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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째 마당, 인간 불평등의 역사와 함께 해 온 남녀 불평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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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0.12.12  14: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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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은 삼대 독자란다./ 삼대 독자가 뭔지.// 명절날이면 현관부터 요란하다./ `영호야 영호야.`/ 친척들 목소리/ 나도 인사드릴라치면/ `영호한테 잘 해 줘야 한다.`// 어쩌다 영호 감기 걸리면/ 할머니 먼저 앓아 누우시고/ 엄마는 죄인이다.// 오늘도 동생은 오락에/ 나는 엄마 심부름인데/ 엄마 몰래/ 눈 째지게 째려보다가/ 마음속으로 꿀밤 콩이다.

이 글은 한 중학교 여학생이 쓴 것으로서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삼대 독자`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주위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이런 내용을 다룬 `아들과 딸`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끈 적이 있었지요. 아들과 딸 사이의 차별은 그만큼 우리들에게 아주 익숙한 이야기거리입니다.

현재 남녀가 평등해야 한다는 원칙에 드러내 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또 남녀가 평등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물론 지금 자라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는 남녀 불평등이 많이 완화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오빠나 남동생을 위해서 희생하는 누나나 누이동생의 이야기는 매우 흔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이야기는 거의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아들과 딸 사이의 차별은 완강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는 모양입니다. 오죽하면 중학생이 이런 시를 쓸 정도이겠습니까?

그런데 시대의 발전에 맞지 않는 왜곡된 의식이나 제도는 이전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우리에게 안겨 주는 법입니다. 시대 착오적인 남녀 불평등이 바로 그 경우이지요. 이제 남녀 불평등의 문제는 바로 성비 불균형이라는 희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10년에 이르면 성비는 무려 128.6에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남자 열 명 중 셋은 짝을 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과학 기술의 발전에 걸맞지 않은 시대착오적인 의식과 제도가 낳은 결과입니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여 임신중절이 가능한 것은 꽤 오래 전 일입니다. 그런데 덧붙여서 최근에는 태아 성감별까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태아의 성을 산모나 가족에게 알려 주지 못하게 돼 있습니다만, 그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서 이른바 선택적 임신중절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선택적 임신중절이 성비불균형의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조사 결과 밝혀졌습니다. 예컨대 첫째 아이의 출생성비가 106이라면, 둘째는 113, 셋째는 185, 넷째 이상의 경우는 무려 212에 이릅니다. 이것은 아들을 낳기 위해서 태아 성감별 결과 딸이라면 유산시키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비불균형이 계속되다 보면 역으로 여권이 향상되는 시대가 올까요? 글쎄요. 일부 여자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올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대다수 여성들에게 그것은 오히려 악몽의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녀 불평등은 남녀의 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남녀 불평등은 언제 무슨 까닭으로 생긴 것일까요?

남녀 불평등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에 대해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청동기시대를 다룬 부분을 보면,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여성은 주로 집안에서 집안일을 담당하게 되었고, 남성은 농경, 전쟁과 같은 바깥일에 종사하게 되었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이어서 생산의 증가에 따른 잉여 생산물의 축적과 사적 소유로 인해 빈부의 차와 계급의 분화가 촉진되었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이런 설명을 보면 지금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남녀 불평등은 청동기시대부터 비롯되었고, 그것은 사유 재산의 축적 및 계급의 분화와 같이 시작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사회는 어떠했을까요? 청동기시대 이후 여성과 남성이 하는 일이 구분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남성이 경제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전에는 여성이 경제 활동의 중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성은 채집 위주의 경제 활동을 했고, 남성은 수렵 위주의 경제 활동을 했는데, 채집은 적은 양이라도 항상적일 수 있지만, 수렵은 한번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어도 허탕을 칠 수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자식들은 어머니 밑으로 모여 살았습니다. 그래야만 먹을 것이 안정되게 보장되었으니까요. 이러한 사회를 우리는 모계사회라고 합니다. 모계사회에서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결혼도 일부일처제가 아니었습니다. 집단적으로 혼인 관계를 맺는 군혼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아버지를 확인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석기시대가 시작되고, 정착생활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기원전 6천 년 경 전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우선 기후 조건에서 빙하기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석기를 갈아서 다루는 기술도 많이 향상되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농경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남녀간의 경제 구실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앞에서 본 것처럼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남성 중심의 경제 활동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런데 모계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을 억압하거나 지배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성이 경제 활동의 중심이었다는 것뿐이지요. 이 때는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던 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대가 이후보다 더 좋았던 시대라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억압이라는 것은 사유 재산의 발생과 함께 시작됩니다. 사유 재산이 형성되지 못할 정도로 생산력이 미비한 때에는 억압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때는 다른 씨족이나 부족과 전쟁을 하여 이기더라도 포로로 잡아서 노비로 삼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노비를 먹여 살릴 경제 잉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것이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확실하게 구분되고, 다른 씨족이나 부족과 전쟁을 하여 이기게 되면 그들을 포로로 잡아서 노비로 삼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남성이 경제 활동의 중심이 되고,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제도가 탄생하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남녀 불평등의 역사는 인간 불평등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합니다. 물론 그 구체적인 모습은 시대와 나라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극악했던 가부장제의 모습이 우리 민족의 역사 내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청동기시대 이후에 인류의 역사는 불평등의 역사로 계속되었고, 그 중요한 현상의 하나가 남녀 불평등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녀 불평등의 해결을 인간 불평등을 해결한다는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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