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섭(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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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온 나라가 북한의 핵문제로 떠들썩하다. 북한과 미국은 서로 강경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평화적인 해결을 원하고 있다. 주변의 강대국들도 자신의 이해와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다.

▶17일부터 세종문화회관 전시관에서 `북한 조선화 최고 화가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이런 와중에 YTN에서 주최하고 조선미술협회에서 주관한 `북한 조선화 최고 화가전`이 2003년 1월 17일에서 2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다. 새해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1월 중순에 북한관련 미술전시가 열리는 것은 퍽 이례적이다.

이번 전시는 조금 특이하다. 미국에서 화랑을 운영하고 있는 신동훈 대표가 북한을 수십 차례 방문하면서 수집한 작품을 전시한 것이다. 신동훈 대표는 팜플렛 인사말에서 북한의 작품을 수집하고 전시한 경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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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 훌륭한 화가들이 많이 있다면 북쪽에도 훌륭한 화가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 동안 북쪽의 많은 화가들과 접촉하면서 북쪽의 화가들이 남쪽의 화가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힘들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치열하게 예술혼을 불사르는 모습들이 감동스러웠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신동훈 대표가 개인 소장품을 모아 전시한 것이다.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그러니까 이번 전시는 개인 소장품을 모아 전시한 것이다. 일종의 민간교류인 셈이다.

전시 기획자의 말대로 선우영, 정창모, 김상직, 정영만 화백 등은 북한에 현존하는 최고의 화가들이다. 거의 인민예술가, 공훈예술가 급이다. 여기에 북한을 대표하는 `조선화`를 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한 화가도 있고, 나름의 방식으로 풍부히 발전시킨 화가도 있으니 `최고 화가전`이라고 전시 제목을 붙일 만 하다.

팜플렛에는 약 80여점이 수록되어 있으나 실제 전시한 작품은 40여점이다. 전시 참가자는 인민예술가 선우영, 조선화 이론가이자 인민예술가 정창모, 평양미술대학 교수 김상직, 1999년 사망한 인민예술가이자 노력영웅인 정영만(팜플렛에만 나와 있음), 2002년 사망한 공훈예술가 황영준, 운보 김기창의 동생 공훈예술가 김기만, 40대 초반의 젊은 공훈예술가 오영성이다. 

이번 전시에는 특별히 관심을 끄는 화가가 많다. 한때 북한의 5원짜리 화폐에 실린 금강산의 작가 정영만은 일본에서 개인전을 할 정도로 북한미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그렸다는 `강선의 저녁노을`이라는 작품이 유명하다.

정창모는 조선화에 대한 이론가로도 유명하다. 또한 2000년 8월 이산가족 1차 상봉단의 일원으로 방한했으며 당시 대규모 국내 개인전이 계획됐다가 작품의 진위문제 때문에 무산된 적도 있다.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지낸 김기만은 운보 김기창의 동생이다. 김기만은 형 김기창이 그림 그리는 것을 보면서  화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시된 작품은 모두 `조선화`이다. 조선화는 선명하고 간결하며 섬세한 화법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화 이론가 정창모는 조선화를 고구려 고분벽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고려, 조선시대 미술의 여러 장점을 접목시킨 형식이라고 말한다.

전시된 작품은 조선화의 여러 기법들을 볼 수 있다. 꼼꼼히 그린 세밀화 기법, 마치 붓을 단번에 휘갈긴 듯한 기법, 붓에 물기를 빼고 그린 갈필기법, 덧칠기법, 점묘법을 연상시키는 기법 따위가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기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작품을 꼼꼼히 살펴보기를 권하고 싶다.

전시된 작품은 거의가 풍경화이다. 여기에 동물 그림과 화사한 정물화, 얼핏 보기에 우리의 한국화와 거의 비슷한 꽃그림도 있다. 물론 참여 화가들이 풍경화나 정물화만 그리지는 않는다. 정치색이 짙은 주제화도 잘 그린다. 하지만 주제화는 외부로 거의 유출시키지 않는다.

작년에 615공동선언 기념 북한미술전에 전시된 몇 점의 주제화도 낙선작이거나 서명이 빠진 것이었다. 북한 최고 화가들의 여러 작품을 볼 수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역시 농익은 석류처럼 깊은 맛이 느껴진다.

▶王虎/선우영/120*160/조선화/1993 [자료제공 - 심규섭]

인민예술가 선우영의 작품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치밀하게 묘사하는 세화기법이다. 그러나 단지 사물을 사진처럼 똑같이 그리는 것은 아니다. 1993년에 그린 <王虎(범)>는 이런 선우영의 작품세계를 잘 보여준다. 세필로 꼼꼼히 그린 호랑이 털과 눈빛은 감탄을 자아낸다. 거기에 비해 배경은 쉽게 그렸다.

호랑이의 모양이나 표정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하거나 무섭지 않다. 마치 인자한 할아버지 모습이 연상된다. 이것은 호랑이를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사람들의 정서와 접목시키기 위해 왜곡, 축소, 과장 따위의 회화기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백두산의 깊은 밀림에서 우리 민족의 정기를 지켜주고 있는 산신령의 또 다른 모습이다.

▶참대와 매화/정창모/77*116/조선화/2002 [자료제공 - 심규섭]

<북만의 봄>처럼 항일무장투쟁의 사회성 짙은 작품을 그렸던 정창모는 최근작 <참대와 매화>를 통해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화라고 하지만 수묵화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색상이 거의 배제되었으며 먹의 농담과 강약만으로 화면을 표현하고 있다.

화면 앞쪽에 참대와 죽순을 강하고 힘 있게, 뒤쪽의 매화는 은은하게 그렸다. 알다시피 매화와 대나무는 난초, 국화와 함께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겨 그렸던 소재이다. 겨울 한파를 이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와 곧게 자라는 대나무는 현재 북한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단순하지만 강한 필선과 대비를 통해 시대의 흐름을 관통하는 대가의 풍모가 느껴진다.

▶백산의 수리개/김상직/132*54/조선화/1992
[자료제공 - 심규섭]

김상직은 조선화 몰골기법의 대가이다. 몰골기법이란 선묘를 사용하지 않고 곧바로 채색을 하며 형태를 나타내는 기법이다. 1992년 작 <백산의 수리개>은 소나무에 앉아 있는 독수리를 그린 것이다. 매우 빠른 필치로 불필요한 요소를 과감히 생략하면서 그린 수작이다. 예쁘게 다듬어진 여느 조선화 작품과는 전혀 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조선화의 깊이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로송청광/황영준/65*83/조선화/1991 [자료제공 - 심규섭]

공훈예술가 황영준은 주제화를 많이 그렸다. 하지만 풍경화는 조선화의 독특한 기법을 보여준다. 황영준 작품의 주요 기법은 형태처리를 선묘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점묘법과 비슷한 짧은 선과 점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1991년 작 <로송청광>은 이런 기법을 잘 보여준다. 황영준은 2002년 평양에서 사망하였는데, <로송청광>은 노화가의 열정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작품 제목 그대로 늙은 소나무에 푸른 광채가 나는 잎을 피우고자 하는 화가의 의지가 고스란히 보인다. 소나무 아래에는 화사한 분홍 진달래가 피어있다. 아마 노화가는 마지막 사랑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향의 가을/오영성/65*65/조선화/1996 [자료제공 - 심규섭]

오영성은 1964년 생으로 다른 화가에 비해 매우 젊다. 하지만 만수대창작사에서 조선화창작단 단장을 맡고 있을 정도로 유망주이다. <고향의 가을>이라는 작품은 우리의 정물화에 가깝다. 하지만 서양식과는 전혀 다르다. 맑고 간결하며 화사한 전형적인 조선화풍의 정물화이다.

전시회를 본 느낌은 작품이 우리의 입맛에 착착 달아 붙는 느낌이었다. 비록 체제나 사는 방식이 달라도 정서와 미감은 같기 때문이다.
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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