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키부대는 1951년 1월 말 백령도로 피난한 황해도 주민 중 청년 1,000여명을 선발해 구성됐다. 동키(Donkey)는 당나귀란 뜻인데 유격부대들에 미군이 지급한 `앵글로 9` 무전기의 모양이 당나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창설 당시 동키부대의 활동영역은 압록강 하구의 대화도로부터 한강하구의 강화도에 이르는 서해 30여개 도서 전체와 구월산, 멸악산 등 황해도 내륙까지 뻗치는 등 북부 서해안 전역을 담당했다.

1951년 10월 정전위에서 북은 옹진반도를 포기할테니 철원을 내주고 군사분계선을 원래의 3.8선으로 하자는 제안을 하지만 미국측은 옹진반도에 대한 방위의 어려움을 들어 거부한다. 그런데 51년 11월부터 김일성 인민군 총사령관은 유격부대의 서해안 기습작전을 방지하기 위해 다섯 차례에 걸쳐 인민군 1개 군단과 2개 사단에 `도서해방 전투명령`을 내려 경계했다. 52년 1월 북이 미국에 대해 황해도와 서해지역에서의 철수를 요구하자 미국이 이에 반대하며 군사분계선 설정을 거부한다. 미국의 이러한 반응은 동키부대의 전과와도 연관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동키부대는 한국군의 정규부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쟁후에도 보훈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최근까지도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했다. 이들의 전과나 존재는 입소문을 통해서는 알려졌지만 미 국방성의 기밀문서가 해제되기 전까지 이들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군사의 자주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죽을 고생을 하고도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에 대한 교훈을 동키부대는 전하고 있다.

동키부대가 미8군 산하 유격대(비정규전 부대)로 만들어진 것은 51년 2월과 3월 사이이다. 그러나 이미 이들은 백령도와 황해도 구월산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을 지원한 것은 KLO부대였다. 그러니까 KLO부대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다가 미8군 비정규전 부대로 된 것이다.

KLO부대는 무엇인가? 맥아더는 49년 중공과 북의 동태가 수상해짐을 느끼고 G2(맥아더의 정보참모) 부장 월로비를 시켜 KLO(Korea Liaison Office, 한국전쟁 후에는 8240부대로 개편) 부대를 만든다.

그런데 이 켈로부대는 미군들이 아니라 대부분 한국인들이었다. 어떤 한국인들이 여기 참여했는가? 백의사란 단체가 중심이 된다. 백의사는 48년까지 미군방첩대, 일명 CIC의 지시와 연계되어 있던 백색테러 단체이다. 46년에는 김일성 주석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도 이 조직이 주도했고 백범 암살범인 안두희도 백의사 조직원이었다. 그러나 남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할 일을 잃고 해체되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1949년 2월 한 인사가 백의사의 대표인 염동진(본명 염응택)을 찾아와 맥아더 사령부 월로비 소장으로부터 북한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라는 극비명령을 받았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이때 백의사는 남아있던 잔존세력을 모아 49년 6월1일 맥아더 사령부의 한국연락사무소(Korean Liaison Office, 약칭 KLO)를 설립하는데 중심이 된다.

이들은 대부분 이북지역의 반공청년들이었기에 대북사업에 투입되게 되고 전쟁전까지 황해도 평안도지역에서 정보염탐 및 테러유격작전을 편다. 남에서 미군전투병력이 철수 완료된 후인 1949년 7월부터 KLO조직을 완료하고 훈련을 마친 첩보요원들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활동을 개시한다. 엄청난 규모의 정보요원들이 한반도는 물론 중국, 만주, 소련의 연해주까지 포괄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주요 작전임무는 부대.전술시설.수송수단, 행정.보급.저장시설에 대한 공격과 함포 관측 등의 정보활동, 그리고 통신시설장비 파괴, 심리전용 물자배포 등이었다.

전쟁은 6.25이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때문에 6.25전쟁이란 말은 맞지 않다. 국내외에서 공인된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49년이면 약속된 미군정이 끝나면서 미군이 철수했던 때인데 어떻게 이런 부대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당시에 극동군 사령관은 맥아더였는데 미군정이 철수했으므로 그의 관할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때문에 한국에서 첩보활동을 한 것은 불법조직을 운영한 것이다. 때문에 동키부대원들은 자신들을 켈로부대 소속이라고 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전쟁에서 미군이 참전결정이 나기 전까지 이들의 활동은 불법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비밀에 부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G2는 어떤 정보조직과 연관이 되어 있었을까? ASIS(미공군첩보부대)와 유엔사극동사령부 산하에 캐논첩보기관, 일명Z 등 여러 정보조직이 있었지만 CIA가 가장 큰 조직이었다. CIA는 47년도 미국의 국가안정보장법에 따라 생기는데 2차대전 당시에 OSS가 그 전신이라고 보면 맞다. OSS는 호치민이 베트남혁명 과정에서 이용하기도 한 미국육군성전략국이란 이니셜의 정보조직이다. 1945년 종전과 함께 해체되는데 이때 정보원들은 미군 방첩대 CIC에 편입되어 활동한다. 이 CIC가 해방공간에서 여운형 송진우 장덕수 김구 등을 암살한 조직이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만을 테러한 게 아니라 우익계열의 민족주의 인사도 미국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가차없이 테러했다. 이 조직이 47년 CIA설립과 함께 다시 재편입된다. 당시 CIC에 연계되었던 한국의 단체는 백의사와 그 산하라고도 할 수 있는 서북청년단 등 이북 출신 우익청년단체들이었다.

CIA는 미국에서 군부를 통제하기 위한 민간통제기구로서의 성격이 컸다. 이를 실제로 성장시킨 것도 앨런 덜레스 같이 2차대전 과정에서 급성장한 월가출신의 시빌리언그룹이다. 때문에 맥아더와 같은 정통군부와는 긴장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CIA는 설립 초기에 한반도에 발을 못붙이다가 CIA국장의 지시가 있고 나서야 월로비 소장이 협조하게 되고 비로소 활동을 개시한다. 이들은 49년 동래에 사무실을 두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CIA는 군사조직이 아닌데도 전쟁에 깊이 관여한다. CIA는 미국의 국가안보회의 산하 직속 단체이다. 국가안보회의는 미국군대의 총사령관인 대통령에게 군사자문을 하는 기구이다. 미국의 육해공군이나 합참은 평시의 행정적 지휘만 하고 전쟁에서의 작전지휘는 국가안보회의가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최종적인 작전권을 쥐고 있다.

CIA는 이 작전권을 행사하는데 정보를 제공하는 조직이지만 작전에 따라서는 CIA의 정보가 작전지시가 될 때도 있다. 아프간전쟁에서도 오마르가 들어간 건물의 폭격명령을 내린 것은 CIA였다. 미군의 합참은 덩치만 크고 조직적 집행력이 떨어져서 각 군종간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데 많은 낭비를 하는 조직이다. 합참에서 이런 정보를 받고도 놓치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어쨌든 CIA는 50년 1월11일에 이미 북의 6.25 전격전쟁 결정을 알고 있었고 워싱턴에 보고했지만 워싱턴은 이를 묵살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향의 정보는 폐기됐고, 3.8선 부근에서 분단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보만이 채택되었다. 국가안보회의 차원에서 다른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동키부대는 이들 미국군대 산하에서 어떻게 활동했을까? 한마디로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전쟁물자를 전과에 따라 받도록 하면서 인민군의 군화나 귀를 잘라와야 그에 따른 무기를 지급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무기를 구걸받기 위해 싸우는 것 같아서 많은 부대원들이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한다. 그런데다 동키부대의 해체도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휴전협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53년 6월12일, 백령도 기지사령관 페루 중령이 서해 38도선 이북 도서의 모든 유격부대장에게 타전한 이 비밀전문은‘귀하가 지휘하는 모든 공작원의 본대 복귀를 명령한다. 새로운 대북공작은 보류하라. 부대를 정비하고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24시간 이내에 승선, 이동할 태세를 갖춰라`였다. 이는 미 극동군 사령부 주한연락처(KLO) 소속 동키부대 해체의 첫 신호였다. 

동해안의 커크랜드 부대와 덕소의 제1공수연대도 대기명령을 받았다. 곧이어 미해군 LST 함이 유격부대원들을 38도선 이남의 대청도, 강화도와 태안반도 등지로 실어 날랐고 이들은 정확한 상황도 파악하지 못한 채 작전재개를 기다리며 군사훈련만을 하고 있었다.

미 극동군 사령부의 이같은 전격 철수작전은 휴전협정 타결 직전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북진강행 의지표명`으로 인한 유격부대원들의 동요를 우려, 전선으로부터 긴급히 격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백악관으로서는 분단관리에 있어서 돌발상황을 연출할지 모르는 맥아더의 잔존세력을 정리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동키라는 말은 미국의 민주당을 비꼬는 말이다. 백악관은 정전회담 초안에 "휴전조인 5일 이내에 서해 5도를 제외한 황해.경기도계의 서북해안 도서로부터 유격대 전원이 철수해야 한다"는 조항을 포함시키도록 함으로서 그 작업을 완료 지었다.

동키부대는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 싸웠지만 결과적으로 그 공을 미국에게 인정받아야하는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켈로부대의 정보원들이나 CIA에 복무했던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도 많은 한국인이 남과 북에서 CIA의 요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역사를 더듬어 질문할 필요가 있다. 누구를 위한 활동인가? 이들의 활동은 평시엔 잘 판단하기 어렵지만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일이 발생했을 때 극명해진다는 것이 한국전쟁의 교훈이다.

백령도를 떠나기 전에 노을을 보고 오시라 권하고 싶다.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세상이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전혀 바뀔 것 같지 않던 정오의 햇빛이 이때가 되서는 모두 변한다. 노을의 원인이 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해 조차도 이 시간엔 새로운 빛으로 물든다. 서로가 서로에 의해 어느 것 하나 없이 변화하는 시간. 사물자체가 의미를 잃고 관계만이 존재의 의미란 사실을 깨닫게 한다. 관계가 가져다주는 변화의 충만함 때문에 기울어 가는 해임에도 노을은 아름답다.

평화란 전쟁과 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람 관계의 발전에 의해서 온다는 사실을 노을과 함께 느껴보는 것도 좋은 일 일듯 싶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