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임진강으로 간다. 마침 우리의 통일 기행길에 남북정상회담과 연관된 주제와 만날 수 있게 되어 더욱 의미 깊다.

96년 연천과 파주 임진강수계의 모든 마을들이 역사이래 최대의 홍수피해를 받게 되었다. 발전을 위해 건설된 연천댐이 붕괴되면서 그 피해는 더 컸다. 더군다나 99년 다시 홍수로 연천댐이 붕괴위기까지 가자 근본적이고 대대적인 임진강치수대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북쪽지역의 임진강수계에 대한 조사작업이 불가능 한 것이다. 이 때문에 북쪽 지역은 연천군 군남에 설치된 수위자료를 기초자료로 삼아 통계를 내게 된다. 이것이 완전한 자료일리 없다.

이러한 이유로 남북정상회담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고 또 합의되었다. 분단으로 인한 자연재해를 막으려는 데서 자연스럽게 접근된 임진강 공동치수사업에 대한 합의는 정치군사적 문제에만 묶여 있던 통일문제를 훨씬 더 평화롭게 풀어갈 수 있는 고리를 만들어주었다.

치수하면 예로부터 통치자의 중요한 능력중에 하나로 생각되어 왔다.

중국의 사서인 서경의 홍범洪範에 보면 무왕이 기자를 찾아가 통치의 도리를 구하는 대목에서  우왕의 고사가 나온다.

箕子 乃言曰 我聞 在昔 洪水 汨陳其五行 帝乃震怒 不 洪範九疇  倫攸 則 死 禹乃嗣興 天乃錫禹洪範九疇  倫攸 
기자가 말하길 내가 듣건대 옛날에 곤(우왕의 아버지)이 홍수를 막는데 오행이 질서를 뒤섞어 황제가 이에 진노하여 홍범구주(나라를 다스리는 큰 규범으로 9가지 목록)를 주지 아니하시니 이는 떳떳한 윤리의 패한 바이다 곤이 처형되었거늘 우가 (치수업무에)등용되어 아버지의 대를 이었는데 황제가 우에게 홍범구주를 내리시니 이는 떳떳한 윤리가 펼쳐지는 바이다.

치수를 잘하여 왕이 된 우왕의 아버지 곤은 치수를 관장하는 지금의 한강관리사업소장 같은 일을 하였다. 곤은 강의 홍수를 막기 위해 댐을 쌓았는데 댐이 무너져 홍수피해가 더 심하였다. 물은 흐르는 것이 속성인데 물의 흐름을 막음으로서 오행의 이치를 거슬렀다는 것이 당시의 판단이었다. 이로서 곤은 귀향에 보내지는 처벌을 받는다.

우는 아버지의 불운한 과거사에도 불구하고 아비의 운명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다시 치수직에 나아가 아비의 오류를 극복하고 치수책에 성공하니 하늘이 그에게 나라를 통치할 홍범구주(너른 규범과 아홉 가지 항목)를 내리었다는 것이다. 물의 흐름을 역행했을 때 더 큰 피해가 난다는 고사가 일찍이 치수를 생명으로 했던 농경문화의 초기부터 있어온 진리인 셈이다.

연천댐의 경우도 이런 비판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말았다. 임진강 치수의 문제가 연천댐 문제 하나인 것처럼 비춰졌다.

치수중에서도 댐붕괴에 따른 피해 연구는 그 역사가 깊지 않다. 댐붕괴에 관한 연구로는 Ritter(1982), Dressler(1952), Whitham(1955), Su(1970)등에 의하여 급격한 붕괴로부터 발생하는 홍수파에 관한 연구가 있었고, 미육군 공병단의 WES(Water experiment station1960-1961)에서는 수리모형을 이용한 댐붕괴에 관한 실험을 실시하였다. 댐붕괴가 전쟁수단이 될 수 있음을 이미 연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74년 Price는 WES의 실험결과는대규모 중력댐에는 적합하고 흙댐(예를들면 소양강댐)붕괴에 대해서는 적용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하였다. 이외에도 토사이동과 붕괴형상개념을 도입한다든가, 붕괴를 일으킨 주요원인이 유출량과 하류의 수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그 예민도가 연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꾸준히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들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연천댐 파괴로 인해 발생한 홍수파가 하류에 미친 영향등을 분석한 결과 일반적인 여론과는 달리 홍수피해의 주원인은 이상강우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되었고 댐의 유실로 인한 임진강 중하류의 홍수위에 미친 영향은 미약한 것으로 나타났다.(경기대학원 이창수논문) 또한 토목학회의 연구 결과 댐 때문에 높아진 강물 수위는 3㎝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따라서 제방만 보완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99년에도 연천댐의 제방 일부가 유실돼 엄청난 수재를 야기함으로써 설득력을 잃게 됐다. 댐만의 문제가 아니라 종합적인 호우대책과 치수대책이 얘기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강의 치수조건 때문이었다. 임진강은 함경남도 덕원에서 발원해 전곡 부근에서 한탄강과 합쳐 서해로 흘러든다. 길이 약 254㎞에 유역면적 8118㎢로서 우리나라에서 일곱번째로 긴 강이다. 유역 면적은 한강의 3분의 1이나 된다.

임진강은 국토분단에 따라 상류와 하류의 관리주체가 다르고 강의 흐름이 휴전선과 일치하는 곳이 많아 강 양안에 많은 병력이 밀집한 군사적 긴장지역이다. 게다가 유역면적의 약 63%가 군사분계선 이북에 위치해 임진강 수계에 대한 종합적인 홍수방지 체계는 남북간의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정부는 2003년까지 225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임진강변 176㎞에 걸쳐 둑을 쌓고 하상을 정비하는 임진강유역 종합치수 사업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임진강 수계의 일부분에 불과한 것으로 근본적인 홍수방지 대책이 될 수 없었다.

상류와 중류지역의 홍수방지 체계 없이 하류지역의 홍수피해 방지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임진강 유역의 3분의 2인 5천1백㎢는 북한 지역으로 홍수조절용 댐은커녕 수위측정 시설조차 갖추고 있지 않아 정확한 강우정보 수집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더구나 경기도재해대책본부에 들어오는 경기북부 하천수위는 고작 7-8개다. 홍수 때 얼마나 많은 물이 언제쯤 내려올 것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하천정비를 하니 제대로 수해를 막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경기도하천관리위원회 위원인 한태진 한경대 교수는 "하천조사를 통한 과학적 대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실효성이 의문인 임진강댐보다는 중규모의 사방댐을 건설해 토사와 자갈 유입을 막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또 애초 유수지였던 파주시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주민이주 등의 대책도 강구돼야 한다고 말했다.

임진강댐은 남북정상합의 이전부터 제기된 문제이나 이 또한 논란이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저수용량 2억t은 1천㎢ 넓이의 저수지에 2백㎜의 비가 내리는 정도의 양이면 99년 폭우처럼 8백㎜가 넘는 비가 쏟아질 경우 댐으로서의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남북이 공동으로 임진강 치수사업을 하기로 한 것은 정치군사적 문제로 접근불가능 했던 분단의 현실에 돌파구를 마련한 일이었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6.15선언의 실천이 교착되면서 다시 여름 홍수기를 맞이해야 하는 실정이다. 비정치군사적 해법으로 접근한 문제들이 다시 정치군사문제에 걸려 넘어지고 만 꼴이다.
우리에게 치수의 문제는 치국의 문제이며 통일의 문제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임진강문제를 남북이 풀어가는데 어떤 접근이 필요할까?
강의 한자를 풀이해보면 水+工(公)인데 이는 많은 물이 합쳐져 공공의 광장처럼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강이 물과 다른 점이 이것이다. 물은 자연적 개념이지만 강은 자연과 역사와 문명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자연은 사람이 생활하는 조건이며, 역사는 사람이 생활하는 과정이며, 문명은 생활의 결과이다.

임진강의 유구함을 보여주는 첫 사례가 구석기유적이다.
김원룡박사팀을 시작으로 유적지 발굴이 시작되자 한반도의 구석기 유물은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발굴되었다. 현재까지 20여 군데의 발견 중에서 15개 이상이 한탄강과 임진강에 집중되어 있다.

연천에만도 장남면 원당리, 군남면 삼거리, 선곡리, 남계리, 왕징면 강서리, 중면 삼곶리등에서 발견이 되었으니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한 두군데를 염두에 두면 15군데 중 그 반 정도를 연천이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이 강줄기를 구석기문화벨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삼국시대에는 왕건이 궁예의 부하로 있으면서 철원과 집이 있는 개성을 오가던 길이 바로 임진강을 따라가고 있어 해양세력이 육지로부터 뻗어나가던 문명권을 형성하게 된다. 고려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임진강은 려말선초 고려에 대한 충절과 배신으로 명멸해 가는 한 시대를 지켜보며 흐른 강이 되었다.

후에 화석정이 세워진 길재의 유지遺址가 그렇고, 전곡에 학소정을 짓고 충절을 다한 김양남이 그렇고, 그와 함께 은거했던 조견, 남을진, 원천석이 그러하며, 이방언의 친구였던 인연으로 여러번 등용요청이 있었으나 끝까지 나아가지 않고 충절을 지킨 원 훈과, 역시 이방언의 친구로 태종이 그 충절에 감복하여 이화정까지 지어주었으나 물리치고 숲속에 초가를 짓고 살다간 이양소가 그렇고, 정몽주의 권유로 지신사가 되었던 신 호가 그렇다.

그에 비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도운 심덕부와, 조선조에 들어 첨지문화부사직을 받은 임 구,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으로 좌부승지까지 이른 홍길민과 그 아들 홍여방, 조선의 고려동화정책의 하나였던 숭의전이 출처대절(出處大節)의 명암을 달리하며 임진강물에 비춰지게 된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역시 임진강은 역사와 문명의 중심이 되었다.
이율곡 선생, 대학자 성우계 선생 등 혁혁한 인물 100여명을 배출한 기호학파의 발상지이다. 동인이었던 영남학파의 물적 토대가 토지였다면 서인이었던 기호학파의 물적토대는 여기에 상업자본이 더해지니 그 무대가 임진강이었다. 영남사림이 걸어서 움직였다면 기호사림은 배를 타고 움직였다. 또 영남이 고립된 공간이었다면, 기호는 소통공간이었다.

이 모든 자연지리적 차이가 서인과 동인의 사상과 닮은꼴로 저변에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퇴계가 원칙적이었다면 이이는 창조적이었다. 이러한 창조의 자신감은 조선성리학의 출현과 무관하지 않으니 임진강은 조선색의 문화를 만든 중요한 동선이 되었다.

게다가 노론에 맞서 실학을 일으킨 근기남인학파의 영수인 허목의 근거지가 또한 임진강이다. 허목은 남명-정인홍의 북인계열이었으나 북인의 실각과 함께 이황-정구의 남인으로 흡수되어 근기남인학파의 영수가 된다. 허목은 효종에게 북벌정책에 신중할 것과 둔전의 폐단을 상소하였다.

이러한 개혁정신은 근기남인파의 실학으로 이어졌으니 정치체제에 있어서 요순시대의 삼대지치三代之治의 고대 민본주의를 이상으로 하고 토지제도에서 삼대의 정전제를 기본으로 개혁론을 주장하게 된 뿌리에는 임진강의 민중과 함께 한 처사로서의 생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뒤를 이어 이익과 정약용의 실학사상이 뿌리내린다.

임진강은 천연절벽이 많고 지금의 3번 국도는 삼국시대부터 남하하는 세력이나 북상하는 세력 모두에게 군사적 요충지여서 특히 연천에는 산성이 발달되어 있었다. 이러한 지형상의 특징은 한국전쟁에도 그대로 적용되었고 앞으로 군사적 충돌이 있다고 가정할 때도 여전히 중요한 거점이어서 옛 성터는 그대로 군사기지가 들어서 있다.

과도한 명분에 치우친 북벌을 반대하고 둔전을 폐지하여 민중들의 현실적 생활을 돌보고자 했던 허목의 정신이나, 정치군사적인 문제를 완화하고 남북간의 자주적인 교류를 실현하여 군축과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이루려는 6.15선언의 정신이나, 면면히 임진강의 정신이다.
치수계획만으로 번번히 분단현실의 난관에 부딪쳐 왔던 임진강 장기계획은 통일의 강으로 되게 하기 위한 치강계획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남북이 6.15선언을 실현하고 임진강의 장기적인 계획을 마련하는데 현실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은 부시정권 출범과 함께 경색된 남북관계가 다시 풀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역시 직접적인 문제는 임진강의 비무장지대구간에 대한 미국의 관할권문제이다. 비무장지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하천들은 그 폭이 작아 육지의 연장으로 봐도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한강하구수역의 경우와 같이 강폭이 넓어지고 관리가 어려워질 경우, 즉 단순한 육지의  연결로 보기 힘들어질 경우 이 구간에 대한 정전협정상의 변경내지는 혁신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더구나 현재와 같이 정전협정이 거의 폐기되다시피 한 상태에서는 전향적인 접근이 필요해질 것이다.

경의선 건설에서는 비무장지대의 관할권 대신 관리권을 남측에 이양하는 것으로 큰 벽은 넘었는데 임진강공동사업이 추진될 경우 경의선과 같이 관리권이라도 이양 받아야 할 것이다.

또한 홍수피해와 더불어 항상 문제가 되는 대인지뢰의 유실문제가 있다. 남측 군대에 의해 매설된 지뢰는 그나마 제거작업이 가능하나 미군들에 의해 매설되거나 살포된 지뢰는 SOFA규정에 따라 아무런 제거나 통보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비무장지대의 인접지역에 밀집되어 있는 미확인 지뢰지대로부터 홍수와 함께 대량의 토사가 유실되면 대인지뢰는 서울에서 구미까지의 직선거리에 해당하는 130km까지 유실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강이 어차피 가장 군사적 긴장이 밀집된 수계임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데 대인지뢰와 같이 통제되지 않는 전쟁의 잔재에 의해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일은 이러한 군사적문제를 풀어가는 단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만약 홍수를 예방할 수 있는 다목적 댐이 필요하다면 북한지역에 침수피해를 주지 않는 댐 건설지역을 고르기 위한 남북한 협상도 난제로 남아 있다.

한편 임진강은 지형적으로 지천의 폭이 좁아 한꺼번에 물이 모이면 쉽게 범람하는 입지선정의 취약성을 갖고 있다. 더구나 임진강 하구언의 만조시기가 비를 내리는 시점과 겹치면 강물이 임진강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역류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댐을 건설하려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협곡이 있어야 한다. 많은 양의 물을 좁은 면적에 담을 수 있고 물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진강 본류는 대부분 평지로 이뤄져 있어 대량으로 물을 담을 수 있는 효과적인 공간확보가 어렵게 돼 있다.

이런 난점들 때문에 임진강은 남이나 북 어느 한쪽의 힘만으로 해결 될 수 없는 아주 까다로운 대상이다. 마치 남북이 함께 할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손도 대지 말라고 임진강은 능청맞게 오늘도 철잭선을 희롱하며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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