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구(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정치학)
통일시대에 즈음한 한국정치의 바람직한 상이란 무엇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통일시대란 용어에 대해서부터 언급해야 할 것 같다. 통일시대란 무엇인가? 아마도 이 말은 남북이 분단시대의 대결과 갈등을 넘어 서로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를 도모, 궁극적으로는 상생(相生)을 통해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그러한 시대를 의미할 것이다. 물론 남북의 체제와 이념이 다른 만큼, 또한 한반도의 통일 여부 및 통일된 한반도의 성격에 따라 동북아 세력균형 역시 커다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만큼, 통일의 구체적 과정은 대단히 복잡하고 생각처럼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통일시대에는 상생을 통한 통일 지향이 그 모든 복잡함을 가로지르는 핵심적인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통일시대에는 북을 부정의 대상이 아닌 상생을 통한 통일의 대상임을 인정해야
그렇다면, 이 같은 통일시대에 부합하는 한국정치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것은 적어도 대북정책··, 통일정책에 있어 북을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상생을 통한 통일의 대상임을 인정하는 가운데 통일 지향의 정책을 추구하고, 대외정책에 있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여건 조성을 모색하며, 대내적으로는 과거의 냉전적 극한 대립과 갈등이 지양되고 민주적 절차에 따라 합의를 만들어가는 그러한 정치가 아닐까? 물론 여러 문제에 대한 각 정치세력들의 의견의 차이는 존재할 것이고 또한 그러한 이견은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통일시대에 즈음한 한국정치에 있어 그 이견은 냉전시대와 같은 대립과 분열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 토론을 통해 합의에 이를 수 있는 그러한 이견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정치의 현 모습은 어떤가? 이 같은 기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의석수 부족으로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지 못하는 자민련을 위해 민주당이 3명의 국회의원을 `임대`해주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정치의 실상이다. 또한 안기부 예산을 사적인 선거운동 자금으로 가져다 썼던 구 집권당이 이에 대한 수사를 정치탄압이라 하여 항의하고 있는 것이 우리 정치의 본 모습이다. 냉전보수적 이해와 기득권적 이해 속에서 사사건건 국정운영과 개혁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고 있는 것이 한나라당의 모습이라면, 일부 구 정치세력과 연대하여 소수정권의 취약성을 모면해보려고 하는 것이 집권 민주당의 구태의연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만성적 정치 교착상태`라고도 지칭할 수 있는 이 같은 정치현실로서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국내외적 상황에 대처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사실 이 같은 `만성적 정치 교착상태`가 예상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탈독재 민주화 이행 이후의 한국정치 지형과 관련된 구조적인 원인이 있다. 즉 냉전 및 독재시기의 기득권에 그 뿌리를 두고 민주화 이행 이후에도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잔존 독재세력으로서의 한나라당의 존재, 겨우 정권 교체를 이루어 집권을 이루기는 했지만 의회 소수당 정권으로서 구 독재세력의 일부인 자민련과 연대하지 않을 수 없는 민주당정권의 존재, 그리고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주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단적으로 정치권에 진입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진보세력의 현실 등이 현 한국정치의 만성적 교착상태를 가져왔던 원인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탈독재 ··, 탈냉전의 시대 변화에도 불구하고 구 기득권에 집착하고 있는 보수세력은 여전히 강력한데 반하여, 이 같은 시대 변화에 부응할 수 있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새로운 정치세력의 발전과 강화는 가로막혀 있는 것이 현실의 정치적 상황인 것이다. 더구나 이 같은 정치지형은 지역주의에 의해 강고하게 지탱되고 있다.
한국정치의 현재 모습은 `만성적 정치 교착상태`
우선 우리는 잔존 냉전세력인 한나라당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력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일차적인 원인은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양 김씨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 정권이 집권함으로써 독재세력이 약화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위로부터`의 민주화 이행이라 지칭될 수 있을 이 같은 방식의 민주화 이행으로 한국정치는 민주주의 시대로 이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재세력의 약화 또는 청산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더구나 1987년 대통령선거와 더불어 등장했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지역주의정치는 이들 세력이 경상도라는 지역적 기반을 중심으로 결집할 수 있고 지금까지도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 결과, 반공보수주의는 특정 지역의 지역주의와 결부, 지금까지도 그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오며 시대착오적인 그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현재의 정치적 교착상태의 또 다른 원인을 현 민주당정권의 구조적, 주체적 한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선 민주당정권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구 독재세력의 일부인 자민련의 협조 없이는 지탱되기 어려운, 따라서 DJP공조체제를 통해 그 생존을 도모하는 소수정권의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정권의 진정한 한계는 집권에도 불구하고 이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그 소극성 자체에 있는지도 모른다. 즉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민주화 이행 이후에 구 독재세력에 더욱 더 의존하여 생존하려 하는 구태의연한 태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민주당정권의 정체성 상실이며 이에 따른 정치적 비관주의의 만연이다. 집권당으로서 아무런 발전 전망을 보여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매 현안마다 구 정치세력에 의존하는 임시방편적이고 구태의연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임대`라는 발상과 행동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의 필연적 산물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현재의 정치적 교착상태과 관련하여 민주화운동의 한 주역인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 실패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진보진영은 탈독재, 탈냉전에 부응하여 새로운 한국정치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그나마의 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어디에 있건, 진보진영의 독자적인 정치적 진출의 실패는 한국정치가 구 정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를 도모할 수 있는 자극의 상실, 기회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제도정치권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민중운동 시민운동의 주축은 바로 이들이며, 그 영향력 역시 작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충분히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한국정치에 있어 아직은 간접적이며 밖에서 외치는 목소리일 뿐이다.
통일시대에 걸맞는 한국정치의 모습은 탈냉전에 부합하는 정치세력이 등장할 때 가능
그렇다면 이처럼 만성적 교착상태에 머물고 있는 한국정치 발전을 위한 대책은 무엇인가? 단기적으로 그것은 집권여당인 민주당과 한나라당 사이의 소모적 정쟁(政爭)을 중단 또는 완화시키는 일일 것이다. 물론 반공보수주의와 영남 지역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한나라당과 민주화운동의 경력 및 호남지역주의에 근거하고 있는 민주당 사이의 대립이 하루아침에 완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급히 해결되어야 할 국내외적인 현안이 누적되고 있는 현실에서 오로지 권력 쟁취만을 위한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는 현실은 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관련, 집권여당인 민주당에 의해 유지되어왔고 최근 다시 강화되고 있는 DJP공조체제 역시 재고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 공조체제가 민의와 관계없는 정치 야합의 정치실상을 보여주는 것일뿐더러 여야 사이의 극한대결의 정쟁을 불러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한국정치의 문제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그 해결책 역시 장기적으로는 한국정치의 구조적인 변화에서 찾아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즉 그것은 탈냉전, 탈독재의 상황에 부합하는 정치세력의 등장 및 재편 그리고 이에 걸맞는 정치제도의 정착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한국정치가 제대로 기능할 때 통일시대에 걸맞는 한국정치의 모습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