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민·공산 양당의 합동 추진

조선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의 합당 문제는 이미 1946년 6월 28일의 신민당 제1차 대표대회가 개최되기 이전부터 물밑에서 깊숙히 논의되고 있었지만, 그것이 수면 위에서 공개적으로 거론된 것은 7월이었습니다. 오랜 물밑 논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7월 22일까지 양당 지도부는 합당을 결정했고, 이를 신민당이 먼저 제안하는 방식으로 추진하게 됩니다.

7월 23일 조선신민당은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를 열고 `신민당과 공산당의 현단계 과업과 목적이 합치된다`면서 양당의 합동을 공산당에 제안하기로 결정하고, 결정에 따라 신민당의 김두봉 위원장은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일성 앞으로 양당 합동 제안서를 보냈습니다.

이 제의를 받은 공산당은 7월 24일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를 열어 토과 신민당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합니다. 북조선공산당은 신민당에 보낸 답장에서 "북조선 노동자 농민 지식분자 및 기타 근로대중의 이익을 대표하는 두 당의 합동은 조선의 민주주의적 역량의 성장과 민주주의 조선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을 전개함에 있어서 근로대중으로 하여금 더 광범히 뭉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양당 사이에 제안과 답장이 오고간 뒤 7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은 이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양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 연합회의를 개최하였고, 7월 29일 양당 중앙위원회 확대연합회의에서 합당을 공식 결정하였습니다. 회의는 "조선 근로대중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양당이 합당해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어 8월 7일 양당은 김일성, 김두봉, 김용범, 최창익, 허가이 등으로 `북조선노동당합당대회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직의 통합작업에 들어갑니다. 합당은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오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8월 초부터 진행된 합당 작업은 면→군→도의 순서대로 진행돼 8월 20일경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합당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닙니다. 공산당 내에서 신민당과의 합당에 반대하는 의견이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부 공산당원들은 신민당과 합당을 당의 `소자산계급화`라고 비판했는가 하면, 당세가 공산당 27만의 3분의 1밖에 안되는 9만의 신민당을 깔보는 태도를 나타내기도 했던 것입니다.

반면 신민당에서는 "공산당은 강대하고 신민당은 상대적으로 약한데 합동하게 되면 간부자리를 모두 빼앗길 위험이 있으며, 지금은 신민당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장래 당원 심사가 있을 때 대규모 숙청이 있을 지 모른다"는 식으로 불안감을 나타냈습니다. 또 일부에서는 "공산당에는 무식한 사람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배우려고 합동한 것이다"라는 식의 신민당 우월의식이 표출되기도 합니다.

갈등은 합동 작업이 진행되면서 대표 선출을 둘러싸고 더욱 구체적으로 표출됩니다. 공산당과 신민당의 당원수의 비율은 3대 1이지만 도당대회에서 창립대회 대표를 선출할 때는 양당 출신을 같은 비율로 했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원들은 "신민당 측에서는 대표 자격이 없는 사람이 뽑힌 반면 공산당 측에서는 능력이 있어도 제한된 숫자만 대표가 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에 대해 신민당의 일부에서는 "공산당에 소속돼 있다 신민당이 만들어질 때 그쪽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신민당에 참가했는데 이제 와 공산당이 아니라고 해서 홀대하면 되겠느냐"고 치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분란에도 불구하고 합당 절차는 착착 진행됩니다. 이런 문제들이 합당 자체를 연기시킬 만큼 본질적인 문제들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불만들이 대세를 거스를 만한 힘은 되지 못했으며, 시대착오적인 사고로 비판받음으로써 더 이상 목소리를 높일 수도 없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조직통합 작업이 마무리되자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3일 동안 평양에서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북로당 창립대회에는 이북 6개 도에서 당원 35만6천 명의 대표 801명이 참석했습니다. 대표들의 직업별 구성은 사무원 385명(48%), 노동자 183명(23%), 농민 157명(20%), 기타 76명(9%)이었으며, 전체 대표 가운데 여성대표는 79명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일제시대 반일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사람은 373명(46%),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263명이었으며, 이들이 받은 총형량은 징역 1,087년이나 되었습니다.

노동당 창립대회에서는 당 강령과 규약을 둘러싸고 적지 않은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서로 색깔이 다른 공산당과 신민당의 당원들이 한군데 모여 북한 사회를 이끌어갈 새로운 당을 만드는 자리였으니 다양한 의견과 주장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우선 당 강령을 두고 오기섭·이봉수 등은 `프롤레타리아의 근본적인 이익이 반영되지 않았다`면서 "북로당의 강령이 혁명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합니다. 사실 북로당은 대중적 계급정당을 지향했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일면 타당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소수의견에 불과했습니다. 대다수는 "당 강령은 민주세력의 당면한 정치적 요구를 담은 것이면 된다"는 데 동의했던 것입니다.

당 규약도 논란거리였습니다. 당의 성격과 관련해 `북로당은 근로대중의 정당이며 근로대중의 이익을 옹호하고 대표한다`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당원이 근로대중의 전위분자이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해서 결론은 `아직 전위 분자임을 내세울 때가 아니다`는 것으로 내려집니다.

그밖에도 당의 조직원칙과 당원의 자격문제 등에 관해서도 계속 논란이 일었습니다. 당시 창립대회에 참가했던 전직 노동당 간부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당의 조직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적 중앙집중제 원칙이 명시됐습니다. 또 하급기관은 상급기관에 복종하고 소수는 다수의 의견에 복종한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됐어요. 논란 끝에 `개인은 조직에 복종한다`는 부분은 빠졌습니다. 당 창립대회를 여는 시점에서 당원들 개개인에게 조직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당원이 되려는 사람의 보증인 자격은 `1년 이상 당 생활을 하고 1년 이상 교제해온 사람`으로 규정했습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보증인의 당 생활 기간을 1년으로 잡는 것은 너무 약한 게 아니냐`는 반론이 있었죠. 그러나 `공산당과 신민당 활동을 해온 사람 가운데 당 생활을 해온 경험이 1년 이하인 사람이 수두룩한데 기간을 너무 길게
하면 새로 당원을 늘려가는 데 어려움이 있지 않느냐`는 의견이 강했습니다."(중앙일보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 229∼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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