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0년 남북관계 ①정치, 군사부문

박희진 기자(hjpark@tongilnews.com)


2000년 6월 13일 10시 37분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순안비행장을 내려선 순간은 남북이 대립과 불신을 청산하고 화해와 협력이라는 대장정을 시작한 출발점이자 한국 현대사가 새로 쓰여진 날이다.


또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 원칙과 1991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에서 합의한 남북화해와 불가침 선언에 이은 2000년 6.15 공동선언은, 남과 북의 통일방식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통해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사이에 공통점을 인정한다는 문구를 삽입, 상이한 체제와 사상을 뛰어넘어 남북관계의 미래지향적 통일방안의 길을 열어놓은 또 하나의 남북관계 이정표로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올해의 6.15 남북정상회담은 분단 이후 최초로 남과 북의 두 정상이 만나 세계사에서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으로서의 대립과 반복, 불신을 해소하고 화해와 협력을 통한 평화를 정착시키며 통일을 지향하고자 하는 의지를 만천하에 떨친 역사적인 사건으로 그 의미가 각별하다.

따라서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남과 북의 통일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최상, 최고였으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슴 벅찬 감동과 희열을 느꼈고 통일이 교과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일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 무엇보다 큰 변화였다.

또한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난 20년간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2박 3일 동안 보여주며 가장 큰 이미지 개선을 한 장본인이 되었다.

실제 정상회담 전인 5월 31일 리서치 앤 리서치(R&R)가 실시한 1차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김 위원장의 이미지는 `독재자`라는 답변이 34.6%에 달했으나, 보름후 실시된 2차 여론조사에서는 부드럽다(8.1%), 소탈하다(7.9%), 인상이 좋다(5.2%) 등 긍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답변한 응답자가 53.8%에 달했다.

이는 다시 말해 북한의 이미지 개선에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 정상회담 이후 북한 사회와 주민들의 생활에 갖는 관심도가 매우 높아졌음을 나타낸다 하겠다.

이처럼 6.15 남북정상회담은 대내적 의미뿐 아니라, 북한의 대외관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이어진 북미관계 개선조치나 북일관계, 대서방과의 관계개선에도 북한의 높아진 신뢰도가 매우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데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관되게 추진되어 온 김대중 정부의 `남북화해와 협력정책`은 이와 같은 남북관계 개선에서의 주도적 역할을 해냄으로서 다시 한번 대내외 자주적 통일세력들에게 뜨거운 관심과 기대를 받았다.

앞으로도 남북관계가 갖는 한반도적 성격, 국제적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지난 6월과는 달라진 대외적 상황변화에 맞서 이와 같은 입장은 더욱 튼튼히 견지되어야 하겠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갖기 전 누누이 강조해 왔던 것처럼 이번 남북 두 정상의 만남은 철저하게 현실가능한 사안들을 논의하고 또 논의사항은 현실화시키는데 초점을 두었다. 따라서 정상회담 이후의 남북관계는 각 부문과 영역에서 활발한 교류와 회담을 전개하여 올 하반기를 통째로 남북관계국면으로 몰아갔다.

이를 진두지휘한 것이 4차례 서울과 평양에서 열린 남북장관급회담이었다.

1차 남북장관급회담

주로 6.15 공동선언의 이행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장관급회담은 1차로 서울에서 7월 29~31일 2박 3일 동안 개최되었다.

남측에서는 박재규 통일부장관이 수석대표로, 북측에서는 전금진 단장을 필두로 한 회담은 장관급회담의 정례화, 남북연락사무소 가동, 8.15 남.북.해외 공동행사추진, 재일 조총련 고향방문 실현, 경의선 단절구간 복원 등을 합의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숨가쁘게 진행되었던 남북장관급회담은 1차 때 장관급회담의 정례화를 합의해 냄으로서 지속적인 남북 대화채널을 확보했고,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남과 북이 `경의선 복원`을 합의한 것이다.

특히 정상회담의 정신을 살려 공동이익 추구, 신의와 협력, 실천 중시의 평화.통일 지향적 대화로 이끌겠다는 의지가 충천해 남과 북이 서로 존중하며 이해하려는 태도가 매우 돋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2차 남북장관급회담

평양에서 가진 8월 29일~31일까지의 2차 장관급회담에서는 연내 2차례 이산가족 상봉단 교환, 군사당국자회담의 조속한 실시, 투자보장.이중과세 등 경협의 제도적 장치마련 실무회담 9월 개최, 경의선 복원 실무접촉 9월 개최, 백두.한라 교차관광 9월 실시 등을 합의했다.

2차 회담은 이산가족 상봉을 연내 2차례 더 실시한다는 방침 이외에도 생사확인 및 서신교환 등의 이산가족문제의 제도화를 위해 남측의 적극적 노력이 돋보였으며, 특히 경의선 복원을 위한 남북군사당국자회담을 실시키로 한 것은 분단 한국 역사상 최초의 일로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다.

1차 남북국방장관회담


9월 25~26일 제주에서 열린 남북국방장관회담은 한반도 분단을 물리적으로 지탱해왔던 남북간 군당국자간 최초의 접촉으로 북한의 김일철 인민무력부장과 남한의 조성태 국방장관이 주도하였다.

국방장관회담은 2개의 원칙적 내용과 3개의 구체적 내용에서 합의를 도출했는데, 남북한 군 수뇌부가 6.15 공동선언의 이행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1항),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영구적 평화수립을 위해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는 것에 대한 공동인식(2항)을 다진 원칙적 내용과 경의선 철도복원 및 문산-개성간 도로 복구 사업에 양측 군이 협력하고(3항), 정전협정에 기초하여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를 개방하여 남북관할지역으로 설정한다(4항)는 합의와 2차 회담을 개최하기로(5항)한 구체적 내용을 포함한다.

이후에도 2차례 군사실무접촉을 진행해 경의선 복원 및 도로 복구 사업에 대한 남북간 합의사항이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는 상태이며, 이는 남북경협을 가속화시킬 것으로 전망되고 이로 인한 남북 군 당국의 상호 협력이 향후 군사적 신뢰구축 마련에 기초가 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또한 군사분계선내 비무장지대의 이북지역의 관할권과 이남지역의 관리권이 확보되어 유엔사의 통과의례없이 남북이 주도적으로 공동관리하는 비무장지대는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체결요구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며 향후 남북평화지대로서 그 의미와 역할이 매우 기대된다 하겠다.

3차 남북장관급회담

의례적으로 제주도에서 가진 3차 장관급회담은 9월 27~30일까지 열렸으며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설치 합의, 교수.대학생.문화계 인사로 구성된 시범 방문단 내년초 교환, 내년 8.15 경평축구대회 개최문제 긍정 검토, 이산가족 생사.주소 확인 및 서신거래 등 논의 사항들을 서로 주고받았다.

남북관계 절정의 시기에 이루어진 3차 회담은 장관급회담, 적십자회담, 경협실무접촉, 군사당국자회담, 김용순 비서 남한방문, 각종 사회문화적 교류 등 남북이 새로운 대화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을 입증이나 하듯 각 부분의 교류가 활발히 제의되고 실천에 옮겨지는 시점에 맞춰 갈래를 정리하는 모양새를 가졌다.

그러나 봇물처럼 터져 나오던 남북간의 정치, 군사, 경제, 이산가족, 민간교류의 제의와 합의이행 절차는 남한내 `속도조절론` 논쟁으로까지 이어졌다.

더욱이 10월 초 전격적으로 미국을 방문한 북한의 조명록 특사에 의해 `북미공동코뮈니케`가 선언되고 이에 따라 남북합의 사항들이 이행에 차질을 빚자 남한내 보수세력에 의해 남북관계가 뒷전에 밀린다는 등, 대북한 저자세에 대한 비난이 일었다.

특히 이산가족 상봉과 함께 국군포로 및 납북자 문제해결에 대한 요구가 높았고, 2차 회담시 합의사항이었던 대북식량차관에 대한 정부의 은밀한 추진 역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4차 남북장관급회담


12월 12~15일까지 평양 고려호텔에서 열린 4차 장관급회담은 올 한해 남북관계를 총결산하고 새해까지 이어진 남북관계 일정들을 재조정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북미관계 개선에 잠시 일정이 미루어졌던 사이 남측에서 있었던 `주적개념 유지` `장 총재의 발언`등이 문제가 되어 북측과의 결산사업에 있어 팽팽한 신경전이 전개되었는데 장관급 회담이 거듭될수록 남과 북의 6.15 공동선언의 실천의지 만큼이나 팽팽한 신경전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2차 회담 때에는 막판 합의문 도출을 위해 박재규 장관이 함경북도를 현지 시찰중인 김정일 위원장을 한밤에 찾아가 접점을 모색했고, 3차 회담 때에는 양측의 수석대표가 심야회동을 통해 입장을 조율하며 비행기까지 붙잡아두는 광경을 연출했다.

그러나 이는 1차 회담 때 보여준 상호 이해와 협력의 자세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구태로서 성과를 내려는 조급함이나 일방의 입장을 관철하려 하기보다, 상대방의 조건과 단계적 실현 방법을 모색하는 현명하고 유연한 회담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2000년 6월 13일 남북정상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한 남북의 화해와 협력의 발걸음은 유난히도 바쁘고 숨가쁘게 달려왔다. 그러나 분단 50여 년이라는 길고 긴 시간은 바쁜 발걸음에도 성에 차지 않는 듯 남북에게 산적한 과제들만 제시하고 있다.

반면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도 각 부분의 회담의 성사되고 실무체계가 자리를 잡는 등 남북의 상호이해와 노력이 절실하면 할수록 못해낼 것이 없다는 교훈을 주었다. 또한 회담에 회담을 거듭할수록 이산가족이 만나고 방남, 방북 행렬이 이어지면서 상호 이해의 구체성도 더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정이 재조정되고 남북이 미진한 구석이 있더라도 상호 흡집내기보다 이해와 협조의 태도가 향후 무엇보다도 우선시 되어야 한다. 특히 무조건 쏟아내는 식의 사업전개보다는 중장기적 사업단계와 경중의 구별이 있는 교류협력 사업을 통해 거대한 남북 화해와 협력 프로젝트를 소음과 마찰없이 진행하는 정부의 중심있는 전개력은 보다 더 요구된다 하겠다.

앞으로 남북관계의 주요 전환점이 될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내년을 기다리고 있다. 남북한 평화정착의 주요 계기가 될 김 위원장의 방남으로 이제까지 남북관계 개선의 조치들이 더욱 빛을 발하며 통일의 길로 보다 깊이 나아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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