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한글날이 되면 우리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한글을 찬양합니다. 한글이 매우 우수한 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한글은 우리말의 음운 체계와 말소리 현상의 특성을 훌륭히 반영한 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말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의 말이라도 거의 옮겨 적을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라져 가고 있는 소수 민족의 말을 한글로 표기하자는 제안이 나올 정도입니다.

또한 그 원리가 체계적이고 과학적이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 어느 민족의 문자보다 훌륭한 글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글입니다. 한글을 문화 유산으로 갖고 있다는 것은 정말 우리 민족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뛰어난 한글이 창제 이후 숱한 푸대접을 받아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한글이 얼마나 푸대접을 받아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현장을 한번 살펴볼까요?

노원구 하계동에 가면 `한글고비`라고 하는 서울특별시 지정 유형문화재가 있습니다. 이 비는 1536년에 세워진 것으로 조선 중종 때의 문인인 이문건이라는 사람이 아버지 이윤탁과 어머니 고령 신씨를 합장한 묘 앞에 세운 비석이라고 하는데, 한글이 새겨진 것으로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듣고 이 비를 찾아가 본 사람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면을 봐도 뒷면을 봐도 온통 한자뿐입니다. 왼쪽 옆면을 봐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오른쪽 옆면에 눈을 돌리면 비로소 한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씌어진 한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풀이해 보면, 이것은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라, 이 비는 신령스러운 비인데 훼손하는 사람은 재앙을 입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글`은 무엇이겠습니까? 한자를 일컫는 것이겠지요.

한글은 글도 아니고,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기 위한 표기 수단이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훌륭하며 과학적이라는 한글이 그 글을 만든 민족으로부터 고작 이런 대접을 받았던 것입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요.

생각해 보면 이러한 푸대접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한자를 써 왔기 때문에 당장 한자를 없애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글 전용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현재 어떻게 한자 사용을 줄여 갈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한자를 써야 하는 것을 지상 목표로 내세우는 사람들이 이른바 지식층들 속에서도 꽤 많이 있습니다. 더욱이 일본인이나 중국인들을 위해 한자를 써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기는 멀쩡한 우리말을 두고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사람도 많은 판에 그런 일이야 이상할 것도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한글이 왜 푸대접을 받아 왔고, 지금은 왜 푸대접을 받고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왜 사람들은 겉으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한글을 칭찬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한글 창제의 취지를 자주, 애민, 실용 정신의 구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종대왕이 직접 썼다고 하는 훈민정음의 서문인 어지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지의 맨 처음에 나오는 `우리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의 부분을 자주 사상의 구현으로 말합니다.

당시와 같은 시대에 중국과 우리 나라의 말이 다르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힌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글 창제의 취지를 자주 사상의 구현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점을 세종의 민족적 자각으로까지 확대 해석하는 것은 성급한 생각입니다. 물론 세종이 중국과 우리 나라가 다른 나라라는 것을 어떠한 임금보다도 강하게 느꼈던 사람이었다는 근거는 많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그는 명나라에 대해서 `지성사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라고 한 것을 그의 자주의식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는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괴리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점을 이해했고, 그런 점에서 뛰어난 언어철학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명나라에 대한 자주를 확고하게 인식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명나라에 대한 자주의식은 고려 시대 때 중국 대륙의 국가들과 투쟁을 거치면서 민중 속에 형성된 의식이고 그것이 세종으로 하여금 이러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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