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을 비롯한 여러 민주법령 제정 작업이 진행됨으로써 친일잔재와 봉건유제를 청산하기 위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 빠른 속도로 진행됩니다. 북한은 민주개혁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지역별로 분산돼 있던 인민위원회를 통합하여 중앙조직으로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게 됩니다. 그러나 임시인민위원회의 역량만으로는 민주개혁을 추진해 가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당 조직을 정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공산주의세력을 최대한으로 결집하면서 동시에 대중적 전위정당의 필요성이 대두하게 되고,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 양당의 합동을 통해 북조선노동당이 출범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북조선노동당의 출범 과정을 살펴볼까 합니다.


1. 독립동맹의 조선신민당으로의 변환

김두봉을 위시한 연안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동맹 세력이 귀국한 것은 1945년 12월 13일. 해외 혁명세력 가운데는 가장 늦게 귀국한 셈이지요. 이들은 기존의 정치조직에 몸담을 마땅한 그릇이 없다고 판단, 당분간 독립동맹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합니다. 암중모색하던 이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모스크바 3상회담 결정이 있은 후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지면서부터였습니다.

독립동맹은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전평 북조선총국, 평남 농민위원회, 민주청년동맹, 여성총동맹 등과 함께 모스크바 3상회담 결정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이날 독립동맹의 주석 김두봉은 평양방송을 통해 [시국에 대한 태도 표명]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모스크바 3상회담을 지지하며 자주독립을 위해서 매진하겠다"는 요지였습니다. 독립동맹으로서는 향후 정치활동에 대한 중대한 결정을 내린 셈입니다. 이후 독립동맹은 모든 일에 공산당과 보조를 맞추게 되고 결국 합동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독립동맹은 1월 31일 항일시기의 강령을 해방과 미·소 양군의 주둔이라는 변화된 상황에 맞게 고칩니다. 그 핵심 내용은 `조선의 완전한 독립 쟁취와 조선민주공화국의 건립, 일제와 매국노에게서 몰수한 대기업의 국유화,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한 토지 재분배 등`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독립동맹은 남한에서의 조직 건설 작업에도 착수하게 됩니다. 1월 25일 부주석 한빈을 서울에 파견하였고, 2월 5일에는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하는 독립동맹 경성특별위원회가 결성되었습니다. 또한 2월 8일 결성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서 독립동맹의 김두봉 주석과 최창익 부주석은 각각 부위원장과 총무국장을 맡게 됩니다.

이렇게 정치적 기반을 다져가던 독립동맹이 정당체계로 전환하게 되는 것은 2월 16일입니다. 이날 독립동맹은 그 명칭을 조선신민당으로 변경하였습니다. 그때 발표한 선언을 통해 `급격히 변화하는 정세에 맞추어 강력한 조직으로 건국대업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조선신민당으로 개칭하며, 조선독립동맹의 투쟁전통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동시에 선언에서 독립동맹은 현단계의 조선혁명의 성격을 `자산계급성 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고, 이를 위해서 앞에서 기존의 임시강령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혁명과제를 제시합니다. 독립동맹의 이런 혁명 단계 규정과 강령은 북조선공산당의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 노선과 크게 다를 게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사한 강령과 목표를 가진 독립동맹이 정당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좌파진영의 분열을 가져올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북조선공산당으로서는 조선신민당의 탄생이 지식인층과 동요하는 근로대중을 끌어들이는 작업을 어렵게 만들 소지가 충분히 있었던 것입니다.

북한 지역에서 조선신민당 조직이 확대되면서 실제로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노동자와 빈농이 중심이 된 공산당과 달리 신민당은 지식인과 중농층을 비롯한 소자산계급이 주요 기반이었지만, 조직들이 확대되면서 일제시대부터 받아온 반공교육의 영향도 작용해 일부 노동자와 빈농들도 신민당에 가입하는 일들이 벌어지곤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하부조직에서는 양당 사이의 마찰이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김일성을 비롯한 소련군정, 그리고 독립동맹의 지도부는 이런 사실들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아마 그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북한의 지도부는 이런 문제들을 감안하고라도 독립동맹의 조선신민당으로의 전환을 추진했을까요? 독립동맹이 정당으로 전환하게 된 데는 주·객관적 요인이 동시에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독립동맹의 입장에서 볼 때 개별적으로 공산당에 입당하는 것보다는 독자적인 정당으로의 발전을 통해 자신들의 지분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공산당에 포섭되지 못하고 있던 지식인층과 중농을 비롯한 광범위한 중간층을 조직함으로써 독자적인 지분을 확보할 수 있다고 봤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김일성과 소련군정의 입장에서도 조선신민당의 존재가 결코 거추장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통일국가 건설이 당면과제였던 해방정국에서 공산당이 포괄하기 힘든 중간세력을 묶어낼 정치세력의 필요성이 있었고, 그 역할을 신민당이 맡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초기 소련과 북한 지도부는 공산당과 민족주의세력의 합작을 통해 정부를 구성하려고 했으나, 탁치분열로 조만식이 탈락하면서 새로운 합작 파트너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 독립동맹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독립동맹의 조선신민당으로의 전환은 장기적으로는 공산당과의 합동을 염두에 둔 포석 위에서 이루어졌으며, 단기적으로는 중간세력을 포섭한 공산당에 우호적인 중간좌파 정당의 존재 필요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조선신민당은 결성된 지 4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9만 명의 당원을 확보한 정당으로 발전함으로써 애초 목적한 바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1946년 6월 26일 조선신민당은 당명 개칭 후 4개월만에 제1차 북조선대표대회를 개최합니다. 대회에서는 위원장 김두봉의 보고와 함께 국내외 정세와 당의 과업, 강령과 규약에 대한 토의와 의결이 있었고, 중앙집행위원 선거에 이어 28일 폐회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이미 물밑에서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합당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6월 26∼28일 진행된 대회에서 서울의 조선신민당 경성특별위원회를 남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로 개편하기로 결정했던 데서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따라 7월 13일 신민당 경성특별위원회는 남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로 독립되어 나가고 북한에서는 신민당과 공산당의 합당 작업이 공식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합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