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석 (군사평론가/`반갑다 군대야`지은이/harmy@orgio.net)


1. 시나리오 하나 <미리 본 2003년 10월 김정일·부시 최고위급회담!>

`인생역전` 안 풀리는 부시

2003년 10월19일 아침 평양 순안 비행장.

부시를 태운 보잉사의 미국 제1호기가 비행기 활주로에 미끄러져 앉았다. `원숭이` 표 빨간색 안경을 코에 걸치고 애써 웃음 띤 얼굴을 한 부시가 비행기 계단을 내렸다. 이틀 뒤 열리는 북·미 최고위급회담을 위해서다. 이라크 침략 전쟁이 끝난 뒤  6개월 만이다.

부시는 그의 폐부를 콕콕 찌르는 공기를 마시며 승용차에 옮겨 탔다. 이라크 침략전쟁을 앞둔 지난 해 여름 휴가를 떠올렸다. 후회가 막심한 휴가였다. 제4차 대전을 예견한 앨리엇 코언 존스홉킨스대 교수의 책 <최고 사령부>보다는 김명철 군사외교평론가의 <김정일의 통일전략>을 왜 정독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였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평양 오기 전 하와이에서 잠시나마 이라크 전쟁 뒤 자기인생이 왜 이렇게 안풀리냐며 `인생역전 좃또복권`을 긁어 보았지만 `꽝`으로 나온 그였다. 클린턴 말기 때부터 대북 강경책을 일삼아 수십조원의 대북 누적금은 쌓인 뒤였다. 전세계 로또 누적금을 합하고도 남을 대북 누적금 때문에 부시는 홧병이 걸려 석달 동안을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여기에다 카알라일 그룹 아시아 고문인 부시아버지는 지난 4월 15일 전경련 초청으로 이남에 수금하러왔다가 홍콩산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사스)이라는 병까지 얻어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마침 부시가 평양에 간 10월19일은 우연찮게도 1993년 북미 제네바협정 마감시한이 되는 날인 10월21일을 이틀 앞둔 날이다. 이북은 제네바협정을 계속 어겨온 미국에 맞서 2003년 1월10일 핵확산금지조약(엔피티)을 전격 탈퇴하였고, 이어 2월24일 오후 이북의 동북부 해안지역에서 동해 쪽을 향해 소형 지대함 미사일 1발을 쏜 바 있다.

그 뒤에도 한 두발을 뒷발차기로 날렸다. 이 미사일이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 시험 유예를 접는 예비 수업인 줄 알고 화들짝 놀란 건 부시였다. 3월초에는 8천개의 폐연료봉에 재처리작업이 마무리단계라고 세계에 통보한 바 있다. 이북의 끝없는 `핵과 미사일` 공세에 부시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지난 3월19일 후세인을 몰아 부치고, 7천년의 이슬람 문명을 단 21일 만에 파괴시킨 조지고 부시는 미국이었다. 하지만 이북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고난의 연속`이 될 줄이야.

이북의 힘은 `썬군정치표 건전지`

록펠러, 모건, 카알라일 등 미 군산복합체의 조종을 받는 부시가 이북을 아프간과 이라크와 같이 취급하고 싶었지만 `선군정치` 기치아래 탄도미사일 보유국 세계 4강에 가볍게 진입해 맞짱뜨는 이북에게는 당할 재주가 없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도 다 아는(?) 탄도미사일 보유국 세계 4강은 미국, 러시아, 중국, 이북이다. 2강 러시아, 3강 중국이 미국에게 눈치보다보니 당연히 4강인 이북이 미국과 맞짱뜨는 절묘한 정세다. `인생역전?` `나라역전!`이다.

월드컵 공차기만 세계 4강인 이남도 이 정도는 인정한다. 그러다 보니 지난 6개월 정도가 말이 다자간 회담이고, 3자, 6자회담이지 이북과 미국 이외에는 모두 들러리였다. 수년전 4자회담의 재판이었다. 여기서 `민족 없고`, `알맹이 없는` 노 통장은 대화의 자리에조차 끼지 못했다. 

수십년 동안의 이북과 미국의 대화는 늘 이북을 중심으로 대화시계가 돌아갔다. 시계밥은 `영변산`이기 때문이었을까. 이름하여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썬군정치표 건전지`였던 모양이다. 대포동산 재충전 건전지도 여분으로 있다고. 앞으로 500년은 끄덕없다고. 여기에다 이북이 보유하고 있는 1만5천 킬로미터 탄도미사일 수백기는 정확하게 미국 본토를 겨냥하고 있다. 뉴욕과 워싱턴의 주요 중심부를 향하고 있단다. 가끔 섬나라 일본의 수십기의 원자력 발전소도 겨냥하고 있다.

인류사에 보기 드문 인간의 얼굴을 한 이 신출귀몰한 미사일은 250년 동안 숱한 약소국을 침략해 쌓은 부패한 미 자본주의를 단 21분만에 무너뜨린다는 것을 미 펜타곤에서 공익근무하는 행정보조병도 알건 다 안다. `군사`에 별 관심없이 일본 방위청 앞에서 `끼따이 조선` 김밥파는 아가씨도 알건 다 안다는 눈치다.

북·미 수교시계는 `썬군정치표` 건전지와 `미선 효순 반미반전표` 건전지를 한꺼번에 넣은 뒤로 시계바늘이 미국의 본토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비로소 부시를 조종하고 있는 미 군산복합체가 21일 이북과 이남의 민족한테서 `본토안전보장`을 확약받고서야 변비와 홧병,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갔다. 변비가 뻥 뚫린다는 미국산 `아락실`은 비싸기만 할 뿐.

북·미 불가침조약, 몸풀기의 시작일 뿐

10월 21일 드디어 `대국`의 부시가 `약소국(?)`의 김정일 위원장 앞에서 굴욕적인 서명을 했다. 북·미 최고위급회담에서 맺은 8개항의 <북미 호혜평등조약>을 전날 급파된 김하나 평양 통신원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서명한 연필액이 채 마르지 않은 이 조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조 북·미 최고위급회담을 정례화한다. 2조 북·미 불가침조약을 이날부터 발효시킨다. 3조 위 조약에 따라 주한미군 철수를 4년 안에 마무리한다. 4조 2004년 6월 안에 북·미 수교를 맺기 위해 고위 수교협상을 11월부터 진행한다. 5조 시베리아 횡단 철도사업과 천연가스 사업의 이북 연관사업에 미국의 참가를 허여하기로 한다. 6조 미국은 6·15 북남 공동선언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며 한(조선)반도의 연방통일에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7조 이북은 연방제 통일 뒤에도 미국본토의 안전을 보장한다. 8조 이북의 핵과 미사일은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일정과 함께 일괄타결한다."

이 조약은 "한(조선)민족의 대역전을 바라는 숱한 강제 징용자, 일본의 성노예, 미군 전쟁 희생자, 열사, 국가보안법 피해자, 고문희생자, 민간인 학살희생자, 의문사한 자 등 5천년의 한을 담은 피맺힌 문서"라고 안티 씨엔엔이 전 세계에 보도했다. 좃선일보가 제일 기겁을 하고 일체 보도하지 않았다. 10월1일 광화문의 `반핵반김 자유통일 대회`에 참석한 김똥길 아저씨는 오로지 `못먹어도 고`다. "부시 인생역전 만세!, 로또 유에스에이 만세!"

한편 인터넷 `통일뉴스`의 한 보도 일꾼은 이날 "한(조선)민족과 미국과의 싸움이 한(조선)의 승리로 끝났다"고 전 우주에 타전했다. 한편 "이 조약상의 2004년 6월의 북미 수교 체결일정은 2004년 11월 부시가 재선을 앞두고 외교적 성과를 과시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평했다.

2003년 5월 당시 이남의 많은 사람들은 북·미 불가침조약, 이것은 꿈이라기보다는 현실을 이루기 위한 시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부 정세를 잘 모르는 사람은 2003년초만 해도 `이라크 다음은 이북`이라고 걱정했다.

이라크 전쟁 다음은 이북이 아니라 `미국의 고립`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결과였다. 이미 지난 3월8일 톰 대슐 미 민주당 지도자는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고립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다른 의원들도 부시의 귀에 따가리가 앉도록 미국의 고립을 이야기했다.

`민족`과 `통일`이 빠진 노 통장의 `허무개그`는 막을 내리고

10월22일 노 통장을 만나주지도 않고 돌아 간 부시. 전화만 하려나? 

취임 뒤로 노 통장은 줄곧 캘리포니아산 `주한미군 철수개그`, `북폭개그`, `대북송금개그`, `파병개그`로 짜고치는 유씨엘에이대 유학생 개그맨 뺨치는 개그짱이었다. 하지만 `민족`과 `통일`이 빠진 노 통장의 `허무개그`는 민중들의 지칠 줄 모르는 `민족공조 압력`을 받은 뒤 7개월여 만에 `평화번영정책`은 막을 내렸다.

10월 24일 서울 시청건물에는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우리가 꼬레아 연방합시다."라는  현수막이 바람에 휘날렸다. 갈갈이와 김매화가 이 곳에서 올 연말에 꼬레아 연방을 기원하는 활짝 웃는 콘서트를 열기로 했다.
 
2. 시나리오가 아닌 현실 하나 <주한미군의 철수가 시작되었다>

지금부터는 더욱 박진감 넘치는 현실이다. 바로 주한미군의 철수가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올해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다. 주한미군의 철수가 시작되어 주한미군이 중립화, 무력화되는 첫 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 그러면 무엇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까.

결론은 이북의 `핵과 미사일`에 기반한 선군정치 중심의 강력한 대미압박과 이남의 효순이·미선이 투쟁에 기반한 대중적인 미군 철수운동 때문이다. 한(조선)반도에서 이를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정세는 그동안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지형인 조·미 불가침조약의 결과가 주한미군 철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최근의 주한미군 재배치와 감축 움직임은 남북의 강력한 대미압박에 따른 것이다. 주한미군은 마지못해 응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벌어보려 하지만 남북의 강력한 대미공세 앞에 주한미군의 철수일정은 더욱 구체화될 수밖에 없다.

`주한미군 철수`는 현재진행형

더불어 주한미군을 주둔케 했던 근거인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껍데기뿐인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의 전 단계인 북·미 불가침조약체계로 바꾸면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정전협정은 서서히 자기 생명을 다 하게된다. 그야 말로 휴전선은 금이 가게 되는 세계적인 의미를 갖는다. 한국전쟁의 진정한 전후처리의 시작이다.

세계 전후처리문제의 핵심인 `한반도 분단해결`에 세계의 눈과 귀가 쏠리고 있다. 1943년 봄 얄타에서 미·소·영 3거두의 만남은 강대국의 이권에 따라 기만적으로 끝났었다. 그러나 2003년 4월의 봄, 북·미·중 3자회담(실제는 북·미 회담)에서 이북은 미국에 맞서 세계적인 전후처리문제의 결산의 마지막 지역인 한(조선)반도문제를 판가름한다.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동안 1992년 집권한 클린턴 정권이 이북과의 군사대결이 무모한 짓임을 깨닫고 이북과의 교섭을 시작한 것은 1993년 5월 29일, 미국이 하와이 앞바다에까지 날아간 이북의 다단식 미사일 `노동1호` 시험발사 성공에 겁먹은 뒤였다. 이것은 북·미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3일 만인 6월 3일부터 11일까지 제1차 북·미 회담이 뉴욕에서 열렸다.

미국은 이북에 대해 핵위협을 중지하고 이북의 정치제도를 존중하고 남북 평화통일을 지지한다는 내용을 약속했다. 제2차 회담은 93년 7월 14일부터 19일까지 제네바에서 열렸다. 결국 1994년 10월21일 역사적인 북·미 제네바 합의서가 체결돼 이북`의 `핵문제`가 협상으로 타결되고 `정치 경제적 관계를 정상화`하기로 함으로써 북·미 관계가 평화체제수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미 북·미 제네바 합의서가 체결되기 6개월 전 1994년 4월28일에 이북은 외교부 성명을 통해 `새로운 평화보장체계`수립을 위한 대미협상을 처음으로 제의했다.

이북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화시키기 위한 공세적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그 중 하나가 판문점에서 북측에 있는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완전히 철수시킨 것이었다. 정전체제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나아가 1995년 6월 25일에는 정전협정 파기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남북이 함께 주한 미군철수를 압박한다

이북이 1995년 9월19일, 미국의 우드로 윌슨 연구소 수석연구원인 셀리그 해리슨에게 다시 새로운 평화체계의 방안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이어 1996년 2월 22일 이북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잠정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미국이 이에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북은 정전체제를 새로운 체제로 바꾸기 위해 주동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비무장지대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렇듯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해 이북은 대미 압력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미국은 대화에 나서면서도 늘 딴청을 부렸다.

그러자 이북은 노동1호 발사 때와 마찬가지로 미사일 발사로 이에 대응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1998년 8월31일에 인공위성 `광명성 1호`의 발사였다. 이는 세계의 군사역학관계를 한꺼번에 바꾸어 놓았다. 일주일 후 미국은 9월6일 조·미 회담을 급히 제의했다.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물밑교섭이 구체화되었다. 1999년 9월25일 이북의 백남순 외상은 뉴욕방문 기간에 미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긴장완화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미국이 결국은 철군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이겠다는 `정치적 결정`만을 공표하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한(조선)반도 전쟁과 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기 위한 전방위적인 이북의 공세는 핵과 미사일공세가 중심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페리 보고서가 나왔다. 99년 9월12일 베를린에서 진행되던 북·미 고위급회담이 타결되었을 때 페리 한반도 대북정책조정관은 "미국이 압력을 가한다고 해도 북의 정권이 붕괴되지는 않는다. 북의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노력 또한 무익한 일이다. 우리는 북의 현정권과 협상해야 하며 미국정부가 눈에 띄게 더 빠른 속도로 북과 관계정상화를 추구하도록 권고한다"며 이미 백기를 들었다.

2000년 6월15일의 남북공동선언으로 연방제 초기단계로 진입했다. 이어 클린턴 행정부 임기말인 2000년 10월12일 체결된 북-미 공동코뮈니케는 이 같은 북-미 대결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핵과 미사일문제를 놓고 평양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예견되어 있었다. 하지만 부시는 부정선거로 당선된 뒤 지금껏 대북 적대시정책을 고수했고, 2년 4개월여 동안 북·미 간에 밀고당기는 보이지 않는 전쟁은 이어졌다.

2001년 8월4일 북·러 모스크바 선언은 부시를 압박했다. 선언은 "북조선은 남조선에서 미군 철수가 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 평화와 안전보장에서 미룰 수 없는 초미의 문제라는 입장을 설명했다. 러시아 측은 이에 대해 이해를 표명했으며 비군사적 수단으로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8항) 주한미군의 전략적 철군 원칙을 강조하면서 전술적 감군을 더욱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서는 `새로운 평화체계`로 한발 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고 천명한 바 있다. 

9·11 테러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그 해 9월30일 4개년 국방정책 재검토(QDR)보고서에서 윈­윈 전략을 폐기하고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포기했다. 4개년 국방정책재검토(QDR)보고서의 요지는 ▲140만 병력 유지 ▲해외 군 배치 중심을 유럽에서 태평양으로 이동 ▲`윈-윈(Win-Win) 전략` 폐기 ▲`원-플러스(One-Plus) 전략` 채택 및 ▲미 본토 방위 등이다. 이와 함께 부시 행정부의 신 국방정책인‘럼스펠드 독트린’이 등장했다.

주한미군의 역할과 규모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럼스펠드 독트린은 가벼운 군사장비로 과거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정밀타격으로 속전속결 전투를 벌이는 군사전략이다. 부시정부는 집권 뒤 △주한미군의 감축 가능성을 시사한 해외기지 의존도를 낮추는 신속배치 능력 강화 이외에 △전략적 중심축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전환 △정보시스템 우위 유지 △전력의 기동화 경량화 등을 신 국방정책의 4개 원칙으로 삼았다. 4개년 국방정책재검토(QDR)보고서를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북·미 불가침조약은 주한미군 철수의 시작

이에 따라 미 정권의 두뇌집단인 랜드연구소는 이미 지난 2001년 5월14일 아시아 전략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동북아에 집중된 미군 전력의 동남아 분산 △괌을 아시아 중추기지로 활용 △오키나와 필리핀 베트남에 근거지 증설 등을 제안한 바 있다. 그 중에 주한미군의 보병 2사단과 2개 공군 전투비행대대 등 부대를 직접 거론하며 괌 등으로 옮길 준비를 촉구하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공룡같은` 미군의 배치를 좀 `가볍게` 이곳 저곳으로 나누는 전략일 뿐 주한 미군의 패퇴를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남북은 주한미군 철수를 더욱 압박했다.

2002년 10월25일, 이북은 외무성 담화를 통해 미국의 안보상 우려를 해결하고 싶으면 북·미 불가침조약을 맺자고 제안하였다. 이는 1994년 4월 28일 `새로운 평화보장체계`를 제안한 당시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한 단계 변화, 발전시킨 제안이었다. 미국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미국을 앞에 두고 이북은 강력한 선군정치에 기반한 대미 전쟁억지력과 대량보복 전략으로 이남은 노근리 미군범죄의 약점, 매향리 투쟁, 효순이 미선이의 주검을 껴안고 주한미군의 지위를 뒤흔들며 북·미 불가침 조약체계를 압박해왔다. 이는 정확하게 미국이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을 벌리는 힘보다 남북이 전쟁을 막는 힘이 더 세기 때문이다. 

이북은 제네바협정을 계속 어겨 온 미국에 맞서 2003년 1월10일 핵확산금지조약(엔피티)을 전격 탈퇴하였고, 이어 2월24일 오후 이북의 동북부 해안지역에서 동해 쪽을 향해 소형 지대함 미사일 1발을 쏜 바 있다. 3월초에는 8천개의 폐연료봉에 재처리작업이 마무리단계에서 성과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미국에 통보했다. 이북의 끝없는 `핵과 미사일` 공세에 부시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2월14일 럼스펠드 장관은 주한미군의 재배치 및 감축 방침을 공식 확인했다. 2월18일 주한 미 대사 토머스 허바드는 "한미 양국 군이 현대화된 만큼 새로운 역할 분담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며 주한미군의 역할 축소를 강하게 비쳤다. 이라크 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주한미군의 균열은 불가피했다.

4월9~10일에는 `한미동맹 정책구상공동협의` 1차 회의가 열렸다. 지난 2001년 5월14일의 미 랜드연구소 보고서에서 다룬 주한미군의 보병 2사단이전문제는 괌에서 한강이남으로 위치만 바뀌었을 뿐이다. 미국이 끝까지 대북 적대시정책의 핵심이자 동시에 이북의 주요 사정거리 안에 있는 미 보병 2사단을 한(조선)반도 안에서 위치이동만 하려고 하지만 머지않아 미 본토로 쫓겨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미국과 한국의 일부 여론이 떠드는 주한미군의 재배치는 결국 철수를 위한 몸부림이다. 4월21일 럼스펠드 장관의 `이북 정권 교체 메모` 파문은 이북과의 극적인 타결을 앞둔 미국판 벼랑끝 전술이다. 미국은 이북 앞에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이북을 협박(?)해왔다고 알리는 대외홍보용일 뿐이다. 추락하는 미국에 날개를 달아 줄자는 아무도 없다.

4년 안에 주한미군 전면 철수한다

그래서 주한미군의 재배치가 아니라 미 본토로 쫓겨가는 감축과 철수가 불가피하다. 이북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 시험 유예는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일정에 달려있다. 2003년 4월23일부터 열린 북·중·미 3자 회담은 이북의 거침없는 `핵과 미사일` 공세의 중간 결산판으로 보여진다.

이제 제네바 협정 마감시한인 2003년 10월21일을 앞두고 미국이 오히려 본토안전보장을 받기 위해서 전쟁을 접고, 한(조선)반도 꼬레아 연방으로 가는 북·미 불가침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주한미군에 의지해 목숨을 유지했던 기만적인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허울뿐인 정전협정은 사라진다. 이와 함께 주한미군 전면철수는 4년 안에 이루어진다. 북·미의 밀약에 의해서 말이다. 꿈이 아니라 칠천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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