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헌 (양심수후원회 회장)


조국통일 염원을 안고 모진 삶을 살아오셨던 또 한 분의 송환 비전향장기수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 슬픈 소식은 이북의 조선중앙통신 부고를 통해 남녘에 알려졌습니다.
`남조선 감옥에서 당한 모진 고문에 의해 전신 다장기부전으로 주체92(2003)년 11월1일 1시30분 87살을 일기로 애석하게 서거하였다`고 남쪽통신들이 인용 보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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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우시면서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하셨던 선생님! 움직일 수 있는 한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셨고 결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철칙을 실천해 오셨던 선생님께서도 오랜 옥고의 후유증과 쌓인 연륜을 이기지는 못하셨습니다.

조국통일에 대한 평생의 염원. 어찌 잊고 홀연히 가셨는지 슬픈 마음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염원 가운데는 꿈에도 잊을 수 없었던 사무치게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 오랜 감옥을 사시면서 모진 고난을 겪으셨지만 한결같이 신념과 양심을 지켜오셨기에 선생님께서는 2000년 9월 2일 마침내 신념의 고향으로 가실 수 있었습니다.

남녘의 많은 사람들은 선생님의 높은 덕목과 인자하신 모습,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한 인간적 정으로 차마 보내드릴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었지만 분단의 아픈 상처를 아우르는데 꼭 가셔야할 길이었기에 아쉬움 삭이며 다시 만날 일을 약속하고 환송해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리게 되었던지 비전향장기수 송환 40여일만에 평양에서 선생님을 다시 뵈올 수 있었습니다. <조선로동당 창건 55돐 경축>에 참관자로 초청받았을 때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남녘에 계시는 동안 한때 오랜 옥고와 중풍후유증으로 평형감각이 없어서 바로 서 계실 수 없었고 시력도 좋지 않았으며 두통과 어지럼등으로 고통을 당하시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 당시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가족들을 모두 만나시어 세상 부러움없이 살고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 8.15민족통일대축전때 3대헌장기념탑 앞에서의 개막식에도 오시어 혼자 걸으실 수 있고 눈 수술도 받았으며 시를 쓰면서 보람있는 삶을 누린다고 말씀하시더니 그것이 선생님을 뵈온 마지막이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은 1916년 8월 2일 경북 김천시 남면 월명리에서 태어나시어 김천고등보통학교를 나오셨고 곧바로 금융조합 서기시험에 합격하시어 3년간 직장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감으로 중국 동북지방으로 가셨고 `흥농합작사`에서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조국광복을 맞아 1945년 함경북도 청진으로 나오셨고 곧바로 제철기계공업사의 경리과장을 맡으셨습니다.

그 뒤 나남.청진 소비조합에서 일하시면서 성실성과 책임성이 인정되어 함경북도 소비조합 기획부장으로 일하셨습니다. 전쟁시기에도 선생님은 평양으로 오시어 조선소비조합 중앙위원회 기획부장에 오를 정도로 선생님의 소비조합에 대한 전문성과 책임성은 완벽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국분단을 언제까지 못본 체 할 수는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957년 조국통일사업을 위해 남녘 고향으로 내려오셨고 대구지방을 중심으로 평화통일운동을 하시다가 1961년 5월 25일 체포되어 군사정권의 고등군법회의에서 국가보안법등 위반혐의로 사형언도를 받았고 이어 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 확정을 받았습니다.

그 뒤 선생님께서는 대구, 서울, 목포, 대구, 대전형무소(교도소)등으로 옮겨 갇혀 사셨고 특히 1973년부터 강화된 사상전향공작 때는 모진 고문으로 삶과 죽음의 가름길을 걷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조국통일에 대한 염원과 정치적 신념은 어떠한 고문으로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1991년 5월 25일 마침내 선생님은 비전향장기수로는 (사회안전법으로 감호처분에서 풀려난 비전향장기수는 예외로) 처음으로 노약자.병약자라는 이름으로 허영철 선생님과 함께 출소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처음에 갈 곳이 없어 여관등에 계셨지만 비전향장기수를 감시하던 공안당국은 안정적 감시와 통제를 위해 꽃동네로 보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차라리 감옥에 다시 들어가겠다며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때 김형준 목사님의 주선으로 덕유산 자락 소망양로원으로 가시게 되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양로원측과 군청에서 어떻게 `비전향빨갱이`를 자기 소관에 둘 수 있느냐는 이유였습니다.

그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이화여대후원팀`에서는 선생님과 자매결연을 맺고 자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양로원측에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알리고 결코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전하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그 뒤 선생님은 폐렴이 심해져 대구 가톨릭병원에 입원하셨고 대구.경북양심수후원회 한기명, 최찬, 박창숙님을 비롯한 여러분의 정성어린 간병을 받기도 했습니다. 퇴원하여 다시 소망양로원으로 가실 수 밖에 없었으나 박창숙 회원이 선선히 방을 하나 내어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뒤 1999년 3월 31일 비전향장기수 17명이 석방되면서 대구.경북양심수후원회에서는 `민들레집`을 마련했고 교도소에서부터 남다르게 선생님을 돌보아 주셨던 김창원(2000.9.2송환)선생님이 선생님과 함께 사시면서 정성으로 도와드리고 계셨습니다.

五葉松邊老鍾坐
六月炎天淸風來
林間鶯聲活氣新
僻居千里遠慕友

김종호 선생님이 소망양로원에 계실 때 필자에게 보내준 한시(漢詩)였습니다.

`짙은 솔밭 그늘아래 늙은 몸 앉아있네. 한여름 불볕더위에서도 바람 시원히 불어오고 울창한 숲속 어딘가에서 꾀꼬리 소리 요란한데 외롭게 혼자있자니 멀리 동지들이 그리워지네`

어찌 그러하지 않았겠습니까. 차라리 감옥에서 동지들과 함께하던 시간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양로원에서 좀 떨어진 솔밭 그늘을 자주 찾으셨습니다. 한번 찾아뵙고 떠나올려면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시던 모습. 구름 몇 점이 떠가고 있는 먼하늘을 바라보시면서 동지들을 그리워하셨고 더 멀리 북녘 하늘을 보시면서 두고오신 부인 김경옥님과 아드님 김학수님을 그리고 계셨을 그 모습들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리고 있습니다.

마침내 선생님의 한가지 소망은 이루어져 신념의 고향으로 가셨고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러나 끝내 평생의 염원, 통일조국 그날을 보시지 못한 채 숨을 거두시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의 더 큰 소망은 이제 남은 사람들이 반드시 이루어낼 것입니다.

이제 마음 편안히 고이 잠드시길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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