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창(서울 잠실고등학교 교사)
 

1968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절규하며 죽은 이승복 어린이를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신문기사가 왜곡 보도(또는 오보라는 말도 있음)라는 말도 있었지만(아직도 진실은 가려지지 않고 있다), 그 당시 중학교를 다녔던 학생으로서 그 일을 접했을 때 나도 그렇게 용감하게 죽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승복 어린이의 반공에 대한 투철한 의식이 참 갸륵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공산 괴뢰 집단에 대한 분노에 치를 떨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랬다. 반공이 국시라고 떠들어대던 시절에 `반공은 국시가 아니다`라고, 면책 특권이 부여된 국회의원이 주제(?) 넘는 발언을 했다가 국회에서 쫓겨나던 때도 있었다. 반공 교육에 충실하게 세례 받고 자란 세대들은 북괴(그 당시는 공식적인 용어가 북한 괴뢰 집단을 줄여 `북괴(北傀)`라고 칭했다)의 끊임없는 침략에 대해 늘 불안해했고 잊어질만하면 간첩을 체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국가 시험에는 빼놓지 않고 북괴(?)의 4대 군사 노선을 외워야 했고, 당시 정권은 늘 자주 국방과 국가 안보를 외쳤다. 국가 안보와 자주 국방을 위해 자신의 의지나 의사와 관계없이 인간의 기본권조차 국가에 저당 잡혀야 했다. 일부 교과서는 정권을 홍보하고 선전하는 도구였고 정권의 지침서였을 뿐 인간의 보편적 가치인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금기가 되었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교과서 밖의 이야기를 해 주는 선생님도 없었다.
 
그런데 반공만이 살길이라고 외쳤던 사람은 반공을 못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심복으로부터 총격을 받고 죽었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을 때, 그의 죽음에 대한 애석함보다 앞선 것은 전쟁에 대한 공포였다. 언제든지 호시탐탐 남침만을 노린다는 북괴(?)의 침략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독재자의 죽음이 불러온 것은 전쟁이 아니라 민주화에 대한 새로운 기대와 희망이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또 다른 군부 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1981년의 일이다.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우연히 교사가 되었다. 학교는 암울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의 학교와 다른 것은 없었다. 10년 전의 어느 선생님이 나를 가르쳤을 때의 그 교사로 학생들을 만나고 있었다. 군부 독재 정권 시절에 교무실은 정권 안보를 위해 나는 하수인이 되고 있었다. 당시 정권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었던 재야 인사 김대중씨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고 결국 그는 용공인사였다는 사실을 아무런 비판 없이 묵묵히 듣고 있어야만 했고, 교육하는 시대였다.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의 보편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4.19를 말하기 위해서는 학교를 떠날 각오가 되어있을 때만이 가능했다. 교실을 순회하는 교장, 교감 선생님의 발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떨렸고, 교장 교감 선생님 귀에 `민주`라는 말이 들리지 않았기를 바랬다. 이랬으니 `통일`을 말한다는 것은 스스로 `빨갱이` 임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한에서 `빨갱이`는 함께 할 수 없는 대단히 이질적이 존재였다. 헌법에는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했지만 그것은 가슴속에만 담고 있어야 할 자유일 뿐이었다.
 
며칠 전 매주 토요일 KBS에서 진행하는 심야토론을 시청했다.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북한에 대해 곱지 않은 시각을 갖고 있는 집단들이 벌인 치기 어린 해프닝 사건을 주제로 토론이 있었다. 패널로 참가한 사람들은 입장 차가 너무도 분명한 두 세력이 각기 세 명 씩 참석하였다. 참석한 사람들의 면면만을 볼 때 충분히 흥미를 줄만한 인사들이었다. 특히 보수 세력을 자처하는 사람 중에는 극우 세력의 첨병임을 자처하고 있는 야당의 김 모 의원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눈길을 끈 것은 보수 세력으로 나와 있는 인사 중에 인터넷 신문 "독립신문" 대표로 나온 신 모씨였다. 화면에 비친 얼굴로 보아 그리 나이가 든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앳된 얼굴로 30대 전후의 젊은이처럼 보였다.(실제 나이는 모르겠다.) 첫인상이 무척 호감이 가는 청년이 왜 그 자리에 앉아 있을까 궁금하였다. 민주 항쟁의 시대를 직접 경험했고, 시대 정신이 무엇인가를 명쾌하게 인식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젊은이의 말에서 수구세력과 같은 발언을 들으면서 경악했다.

젊은이들 가운데서도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다. 물론 젊은이들 가운데 그런 생각을 갖지 말라고 말하는 것 또한 억지일 수도 있다. 세상이 그만큼 자유롭게 바뀐 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대목이다. 그런 젊은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은 초, 중, 고 시절을 어떻게 교육받았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들을 가르친 교사는 통일에 대해, 민족에 대해 어떻게 교육을 했기에 그와 같은 학생들로 바뀌었을까? 참으로 순진한 생각을 해 본다. 그렇다면 나는?
 
고백하건대 나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교사였을지는 몰라도 행동하는 민주 교사는 아니었다. 더구나 우리 교육에 내재하고 있는 문제를 운동의 방식으로 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지만 아직도 운동의 실천가는 못되고 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열심히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생각되고 별로 소용되지 않는 지식을 충실히 전달하는데도 쩔쩔매고 있다. 민족의 문제, 분단 극복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온몸으로 감싸안고 세상을 살아가는 `동지`들께 늘 빚지는 심정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참 미안하다.
 
그렇다. 반통일 세력은 민족과 통일의 문제를 외면하는 세력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 속으로만 막연한 통일을 생각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바로 반통일 세력이 아닐까 하고 되돌아본다. 통일은 바로 우리들 마음 속 신념에서 싹트지만, 말하지 않고서는 결코 통일은 가까이 있지 않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 민족의 평화 통일을 왜 우리는 원하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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