 혹시 내가 독사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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