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포

여행을 다니다 보면 기분 좋을 때 가게 되는 곳, 외로울 때 가게 되는 곳들이 있다. 막막함에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일 때 갈만한 곳으로 한강다리말고 권할 곳이 있다면 승천포다. `미친다`는 것은 `밑을 친다`는 말이다. 미치지 않으면 새로운 도약이 불가능할 것 같을 때가 있다.  밑을 치고 세계적인 도약을 할 수 있는 상상력을 펼쳐볼 만한 곳이 승천포라고 생각한다. 철책에 심장이 꽁꽁 묶이고도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나는 승천포에서 보았다.

강화읍에서 강화고인돌이 있는 방향으로 가다가 송해면으로 가는 301번 지방도로 들어간다. 검문소를 하나 지나 계속가면 당산리라는 곳에 이르는데 앞에 또 하나의 검문소가 나타난다. 검문소 앞으로 고종 유적비라고 쓰인 입석이 서있다. 그곳에서 농로를 따라 철책이 쳐있는 바닷가로 계속가면 북녘땅이 보이는 철책앞에 이른다. 그곳에 고종 유적비가 서있다. 이곳이 고려 고종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에 천도하면서 첫발을 디딘 곳, 승천포이다.

철책 넘어 지척에 있는 건너편 이북에도 승천포가 있었다. 지금은 `주체조선`, `자주통일`, `백두명장` 같은 대형 선전판과 민둥산이 우리를 맞이한다. 전쟁전까지 이곳은 개성과 통하는 가장 가까운 나루터로 사람의 왕래가 빈번했고, 뱃사람들의 안녕을 빌어주는 명목으로 무당들이 많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이름이 당산리가 되었다. 강화군청에 있는 당시 지적도를 보면 빼곡하게 들어선 건물들에서 번창하던 나루터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철책이 있고 북녘땅이 보이니 이곳이 비무장지대라고 생각하기 쉽다. 현재 민통선으로 되어 있을 뿐 비무장지대는 아니다. 비무장지대가 아닌데 민통선을 두고 있으니 그것도 불법이다. 어쨌든 최근 강화군에서 이곳에 비석을 세우면서 이곳만은 당산리 민통선 초소의 검문을 받지 않고 들어갈 수 잇는 곳이 되었다.

지정학

강화도를 지정학적으로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해왔다. 지리적 조건이 정치적으로 민감하여 이것을 떼어놓고 보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더구나 정치군사적 충돌과 교류가 반복되면서 지정학은 역사적 법칙처럼 작동하게 된다. 그래서 지정학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부시의 `악의 추축국`(pivot) 발언도 지정학적 용어이다. 반테러전쟁은 이제까지의 지정학적 전쟁과 다른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실제는 지정학적 전쟁으로 전개되고 있다.

통일은 분단 전의 민족성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승천포는 비무장지대가 아니면서도 남북이 대치하고 있고, 몽골침략 이후 유라시아대륙 차원에서 지정학적 질서가 작용해온 곳이다.  따라서 과거의 지정학적 질서를 알면 통일시대를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듯 하여 승천포에 우리를 세운다.

강화도가 유라시아대륙 전체차원의 지정학 질서에 본격적으로 휩쓸리기 시작한 사건은 바로 몽골의 침입이다. 다시 말하면 고종의 강화천도는 한반도적 사건이 아니라 유라시아적 사건이었다. 그뒤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수호조약 그리고 현재까지 이 지정학적 질서는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고종이 승천포에 첫발을 내디딘 사건은 아직까지도 우리가 풀지 못하고 있는 지정학에 대한 숙제로 되어 있다. 강화 천도 당시 상황을 좀 자세히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하자.

고려의 무신집권자 최우가 몽골에 대한 항전을 이유로 개성의 도읍을 강화로 옮긴 것은 1232년 고종19년 7월의 일이다. 이 사건은 `려몽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천도론이 당정회의 격인 재추회의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232년 2월부터이다. 이것이 5월까지 결론을 맺지 못하고 계속 이어진 것은 반대론의 절대우세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가 지속되고 천도가 강행되다시피 한 것은 전적으로 최우의 독단적 결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화의를 주장했던 유승단은 말하길,

"소小로써 대大를 섬김이 옳은 것인데 섬김을 禮로써하고 사귐을 信으로써 하면 저희가 무슨 명목으로 우리를 곤욕하리요. 성곽과 종사를 버리고 해도에 숨어 엎드려 구차히 세월을 보내면서 백성으로 하여금 정장은 다 사살 당하고 노약자는 포로로 끌려가게 함은 국가를 위하여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항전을 전제한 개경 고수론자인 삼별초의 김세충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야별초지유 김세충이 문을 밀치고 들어와 최우에게 힐문하기를,

"송경은 태조때부터 역대로 지켜 내려와 무려 200여년이 되었습니다. 성이 견고하고 군사와 양식이 족하니, 마땅히 힘을 합하여 지켜 사직을 보위해야 할 것인데 이곳을 버리고 장차 어디에 도읍하겠다는 것입니까? 하였다. 최우가 수성책을 물으니 세충이 능히 답하지 못하였다.(고려사절요16)

유승단이 현실론자이고 김세충이 원칙론자였다면, 최우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집권유지에 이용하고 있었을 뿐이다. 각각의 의견이 그 상황에서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이 느껴지면서도 당시 어느 누구도 세계사적 구도를 읽고 대응하려는 전략이 없었다. 전술적 선택만 있지 전략적 대안이 없는 것이다. 고려는 뱃길로 유라시아대륙 남단을 오간 해양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경제교역에만 머물고 국제정치적 안목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물론 시대적 한계였으리라.

최우의 천도이후 대몽항전의 외양은, 굴하지 않는 고려 앞에 대제국 몽골이 30년이나 절절매며 진퇴를 거듭한 것으로 되었다. 수전에 약한 몽골군이 갑곶의 갯벌을 넘지 못했다는 것으로 강화의 지정학적 가치가 위세를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몽골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고려와 강화는 주전선이 아니었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진출하는 것이 제국건설의 우선순위였다.

이 당시에는 유럽정벌을 끝내고 앞마당인 중국의 금나라를 공격하던 시기였다. 때문에 고려에는 상대적으로 야만적인 몽골군의 병력이 집중되지 않았고 그때그때 응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몽골의 입장에서 이해가지 않는 것은 임금이 수도를 버리고 도망갔으면, 그 전쟁은 종결된 것으로 보는 것이 상식인데 고려는 임금이 없이도 민중들이 끊임없이 저항을 해온 것이다.

항몽기의 지정학

몽골인들의 정복과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제국의 건설자인 칭기즈칸이 북중국과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을 무너뜨리긴 했으나 이 지역들을 자기 제국의 일부로 삼아 직접 지배할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유목민의 아들이었고 그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초원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그의 원정은 `정복`이 아니라 `응징`을 위해서 실행된 것이었다.

중동과 러시아에 대한 몽골의 지배는 칭기즈칸 사후에 실현되었다. 그 배경에는 이 두 지역에서 전개된 상황과 몽골 내부의 사정이 있었다. 중동에서는 험준한 요새를 근거지로 삼는 소위 `암살자단`이 골칫거리로 등장했고, 러시아에서는 킵착, 불가르와 같은 유목민들의 활동이 몽골제국의 외곽을 불안하게 했기 때문에 이러한 반몽골세력을 분쇄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다. 한편 몽골의 군사귀족들도 가축만 풍성한 초원이나 칸의 직할지인 북중국과 중앙아시아가 아닌 새로운 영역을 정복하고 그 과실을 향유하기를 원했다.

결국 이러한 사정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정복이 추진되었고, 그것은 칭기즈칸의 경우와는 달리 `정복`과 `지배`로 이어졌던 것이다.

몽골이 고려를 친 것은 바로 이런 정책변화의 시점이었다. 징기스칸은 대륙을 경영하려는 자였기 때문에 그가 지정학적 사고를 안 했을 리 없다. 예를 들면 서하가 그렇다. 서하는 지금의 천산산맥 북쪽 실크로드인 천산북로에 위치했던 나라였다. 몽골과는 적이기보다 친구에 가까운 나라였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원근관계를 떠나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축인 서하 정벌을 첫 번째 사업으로 정한다. 원나라의 일본정벌도 일본자체의 정벌보다 남송과 고려를 전시상태로 계속 관리하려는 의도가 컸다. 미국이 주한미군을 주둔시키는 것이 일본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처럼...

고려에서는 이러한 몽골의 지정학적 구도를 읽고 있는 사람이 없었을까? 몽골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은 몽골의 인질로 가 있었던 원종이었다. 그러나 원종은 몽골 조정의 정보를 항몽전쟁에 이용한 게 아니라 제국의 눈치를 보며 왕위를 보존하는데만 활용했다. 이제 민중들은 몽골세력과 고려의 통치배들을 상대로 싸워야하는 난관이 조성되었다. 이때 항몽을 주도한 게 삼별초였다.

삼별초에 대해서는 군사정권시절 민족의 위엄을 떨친 항전사로만 기록했는데 그후 사가들은 삼별초가 최씨 무신정권의 하수인일 뿐이었다는 점을 부각하여 폄하하였다. 그러나 한 사물의 두 측면을 잘 보아야 한다. 분명 삼별초는 최씨 정권의 사병조직으로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몽고에의 투항을 거부하고 민중을 규합하여 진도로 옮겨가는 과정에서는 몰락한 무신정권의 잔당세력에서 민중중심의 항몽세력으로의 변화하고 있음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것을 부정하면 원종의 사대행각을 찬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는 하지만 당시 고려가 택할 수 있는 현명한 입장은 어떤 것이어야 했을까? 군사적 자위와 정통한 외교가 필요했다.

천도 전 상황을 보면 초적의 무리들이 최우에게 항복하고 나라를 위해 싸울 것을 결의한다. 최우는 이들에게 정식군대로서의 자격을 주고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최우가 자신의 권력유지만을 위해 천도를 강행하면서 이들 민중저항세력은 이탈한다. 그리고 독자적으로 싸운다. 처인성에서 김윤후가 사르타크를 화살 한방에 사살함으로서 적을 철수하게 하거나 귀주성에서의 항전은 백성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봉건통치세력의 첫 번째 오류가 이것이었다. 자기 살길 찾기에 바빠서 싸우고자 하는 백성을 배신한 것이다. 관군의 역량은 몽골군과의 싸움에서가 아니라 배신당한 민중들의 반란을 탄압하는데 소모되었다.

두 번째는 외교적인 측면에서 유라시아에서 고려와 같이 탄압받고 있던 국가와 공동전선을 펴서 몽골의 제국경영에서의 약한 고리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당시 고려 가까이엔 금이나 남송도 있었고, 또 일본도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 조정의 사정에 정통했던 원종은 왕위보존에만 이러한 정보를 활용했다.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위기에 대처하는 민족적 관점이 없었던 것이다.

현재 강화도를 둘러싼 지정학

신미양요를 시작으로 강화도는 유라시아적 지정학이 아닌 미주대륙을 포함하는 세계적 지정학의 대상이 되었다.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이래 세계제국을 건설한 나라는 미국이다. 자본주의 혁명으로 확장된 생산력을 소비할 시장을 찾기 위한 제국주의 열강의 경쟁시대는 2차 대전을 지나면서 미국의 단일패권 아래 평정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세계의 모든 대륙에 지배권을 실현했지만 유일하게 지배권을 관철하지 못한 대륙이 유라시아 대륙이다.

2차대전후로부터 향후 미국의 지정학적 사고는 바로 유라시아대륙을 둘러싸고 펼쳐진다. 미국은 유라시아를 지배하기 위해 두 개의 경계를 건설했다. 독일과 한반도의 비무장지대이다. 90년대 냉전해체와 독일통일 이후 유럽의 전선은 우크라이나로 옮겨졌다. 그것은 소련해체와 함께 우크라이나가 세계 3위의 핵무기보유국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1994년 이후엔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가치를 인식한 미국 등이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대한 이해관계를 천명하기 시작했고 미어샤이머의 핵무기 보존론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에 따른 폐리의 핵무기 철거론의 대립에서 폐리 프로그램이 승리한다. 에이젠시타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 무대가 됐던 오데사 항구와 세바스토폴 항구는 강화도와 지정학상 등가의 장소가 되었다. 오데사는 네스트르강, 부그강, 드네프르강 등 세 개의 주요 강이 흑해로 모이는 중심항구이며 구소련이 유일하게 흑해와 지중해를 통해 나가던 국제항구이다.

아프간전쟁 이후 이 전선은 이란으로 이동됐다. 이란의 문제는 아제르바이잔의 문제인데 아제르바이잔은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의 유전과 자원이 서구로 쏟아져 나오는 병마개 같은 곳이다. 아프간전쟁을 하며 미국은 러시아에 체첸을 양보했는데 아프간전쟁 승리 후 다시 아제르바이잔을 넘보는 것이다. 이란은 체첸분쟁에서 러시아와 공동의 이해를 가지고 있는 한 축이기 때문에 러시아 대신 이란을 제압함으로서 카스피해 유전과 러시아봉쇄 등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실현하려 한다.

반테러전쟁은 비대칭전쟁이라고 해서 이제까지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한 전쟁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전쟁으로 규정됐으나 미국이 전쟁을 수행한 방식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지정학전쟁이었다. 호랑이 사냥을 선언하고 고양이를 잡는 격이다. 아프간전쟁에서 미국이 실패했다면 전쟁은 이란으로 북으로 번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이 개입한 유라시아의 분쟁지역이 한반도에서의 전쟁과 다른 궤도 위에 서있지 않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미국의 유라시아대륙 패권에 맞서는 지정학적 대안들 

미국의 패권을 극복하려는 지정학적 대안들이 90년대 들어 여기저기서 제출되었다. 첫째로 아시아주의가 있다. 중국은 1992년 인민일보에 중화주의를 표방하면서 화교자본을 끌어들여 시장개혁을 실시했다. 그 뒤로 아시아주의가 가끔 나오고 있다. 이는 주로 일본, 한국 그중에도 일본을 염두에 둔 포석이다. 미일동맹이 깨지고 중일동맹이 성립되면 세계최대 경제강국의 동맹이 되는 셈인데 그러면 유라시아질서에 혁명적 변화가 온다. 미군이 더 이상 일본과 한국에 주둔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일본이 미국을 버릴 가능성은 많지 않다. 

다음은 반패권주의가 있다. 처음은 러시아가 미국의 팽창을 염려하는 중심국가인 이란과 중국을 묶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들 나라에 해줄 게 없어서 반패권연대는 전술적으로 끝났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에 의해서 추진될 가능성이 있다. MD등 미국의 패권주의 정책이 강화될수록 반패권주의의 응집력은 강해진다.

다음은 유라시아주의가 있다. 카자흐스탄의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러시아의 주도권을 반대하며 유럽과 아시아를 묶는 구상으로 제창했으나 힘은 없다. NATO로 상징되는 북대서양주의에 대항하는 유럽연합의 가능성도 강조된다.

이러한 유라시아 대륙차원의 문화정치적 연대는 계속 강화되고 모색되고 있다. 모두 미국의 패권과 독주를 막으려는 마음은 한결같지만 아직 미국만큼 강한 연대가 형성되진 않았다. 그러나 유라시아대륙에서 미국패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변수가 있다. 유라시아 동쪽에서의 한반도 통일과 중국통일, 서쪽에서 체첸분쟁 해결을 통한 아제르바이잔과 우크라이나의 러시아화, 중앙에서는 아프간전쟁을 통해 너무 깊이 들어온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러시아와 중국의 공동전선 형성이다.

미국이 아프간에 이어 이란, 이라크, 북을 악의 추축국으로 정했다. 북을 주목하는 것은 한반도가 통일되면 미국이 아시아에서 물러가야 하고 중일동맹이 현실화되어 미국을 결정적으로 타격하기 때문이다. 이란을 주목하는 것은 체첸분쟁에서 카스피해 유전과 러시아봉쇄 등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실현하려 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유라시아에서 패권을 포기할 때까지 우리는 이런 흐름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승천포에서 생각해 보는 지정전략

강화북부 바다는 정전협정상 비무장지대가 아닌 `한강하구수역`이다. 때문에 비무장지대를 기준으로 설치된 민통선은 불법이다. 이를 해제하는 평화운동을 벌일 필요가 있고, 이어 정전협정상 한강하구수역에 보장된 자유통항권을 찾는데 세계적 평화운동을 결집해 가는 운동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승천포를 분단이전의 승천포로 돌려놓는 것이다.

지자체 차원에서는 카스피해의 카프카즈지역의 고인돌 문화교류와 같은 유라시아대륙의 문화정체성 찾기와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도시와 교류가 필요하고, 정부차원에서는 한강의 항구도시적 성격에 주목하여 통일이후까지 내다본 한강하구개발을 추진하고, 지정학적 이해국들과 동맹관계를 다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지금은 철책선에 숨통마저 막혀 있는 승천포의 뱃길이 열려 1시간 걸음인 개성을 내 집 드나들 듯 하는 날. 통일은 세계평화의 지정학적 사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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