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월미도

동인천역에서 내려서 월미도 가는 버스가 직접 있으니 월미도를 찾아가기란 쉬운 편이다. 지금은 인천 최대의 유흥가가 되었지만 잘 살펴보면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전적비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거리의 끝에 해군부대가 있어 월미도는 군사적 긴장과 유흥이 얽힌 참으로 묘한 곳이다. 서희가 부른 `월미도`란 노래가 있다. 사랑노래다. 북에서도 `월미도`란 제목의 노래가 있다. 월미도 전투를 그린 아주 서정적인 가락의 노래이다. 지금은 화려한 가로등에 묻혔지만 그래도 월미도는 노을이 일품이다. 50년전 월미도 앞바다에 밀려오던 맥아더의 상륙군을 상상하며 노을을 보는 것도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리라.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다. 경인가도가 건설되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강화에서 일어났을지 모른다. 신미양요까지 해양제국주의 세력이 선택한 수로는 오로지 강화해협이었다. 서울로 통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인천상륙작전 역시 지정학적으로 경기만의 중요성이 확인된 사건이었다. 월미도를 찾아온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상륙전이 미군의 전략에서 변화되지 않고 있기에, 전쟁의 위협이 계속 제기되는 현상황에서 미국의 한반도전쟁 전략을 되새기기 위함이다.

인천상륙작전

세계전사를 연구하다 보면 상륙작전의 효용성에 관한 논란이 여러 번 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주로 상륙작전의 복잡성과 어려움으로 인하여 손실율이 높고 성공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이유에서 제기된 것이다. 당시 인천상륙작전은 월미도 앞바다의 갯벌과 심한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에 합참에서 성공가능성을 1/50으로 평가했다. 그럼에도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고 미군에서 기동전의 원칙을 확인케 한 사건이 되었다.

기동전이란 흔히 이해하듯 전쟁양상으로서의 진지전의 반대개념이 아니다. 기동(Manuever)전이란 그보다 한 차원 높은 군사방법적 차원의 개념으로 적에 비하여 보다 유리한 위치에 부대나 화력을 이동시켜 적을 붕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 같이 물량과 군사력의 우위만을 믿고 정면대응 하려는 왜군을 향해 적은 화력이라도 적의 약점을 극대화시켜 붕괴시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정해진 공식이 아니라 틀을 깨는 과감한 사고와 대범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질서보다는 혼돈을 적극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을 요구한다.

김일성 사령관과 맥아더 사령관은 모두 기동전을 사고의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김일성 사령관의 경우 50년 8월 1일 수안보에 직접 진두지휘를 나서 낙동강 전선돌파가 군내부의 교조주의자들에 의해 소련의 대도로를 통한 기동작전에 치중된 것을 비판하고 산악이 많은 한국지형에 맞게 포위섬멸전을 펼 것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서부전선의 전력을 진출시키는 방안을 내놓는다. 북의 한 출판물에 의하면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선련합부대들이 당면하게 수행하여야 할 행동 방향을 제시하시면서 전선 서부에서 성과를 확대하고 있는 련합부대들이 재빨리 동쪽과 남쪽으로 진출하여 전선중부에서 저항하는 적의 익측과 후방을 타격하도록 해야한다고 가르치시였다. 사실 그때 전선사령부일군들은 주타격방향부대들의 공격성과를 확대하기 위하여 적들의 영향이 덜 미치고 있는 전선서부에서 아군부대들을 기동성 있게 움직일데 대하여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당시 북이 낙동강 전선에서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압박해 온 이유가 바로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1950년 8월 29일 입수된 인민군의 자료에 의하면,

적들은 서울을 점령할 목적으로 덕적도, 용유도, 영흥도 일대에 함선들을 입항 체류하고 있는바, 기회만 있으면 인천항의 기습상륙을 기도하고 있으며, 더욱이 적은 항공으로 인천시상공을 위협하고 있다.....본 대대는 해안 일대에 상륙하는 적을 해상에서 결정적으로 격퇴분쇄하며, 방어구역 우측은 염전으로부터 좌측은 월미도 제방까지다.

인민군은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이미 2주전부터, 유엔군의 작전을 간파하고 있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은 작전개시 3일전 AP통신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기자에 의해 미국 주요일간지에 보도되었다. 당시 북은 인천해안에 대해 콘크리트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상륙은 한달 가량 후에 있을 거라 판단하고 진지구축시기를 그 시기로 맞추었던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을 시찰한 후 대규모 요새를 착공한 흔적이 있었다고 술회하면서, 10월 11일에 공격을 했더라면 인천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작전 당시 인천에는 2천명 정도의 인민군이 있었다. 만일 인민군이 디데이까지 정확히 알았더라면 이 부대를 포함하여 경기도 일대의 인민군부대를 인천 주변으로 이동시켰을 것이다.  
인민군은 인천보다 낙동강 돌파에 더 힘을 싣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은 7월부터 예정되어 있었으나 북의 공세에 밀려 계속 디데이가 연기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맥아더 사령관은 밀리는 상황에서 소련의 종심전투이론을 방불케 하는 인천상륙작전으로 대응한다. 원산과 함흥에 대한 미국의 기만공격도 한달 가량 지속했는데 이를 통해 미군으로서는 인민군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북도 상륙작전에 대한 대략적인 판단은 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병력이 동해안지방과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고 타 지역에서 인천방면으로 병력을 증원했지만 미처 적절한 병력배치에는 실패하면서 인천 상륙을 허용하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미군은 인천상륙을 통해 인민군의 약점을 극대화시킴으로서 낙동강지역의 인민군 주력부대를 직접 싸우지 않고도 분산시켰다. 만약 낙동강 돌파가 인천상륙에 앞서 이루어 졌다면 미 합참의 비판처럼 인천상륙작전은 무모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궁극적인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기동전의 중요한 하부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속도와 결이다. 속도 있는 대응을 통해 틈을 벌리고 벌려진 틈을 메꿀 새로운 결을 누가 먼저 만들어 내는가 이다.
 
1950년 9월15일 미군은 심한 조수 때문에 공격을 두 가지로 나누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금이야 월미도가 섬으로 생각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한 갈래의 뚝길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 월미도가 인천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은 우선 해병대 1개 대대를 아침 일찍 월미도에 상륙시키기로 결정한다. 6시 30분 흐린 날씨에 제5해병연대 제 3대대 지휘관 타플레트 중령은 함포사격, 공중포격의 엄호를 받으면서 월미도로 들어갔다. 월미도를 수비하던 인민군 제 226독립해병연대도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월미도는 미군의 수중에 들어간다. 조수는 다시 순식간에 밀려나가 미 함대는 후퇴하여 갯벌위에 주저앉아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1871년 신미양요때 초지진에 상륙하던 로저스 함대가 만났던 갯벌을 맥아더도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본격적인 상륙공격은 오후 5시가 되어 만조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가능해 졌다. 만일 월미도에 1차 상륙한 해병대가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면 포사격이나 해군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조수가 다시 불어날 때까지 함대가 꼼짝 못하는 것이었다. 미군으로서도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미국 합참의 콜린스 장군과 셔먼 제독은 극동사령부를 찾아 맥아더에게 인천 대신 지리적으로 안전한 군산을 택할 것을 제안했다. 맥아더와 합참의 관계는 나중에 맥아더 청문회에서 서로간에 오간 수사와는 달리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맥아더의 합참에 대한 논평에서도 완곡하게 이러한 분위기는 표현된다.

나는 합참 본부와 나 자신과의 관계는 훌륭하였다고 표현하고 싶다... 만일 우리들 사이에 어떤 알력이 있었을지라도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극동의 군사정세 Military Situation in the Far East pt1, 13쪽)

51년 2월 일본을 방문한 클라크 장군이 그의 회고록에서 한 증언은 더 직설적이다.
 
"그는 합참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었다... 맥아더 장군의 해임은 그와 합참간의 불화의 견지에서 볼 때 반드시 예상된 것이었다."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From the Danube to the Yalu, 1954, 26쪽) 

첫부대가 해변을 공격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야 합참은 그 계획의 구체적인 세부사항을 알았다. 작전명령을 휴대한 스미스 중령은 "너무 빨리 그곳에 도착하지 말라"는 맥아더 장군의 언명으로 9월10일 아침에야 도쿄를 떠나 워싱턴에는 14일 11시에 나타났다. 인천의 9월 15일 6시30분은 워싱턴시간으로는 14일 17시 30분이었다

그가(스미스중령) 만나서 질문에 대답을 끝냈을 때 합동참모본부가 그 계획을 취소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
(미국합동참모본부사 한국전쟁 상 168쪽) 

맥아더와 합참의 대립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해군의 레이히, 킹, 니미츠 등의 인물과 항공대의 아놀드 같은 사람들은 아나폴리스 사관학교출신(해군사관학교)이며,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 출신인데, 이 두 세력은 스포츠, 정치, 전쟁의 전략 등에서도 많은 대립을 보여왔다. 심지어 미식축구가 어디서 열리는가에 대해서도 극심한 경쟁을 하는 사이였다. 맥아더는 이미 태평양전쟁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되던 43년부터 정치적 야심을 보였고, 전략적 측면에서도 육군중심의 운용에 집착하며, 전후 정치적 주도권에 대해서도 지극히 많은 관심을 보였다. 비록 예비선거에 떨어진 적이 있긴 했지만,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경력도 있었다. 도쿄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는 기자들의 각축장일 만큼 맥아더는 언론플레이에 능숙한 인물이었다.

맥아더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가운데 하나가 바닷가를 뛰어서 상륙하는 광경인데 이것도 사진기자들을 위해 포즈를 취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아이젠하워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태평양전쟁에서의 상륙작전과 함께, 미군의 군사적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80년대까지 이것은 신화였지 전략으로서 체계화되진 않았다.

전직 일부 국방장관들은 전략문제라는 것을 아예 무시해 버려 왔다...이오지마형 상륙작전에 대한 해병대측의 고집을. 그리고 항모작전의 전체개념에 대해 한번도 의심해 본적이 없는 것이 국방장관이다. 하기야 이들 문제들은 조사해 본다는 것부터 복잡하고 골치아픈 일이다.
(미 국방성과 전쟁술 The Pentagon and the Art of War 88쪽)  

독일은 기동전이란 개념을 개발했고, 소련군은 종심전투이론이란 개념을 개발했다. 그러나 2차대전까지 미국은 군사전략상 후진국이었다. 한국전쟁에서도 월남전에서도 미국은 자신들의 군사전략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는 미국군부에 대한 시민통제 전통에서 비롯된다. 군사전략을 짜는 것은 백악관과 국방부의 민간관리들이었다. 트루먼, 애치슨, 덜레스로 이어지는 시빌리언 그룹과 맥아더로 상징되는 군부그룹, 이 양대 축의 갈등과 협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미국군사전략 읽기의 초점이다.

미 군부는 월남전이후에야 자신들의 새로운 전략을 짜기 위한 새로운 인식틀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국가를 위해 싸우는 것이지 정부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군부가 새로운 사상을 중심으로 전략에서부터 작전에 이르는 스스로의 체계를 완성해 가는 출발은 역설적이게도 월남전이었다.

공지전과 5027작계의 발전

월남전 패전후에야 미국군부는 스스로 군사원칙을 수립하기 시작하여 82년 육군으로부터 제안된 공지전(Air-Land battle)개념이 작전술의 개념으로 채택된다. 전략-전술의 이분법체계가 전략-작전술-전술의 삼분법으로 체계화되는 계기도 공지전의 도입과 함께이다. 한국엔 76년 월남전에서의 패망과 함께 5027작전계획이 시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82년 이후 공지전의 개념의 도입에 따라 5027작전계획이 수정, 발전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참고로 공지전(Air-Land battle)과 공지작전(Air-Land Operation)은 서로 차원이 다른 개념이다. 공지작전이란 단적으로 공군과 육군의 합동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핵을 탑재한 전략공군을 제외한 전술공군의 근접항공지원(CAS)과 헬기부대의 지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에 비해 공지전은 기동전을 바탕에 두고 전선에서만 싸우는 것이 아닌 후방의 지휘종심까지를 전장으로 확대하여 사고한다.

작전계획5027은 북핵문제 때문에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인데 5027작전계획이 핵문제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니다. 미군의 전략은 미국의 세계정책에 영향을 받지만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가 구조적으로 정착된 나라다. 맥아더에 비해 애치슨이나 덜레스가 우위에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다. 모험적인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군부가 아니라 시빌리언그룹이었다. 군부는 전쟁을 알기에 반드시 이기지 않는 전쟁은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군부가 독자적인 군대사상과 교리를 개발하기 시작한 것은 월남전 이후이다. 이때부터 한반도에서의 작전계획도 수정을 거듭하며 체계화되어 왔다.

1970년대 중반이전에는 북의 남침에 대해 불가피할 경우 서울을 포기하고 서울 이남지역으로 후퇴했다가 미 증원군이 투입되면 단계적인 반격을 펴 휴전선 이북지역으로 격퇴한다는 소극적인 개념이었다. 남측은 이에 대해 서울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미측에 여러 차례 강력하게 건의했었다. 월남전 패망을 계기로 70년대 중반 이후에는 북의 진격을 반드시 고려하고 서울 이북지역에서 방어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80년대 들어 한­미작전계획은 북에 대해 더욱 강력한 응징이 필요하다는 일부의 비판과 미국의 공지전개념(Air­Land Battle)을 수용함에 따라 보다 공격적인 성격을 띠게 됐다. 북이 선제공격을 해오면 그와 동시에 공군기와 특수부대를 동원, 이북지역의 주요시설물을 공격하고, 미 본토에서 대규모 증원군이 도착한 뒤 반격작전을 펼 때에는 대규모 상륙부대를 이북 후방지역에 상륙시켜 큰 타격을 가한다는 내용이었다.  82년 5027작계에 공지전이 도입되면서 핵전쟁교리가 적용됐다고 해서 시끄러운 적이 있었다. 83년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핵전쟁을 가정한 팀스피리트가 실시되었다고 하여 우려는 더욱 확산됐다. 이때는 핵을 우위에 둔 기동이 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미연합사가 이같은 응징보복전략을 5027작계에 포함시킨 것은 87년쯤이지만 그전엔 공개되지 않다가 북­미 핵협상이 교착되고 한반도 위기설이 나돌면서 일부 내용이 미언론에 간헐적으로 보도된다. 이때 5027작계는 5단계로 소개됐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① 신속전개 억제력 배치­전쟁예방
② 서울이북 남침저지­북 후방 파괴
③ 주요전력 격멸­대규모 상륙작전
④ 평양 고립화­점령지역 군사통치
⑤ 종전 이후 한국주도 한반도 통일

이제는 많이 알려졌지만 작전계획5027에서 50은 태평양사령부를, 2는 한반도를, 7은 작전번호를 의미한다. 참고로 소련에 의한 홋카이도의 피침을 상정한 작전계획은 5051, 일본은 5052. 중동은 5053. 그러니까 아프간전쟁은 5053에 따라 전개된 것이다.

5027작계에서 소개된 단계는 시간상의 전개순서라기보다는 큰 틀을 제시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공지전의 원칙에 따라 북의 후방까지를 확대된 전장으로 보며 기동한다는 원칙을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해석되는 것이 옳다.

90년 걸프전에서 승리했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린 미 군부는 핵전에서 재래전을 전쟁양상의 중심으로 수정한다. 그 뒤에 언론을 통해 소개된 5027작계는 재래전을 중심으로 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미군은 걸프전을 통해 월남전 패배의 늪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체계를 완성되면서 일대변화를 맞이한다. 표면적인 가장 큰 변화는 핵정책의 포기다. 겁이나 주다가 써보지도 못하는 핵대신 현실적인 재래전략의 채택한 것이다. 이는 걸프전승리를 통해 군부의 재래전 중시사상이 확인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주도자는 콜린 파월이었다.
 
91년 전술핵 철수 선언이 있었고 작계5027은 수정되는데 이때 5027의 쟁점은 어느 정도까지 북을 공격할 것인가 하는 `목표` 문제였다. 한국전과 같이 중국의 참전여부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신중을 기하는 문제였다.

이 목표 문제는 지난 90년 리스카시가 한­미연합 사령관에 취임한 뒤 한­미작전계획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하면서 제기되기 시작, 한­미군간에 협의가 시작됐으나 한때 양국이 의견차이를 보이다 결국 양국은 지난 92년 평양을 점령 또는 고립시키고 평양 이북지역의 진격 여부는 상황에 따라 단계적으로 결정하되 북정권을 붕괴시킬 정도로 공격, 한국주도의 통일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합의에 이른다.

한­미 양국이 약 1년간의 연구 검토 끝에 93년 수정한 이 작전계획에 따르면 양국군은 첨단 조기경보수단을 활용, 북의 전쟁 움직임을 최소한 1∼4일전에 파악해 일본 및 태평양 주둔 미군을 비롯해 미 본토의 병력과 장비까지도 단계적으로 투입해 북의 전쟁도발기도를 사전에 막는다는 신속전개억제(FDO : FlexibleDeterrenceOption) 전략개념이 합의된 데 따른 것이다. 93년 게리 럭 사령관이 취임한 이후 이를 더욱 강화한 「전투력증강(FE : Force Enhancement)」개념을 구체화한다. 이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에이타킴스(ATACMS)」 신형지대지미사일, 각종 탄약 등 북이 남침했을 경우 전쟁발발 초기에 꼭 필요한 핵심 무기 및 장비들을 한반도에 긴급 배치해 북한의 전쟁도발을 사전에 막는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신속전개억제전력」은 외교적인 조치를 포함하는 다소 광범위한 개념인데 비해 「전투력 증강」은 군사적인 면에서의 실질적인 전쟁예방 조치에 속한다. 핵 대신 발달된 조기경보수단으로 전쟁을 미리 예보하고 단계별로 증원군을 파견한다는 것이 이 수정계획의 핵심이다. 이것은 94년 6월 전쟁위기때 시험을 받게된다.

가상의 한국전쟁 시나리오에서 북한측 역할을 맡아온 미 국방부의 아시아 군사문제 전문가 폴 고드윈은 한국전쟁이 발발할 경우 북은 1.서울 점령 후 평화적인 타결을 모색하거나 2.서울을 우회해 속전속결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두 가지 전략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북이 어느 쪽을 택하든 미국은 24∼72시간의 여유밖에 없어 걸프전 때와 같은 신속한 군사적 대응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군사적 승리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에 따라 북에서 걸려온 카터의 전화와 함께 전쟁시나리오는 마지막 순간에 포기됐다.
 
한미 양국군은 95을지포커스렌즈 훈련에서 이 「전투력 증강」전략을 시험, 「신속전개억제전력」의 경우보다 많은 전폭기 등을 한반도에 전개해 북의 가상남침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는 훈련을 했다.

96년은 국방예산저하와 군축압력과 함께 페리의 군개혁프로그램이 진행되던 시기로 주일미군의 주력부대인 오키나와 주둔 제3해병원정군(기동전개부대·제7함대 소속)의 성격이 전선전투에서 후방지원쪽으로 변화했다.
 
99년까지 재직한 존 틸럴리 주한미군사령관이 98년 방한한 국방장관에게 새로운 작계를 브리핑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그가 인사청문회부터 시종일관 TMD추진을 주장해온 것으로 봐서 TMD를 북을 제압할 기동의 중요 요소로 설정했으리라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상륙작전교리가 기동의 중요한 요소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국은 역시 상륙작전교리를 적용한다는 말이 된다.

3단계가 바로 상륙작전인데 5027이 방어개념이 아닌 점령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 이 단계에서 보다 구체화된다. 서해의 남포와 동해의 원산으로 상륙하여 평양을 점령한다는 것이 가장 상식적인 판단일 것이다. 이중에서 전략적 비중은 당연히 남포가 높다. 평양으로 직접 진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포는 평양을 가로지르는 대동강이 서해로 빠져나가는 곳이다. 서울과 강화, 인천과 구조가 비슷하다. 비무장지대의 화력은 어차피 양쪽이 비슷하기 때문에 교착될 우려가 있고 결정적인 공격은 상륙작전에서 승부를 건다는 것이다.

99년 코소보 전쟁과 연이은 서해교전을 계기로 군부에선 클린턴의 윈-윈 전략폐기 움직임이 가시화된다. 이때 미국은 북이 화생무기 공격을 감행할 경우 핵무기로 대응한다는 신핵전략을 채택한다. 마침내 부시 정부하에서 2001년 미 국방부는 `윈윈’(win-win)전략을 수정·폐기함으로서‘작전계획 5027’의 전면적인 수정을 예고하게 된다. 그 내용은 진행과정에 있고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미국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에 따르면 미 국방부는 가까운 장래에 미국이 관련되는 대규모 국지전이 발생할 가능성이 가장 큰 곳으로 중동이 아닌 한반도를 꼽고 있다.

또한 럼스펠트 국방장관은 시나이에 주둔하는 미군을 감축하고 북의 갱도공격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지하침투용 핵탄두 개발을 지시하고 있다. 5027이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받을 경우 한반도 전쟁위기설은 미국언론의 흐름과 관계없이 미군에서 내재적으로 준비되는 실체가 될 것이다. 즉 TMD와 신핵전략 등 현재 급속히 추진되고 있는 군사적 우위가 달성되면 한반도 전쟁을 현실화시킬 가능성이 많아졌다.

상륙작전에 대한 북의 대응

북은 어떻게 대응을 하고 있을까? 뚜렷한 한계가 있지만 우선 상륙작전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88년 이후 북의 군단 배치에서 특징적인 것은 상당히 후방에 포진하고 있는 제425기계화군단(정주)과 제10기계화군단(오로)이라고 할 수 있다. 평양 이북의 해안지역은 지형상 대규모 상륙작전을 펼치기에 적합하지 않는 지역이다. 그러나 근래 미국 해병대의 공기부양정전력의 확대와 OMFTS(Operational Maneuver From The Sea : 바다로부터의 작전적 기동은 기동전의 기본원칙을 기초로 바다를 장애물로 간주하던 종전의 개념에서 탈피해 바다를 기동공간으로 간주하여 주 전투력을 작전적 목표에 집중하며, 적을 압도할 수 있는 공격기세를 창출함으로써 수평선 너머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전투력을 투사하는 방법) 작전개념의 발달에 따라 평양 북방의 서해안도 상륙전의 대상이 되었다. 이 경우 제425기계화군단이 중요하다. 한편 한국전쟁시 맥아더의 UN군이 평양 북방의 숙천지역에 공수작전을 펼친 경험에 대비 대공수방어를 목적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제425기계화군단이 비록 T-34 같은 구식 전차를 보유한 군단이라 해도, 공수부대에는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동해의 오로에 있는 제10기계화군단(94년 이후 제108군단)의 경우 지도를 보면 대상륙방어가 주목적임을 상식적으로 판단 가능하다. 99년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이 해·공군 병력 1만3천여명을 늘리고, 잠수함과 공기부양정을 증강시키는 등 기습공격 능력을 대폭 강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은 지상군 3천명을 줄였으나 해·공군 병력을 6천명,7천명씩 늘렸으며 잠수함과 공기부양정(LCAC)을 10여척씩 증강시켰다.

상륙전과 관련 북의 군체계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그간 가장 비중이 약했던 병과인 해군에서 인민무력상이 나온 점이다. 김일철 국방부위원장이 바로 그인데, 행정상으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바로 밑의 서열 2위이다. 물론 국방위원회의 구조로 볼 때는 정치담당인 조명록 차수보다 서열이 낮다. 이는 남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인민무력성에서 해군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군에서 타지역전쟁 발발시 가장 먼저 배치되는 부대가 해병원정대이다. 해병원정대는 3개가 있는데 1,2해병원정대는 미국에 있다. 그러나 제3해병원정대는 오끼나와에 있다. 이것은 한반도의 위기상황에 대한 미국의 의식을 잘 보여준다. 미국에서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는 것이 유리한 북으로서는 초기전쟁과 상륙전에서 이들 해병을 제압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해군의 중요성이 강조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의 힘과 평화의 힘

북핵문제로 94년6월, 금창리 지하핵시설문제로 98년, 서해 북방한계선문제로 99년 전쟁의 위기가 있었다. 90년대는 전쟁위기에 시달려서 우리는 전쟁이라면 양치기소년 얘기처럼 불감증에 걸린 측면도 있다. 미 군부가 국방예산을 올리기 위해, 또는 정치적 위기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전쟁위기를 조장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국방예산이 올라가면 군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전쟁과 멀어지고, 정치국면 돌파용 전쟁은 그레나다침공부터 코소보전쟁까지 거의 다 실패했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키려는 사람들은 이런 계기마다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며 철저한 준비를 해왔다. 정치적 의도와 군사적 준비가 맞아떨어지도록 할 수 있는 제도도 발전시켰다. 이제는 이들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어가고 있고 행동을 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이 결코 불가항력은 아니다. 우리는 전쟁력에 대해 전쟁을 압도할 수 잇는 평화력도 만만치 않게 성장시켜왔다. 94년엔 남측에 완전비밀로 한 채 미군의 증원군을 침투시켰었고 미국의 결정만으로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통일의 힘과 평화력을 키웠고 쉽게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강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통일과 평화의 기운은 전쟁기획자들에 의해 계속 위협받고 있다. 평화의 힘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위한 작전계획처럼 평화를 위한 작전계획이 있어야 한다. 전쟁계획은 남북을 갈라놓으려 하지만 평화계획은 남북을 껴안도록 하는 계획이다.

전쟁계획은 피를 부르지만 평화계획은 즐거움과 감동을 부른다. 금강산관광이 퍼주기 식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지만 전쟁에 의해 치를 비용에 비하면 오히려 저렴한 비용일 수 있다. 이런 것이 바로 평화비용이다. 또한 일반인까지 북의 아리랑축전 같은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평화를 위한 대규모 상륙전 연습이다. 전쟁이 날 때 천안문의 탱크를 저지하듯 대규모 인원이 비무장지대에 텐트를 치고 탱크를 가로막고, 남북의 주민들이 남포항에서 월미도에서 상륙함을 막으며 남북이 서로 끌어안는다면 전쟁계획은 수정된다.  

다시 월미도에 서서      

다시 월미도로 돌아가 보자. 월미도에서는 어떻게 평화력을 키워갈 수 있을까?

월미도 문화의 거리 끝에 있는 횟집은 구석진 자리에 있는 죄로 중심가보다는 아무래도 값이 헐하다는 소문이다. 이곳에서 술 한잔에 평소 구경도 못해 볼 회를 먹고 나오면 군부대의 담벼락과 만난다. 식당에 들어갈 땐 보이지 않던 군부대 담벼락이 식후경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해군2함대사령부소속의 부대다. 이들 부대는 월미도를 찾는 사람들에게 인천상륙작전의 군사적 추억을 되살리게 한다.

평화의 시대에 전쟁의 기억은 퇴행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반성과 극복의 대상이지 기념의 대상은 아닐 것이다. 원래 해군은 진해에 모두 통합되어 있었는데 80년대초 작전계획 5027이 소개되면서 동해에 1함대사, 인천에 2함대사, 부산에 3함대사로 분할되었다. 이는 미군의 전방방어개념을 오역한 결과 일어난 것인데 전방방어개념(Forward Defense Concept)의 원개념은 미국본토에서 가급적 먼 지역(전방)에서 적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해외주둔군은 결국 미국의 본토방위를 위한 것이다.

한국군은 당시 「본토가 아닌 지역」의 뜻을 갖는 「전방」을 「휴전선에 가장 접근한 지역」으로 오역했다. 그 결과 기존의 방어개념을 방어위주에서 공세적으로 변경키로 하고 휴전선에 보다 많은 병력을 펼치면서 해군도 휴전선 인근으로 추진된 것이다.
그러나 인천 2함대사령부의 경우 북의 2백40㎜ 방사포의 사정권에 든다. 이같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기지앞에 섬과 운항상선, 어선들이 쳐놓은 그물들이 많아 이들 장애물을 피하며 작전지역으로 출동하는데는 무려 2∼3시간이나 소요된다.

인천함대사가 이곳에 있는 것은 미군 의존정책이 불러온 결과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평가일까? 비자주적이고 비합리적 요소는 군내부에서도 검토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천 최대의 문화의 거리로 거듭나고 있는 월미도의 밤거리는 술에 취한 사람들도 있지만 제 나름대로 춤을 추고 거리전시회와 공연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전쟁이 상륙했던 자리에 평화가 상륙하고 있는 것이다. 월미도 문화의 거리를 잠시 걷다가 어둠이 내리는 서해를 보며 평화의 상륙작전을 구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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