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북을 연결하는 길은 4개가 있다. 서쪽부터 보면 `자유로`가 첫 번째이고, 1번국도인 `통일로`가 두 번째이며, 3번 국도인 `평화로`가 세 번째이다. 마지막 네 번째 길은 포천에서 철원사이에 붙은 `북진통일로`이다. 포천을 지나 운천에 진입하기전 대전차 방호시설 앞에 세워진 `북진통일로`라는 작명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은 우리를 약간 당혹스럽게 한다.

통일의 최고 이념은 `자유`?

내가 이 표석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씩은 포천군청이나 이 지역 국회의원인 이한동씨를 들먹인다. 그리고 이 이름을 하루빨리 바꾸든지 철거해야한다며 입을 모은다. `북진통일로`의 작명에 대해서는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비슷한 의견에 도달할 것이다. 의정부와 동두천의 미군기지에 포위된 채 달려야하는 3번 국도의 이름이 `평화로`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아 문제이고, `통일로`에 대해서는 누구도 문제를 걸고 넘어갈 사람이 없지만 `자유로`는 고개가 한번쯤 갸우뚱해진다.      

길은 전쟁과 관련이 있다. 한자에서 길을 뜻하는 도道는 금문金文에 따르면 行과 首의 결합으로 行은 길을 본뜬 것이고, 首는 목잘린 머리를 뜻한다. 길은 이민족의 머리를 묻어 정화된 길의 의미로서 통하다가 이후에 사람이 지켜야할 도리로서 변화되었다. 길이 문명의 전제로 되는 과정에는 정복과 지배에 대한 합리화가 한편에 숨어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길에는 그런 잔재가 남아 있으니, 굳이 `자유로`를 이야기하려는 이유이다.

낯선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결국 그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힘이 된다는 신념은 오리엔탈리즘과 닮아 있다. 남북관계를 얘기할 때 "사람이 다니니 길이 되었다"는 식의 방법론은 자칫 길에 내재된 부정적 속성을 은폐할 수 있다. 그러나 "길은 내 앞에 놓여 있다. 나는 안다 이 길의 의미를"이라는 싯귀에는 이미 나의 선택 이전에 존재하는 길에 대한 긴장이 전제되어 있다. 길을 통해 가기 전에 길 자체를 알아야 한다. 길의 의미를 깨닫고 결심 끝에 그 앞에 선 이들의 표정엔 기영도의 표현처럼 `톱밥 같은 쓸쓸함`이 스쳐가기 마련이다. 시원하게 뚫린 자유로에 들어서면서 쓸쓸해지는 것은 그래서이다.

자유로는 90년 8월에 착공되어 94년 9월에 완공된 길이다. 89년 9월「한민족 공동체통일방안」발표 때 천명됐던 「평화시」구상과 연관되어 통일동산 건설과 함께 추진되었다. 이홍구 당시 통일원장관의 설명에 따르면 이 통일방안은 "사회가 국가보다 더 원초적인 조직이라는 철학에서 시작된다. 바꿔 말해 모든 것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정치를 중심으로 한 국가체제보다는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체제에 역점을 둔 통일방안이며...".
 
체제를 중심으로 했던 기존의 통일방안에 비해 민족을 중심으로 했다는 점은 획기적인 진전이었다. 이 정신은 노태우 대통령시절의 남북기본합의서를 거쳐 6.15 선언 합의까지 통일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어서 "통일의 이념은 자유, 인권, 행복의 가치가 구현된 민주국가로 결정했으며 국가형태는 단일국가로 확정했다"고 설명했다. 통일의 이념은 `자유`를 정점으로 한다는 설명이다.

이 대목에서 `자유로`라는 작명의 출처가 나타난다. 72년 완공된 통일로가 당위적인 통일염원을 표현한 작명이었다면, 자유로는 일관된 논리체계의 꼭지점에 놓인 통일이념의 중심개념으로 표현된 작명인 셈이다. 7.4 남북공동성명에서 합의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정신이 "자유, 인권, 민주"로 바뀐 것이다.

워싱턴의 백악관 옆에는 자유광장(Freedom Plaza)이 있다. 또한 가운데 잔디밭을 두는 자유로의 건축방식이 미국의 하이웨이를 본 딴 것으로 볼 때, 자유의 개념은 미국의 그것과 무관치 않다. 이런 배경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이 일단 옳다는 선험적 전제에서 북과 만나고자 한 것이다. 만일 남의 논리대로 북이 대응한다면 자신들이 일단 옳다고 생각하는 혁명민주주의와 평등 같은 구호를 갖고 나오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체제경쟁이 되어 처음에 출발점이 되었던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체제`의  통일방안은 실종되고 만다.

다행히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7.4 남북공동성명의 정신이 다시 확인되었지만 아직도 `자유로`는 `자유로`로 남아 있다. 더구나 한강과 임진강에 두터운 철책선을 세움으로서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해 버렸으니 강과 함께 문명을 건설한 이태리의 베니스나 베트남의 호이안 같은 휴먼도시의 가능성은 아예 틀려 버렸다.

자유로라는 이름은 적절한가?

노태우 대통령은 자유로 준공식사에서 `자유로`를 통해 남과 북이 만나고 대화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남과 북이 대화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대화란 배우면서 말하는 것이다. 사람마다의 차이에 의한 불일치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대화 이전에 서로가 배우고 가르쳐주게 된다. 그리고 그 조건이 어느 만큼 충족될 때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성일 뿐이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목숨을 건 비약`을 하지 않으면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목숨을 건 비약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사랑 없는 대화란 불가능하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며, 거저 주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린 자유롭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김남주 시인은 자유에 대해 통렬히 노래한다.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 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 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누어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소통하기 위한 길의 역사는 개인사의 합이 아니다. 코셀레크는 말한다. `역사는 힘과 방향을 가진 시대와 민족의 총체적 결과이다`. 총체란 결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정된 것이 뒤집힐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연적이다. 그래서 역사와 만난다는 것은 책상에서가 아니라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누어 흘리는` 가운데 가능한 것이다.

자유로를 끼고 있는 가장 큰 신도시인 일산은 전쟁위험 때문에 원래 개발이 제한되었으나 북방정책과 함께 규제가 풀리고 신도시 건설이 시작된 곳이다. 때문에 통일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일산의 가치는 올라가고 전쟁가능성이 높아질수록 가치는 급락하는 지역이다. 일산지역이야말로 통일이냐 전쟁이냐가 지역의 운명에 직결되는 곳이다.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남으로는 서울과 북으로는 개성 평양에 가장 가깝게 도달할 수 있는 도로선상에 있기 때문에 전쟁시 양측의 제1 진격로가 된다. 그리고 5027작전계획에 따른 수도권방어계획에는 일산 원당등 신도시와 의정부 등 서울 북방지역이 1차 전선이 된다.

따라서 이 계획은 1994년 당시「신도시를 장애물로 해 수도 서울을 방어하겠다」는 식으로 해석된 적도 있었다. 국방부는 또 `도시의 각종 건물과 복잡한 도로망은 방어부대에게 현저한 이점을 제공하는 반면 공격부대에게는 기동에 제한을 주게 된다`고 설명함으로서 신도시방어전선의 개념을 구체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작전계획 5027에 포함된 수도권방어계획에서 우선 북이 수도권 포격을 위해 전방배치한 1만기 이상의 1백70㎜ 자주포와 2백40㎜ 방사포에 대한 대비책의 중심은 조기경보수단이다. 북의 지하기지에 배치된 각종 포가 사격을 위해 밖으로 나올 경우 한반도에 배치될 조기공중경보기(AWACS)와 현재 활동중인 정보수집기(U2R) 및 각종 영상감시수단을 통해 감시, 대응할 수 있다. 첫 포격을 피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감시수단과 대포병레이더 등을 동원해 포격에 따른 후폭풍을 추적, 포대진지를 확인한 뒤 2차 포격전에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은 첫 포격을 위력적으로 전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전쟁이 개시된 상태에서 평화적인 행동계획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휴전선이남 수도권 전방방어는 육군 제3야전군과 주한미군이, 서울방어는 수도방위사령부가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전쟁발발시 서울지역 예비군들은 주거지별로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휴전선과 서울 사이에는 4개의 대형방어선과 다수의 소형방어선 등이 거미줄처럼 설치돼 있으며 최전방 사단들은 북이 전면공격을 해올 경우 3일 동안 진지를 사수하고 후방부대의 도움을 받아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것으로 돼있다. 영화JSA에서 표현한 대로 전쟁 발발시 이 지역의 생존가능성은 0은 아니라도 희박하다. 때문에 어느 도시보다 전쟁을 막기 위한 사전단계의 평화운동 통일운동이 절실한 곳이 자유로 주변 일산 원당 신도시들이다. 그래서 길 이름하나도 예사로이 지나쳐서는 안된다. 

6.15선언으로 7.4남북공동성명의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이 재확인된 상황에서 과연 `자유로`라는 이름은 적절한가? 

오두산 통일전망대와 조만식

북을 바라보는 전망대중에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것이 오두산 통일전망대다.(오두산 통일전망대 031 945-3171) 이곳은 그 옛날 삼국시대부터 한강과 임진강 황해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관미성` 자리이다. 오두산 전망대는 김정호가 관미성일 것이라고 추측하였던 것이 정설로 굳어져 이어지고 있으나 북에서는 백제 초기 말갈과의 전투에서 패한 관미령전투와 연관지어 예성강 남쪽으로 추정한다.

최근에는 관미성이 강화의 별립산이나 봉천산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도 나오고 있다. 어쨌든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 강화를 거쳐 서해로 빠져나가는 두물머리인 이곳은 북쪽이 한눈에 들어오는 경승 중의 하나이다. 물길이 원융, 조화하는 천혜의 장관에 세워진 통일전망대 역시 `자유로`와 연결된 하나의 구상에서 건설되었다.

이곳에 조만식의 동상이 선 것은 자유로의 이념설정과 무관하지 않다. 1992년 역사학계는 조만식이 전쟁중 평양에서 사망한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몇몇 단체가 주도하여 자유로가 건설되던 이곳에 그를 기리는 동상을 세우게 된다.

오산학교와 국산품애용운동으로 유명한 그는 평안도 출신으로 다른 평안도 출신 엘리트들이 그렇듯 미국 기독교의 세례를 받은 친미적 인물중의 한사람이었다. 1890년대부터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평안도에 기독교가 보급되고 그들에 의해 세워진 숭실중학에 입학하면서 그도 기독교도가 되었다.

당시 평안도는 국내외적으로 상업이 번성한 지역이었고 성리학적 질서가 느슨했으며 홍경래란의 경우처럼 중앙정부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이런 이유로 평안도에 정착한 미국 북장로회는 압도적 교세확장에 성공하고 한국기독교계의 주류로 성장했다. 그러나 민족적이었던 기독교는 곧이어 유입된 공산주의와 갈등관계에 놓인다. 미국 북장로회는 `성서무오설`을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 신학의 성향이 강했다. 이미 1920년대 미국본부의 신앙노선이 점차 성서에 대한 재해석을 바탕으로 교조주의에서 벗어나 자유주의 신학으로 변화하는데도 불구하고 선교본부와 마찰을 일으키면서까지 보수신학을 고집했다.

그래서 일제시기 기독교의 노선을 결정지었던 `신사참배거부운동`의 경우 평안도가 가장 강력했던 것은 민족사적 의의도 크나, 우상숭배 거부와 신앙의 순수성으로 교회의 변질을 경고하는데 중심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 주된 동기가 보수적인 미 북장로회의 근본주의적 신앙노선에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조만식은 이런 배경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소련이 북조선 인민정치위원회를 맡아달라는 것을 거절하고, 기독교정당인 조선 민주당을 건설. 당수가 되어 반탁운동을 벌인다. 1946년 1월에는 평안도의 일인자 조만식을 연금 시킴으로서 사회주의 세력과 조선민주당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그해 3월 토지개혁이 실시되면서 평안도 엘리트인맥은 `자유반공투사`가 되거나 `자유`를 찾아 남하했다. 평안도인의 월남은 해방 후부터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함경도의 목회자들이 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남하한 것과 대조적인 것은 평안도의 기독교가 이미 일제시기부터 반공성향이 체질화 된 때문이었다.

그가 공산군의 평양철수 때 총살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에게는 누구보다 견결한 자유투사의 이미지가 남게 되었다. 전쟁 후 남하한 평안도 중심의 기독교계 엘리트들은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주도하나 이승만에 의해 제거되어 야당신세로 밀려난다. 그러나 4.19혁명에 힘입어 민주당정권을 구성했다. 이념적으로는 이승만과 차이가 없었으나 이승만 제거 후 CIA 한국지부가 장면과 접촉하며 민주당 신파를 후원했던 것도 이들의 친미 반공성향 때문이었다. 이 같은 연유로 혁신계와 대학생들이 `중립화통일론` `자주통일론`을 제기하면서 통일열기가 확산되자 민주당정권은 반공국시를 강화하여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였다.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조만식의 역사적 의미가 어디에선가 평가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북녘 땅을 바라보며 다시 생각해 본다. 남북 화해협력의 제1도로가 될 이곳에 조만식 동상은 과연 적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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