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활웅(재미 통일문제 자유기고가)


한나라당의 이회창 대통령후보는 지난 21일 `희망포럼`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그의 대북 정책의 요강을 밝혔는데 언론보도에 따라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이회창 후보의 대북 정책 요강

*  대북정책 3원칙은 1) 상호주의, 2) 국민적 합의와 투명성 및 3) 검증이다.

*  평화구축 3원칙은 1) 남북한 당사자주도, 2) 긴장완화와 교류.협력 병행 및 3) 단계적 실천이다.

*  5대 정책과제는 다음과 같다.

1) 남북간 긴장완화와 적대적 대결구도를 해소한다. (남북간 기존 경계와 관할구역을 존중하며 우발적 군사충돌을 방지하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불안한 현행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남과 북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한반도를 만들어야 하며 이를 위해 남북한 군사적 긴장완화와 군사적 대결구도의 해소가 급선무이며 집권 시에는 이를 대북 정책의 최우선과제로 추진하겠다.)

2) 북한 대량살상무기문제를 조속 해결한다. (제네바합의는 지켜야 하며,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지체없이 수용하고 테러근절노력에 동참해야 한다. 또 북미간의 조속한 대화를 촉구한다.)

3) 한반도 평화구축이 가시화 되면 본격적인 대북 지원을 한다. (이를 위해 동북아개발은행의 설립을 추진한다.)

4) 교류협력을 제도화하고 인도적 문제를 해결한다.

5) 동북아평화협의체설립을 추진한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시종 헐뜯고 훼방하던 한나라당의 대통령후보가 이제 그의 대북 정책 구상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밝혔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다. 물론 그 중의 상호주의, 투명성, 검증의 3원칙과, 북한 대량살상무기 문제 해결과 동북아개발은행 설립 및 동북아평화협의체 추진 등 정책은 그가 이미 2000년 6월 9일의 기자회견과 같은 해 7월 6일의 국회교섭단체대표 연설에서 밝힌 바 있어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남북한 당사자주도" 강조는 고무적인 일

그러나 그가 "남과 북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한반도를 만들어야 하며 이를 위해 남북간 긴장완화와 군사적 대결구도 해소가 급선무"라며 "집권 시 이를 대북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말한 것은 과연 대공당의 대통령 후보다운 발언이라 할 수 있다. 또 "궁극적으론 불안한 현행 정전체제를 공고한 평화체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설파한 것은 남북문제의 핵심을 찌른 것으로 높이 평가할만하다.

이 후보의 생각은 무엇보다도 남북간 긴장완화와 남북대결구도를 해소하는 일이 급선무이며, 그것이 이루어져야 남북간 인적.물적 교류도 가능하고 또 북한을 도와줄 수도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정치.군사 문제의 해결이 선행돼야 경제.문화.인도적 교류도 가능하다는 것이 이 후보가 남북문제를 보는 시각인 듯 하다. 이것은 정치.군사문제는 일단 비껴가면서 인적.물적 교류부터 실시하노라면 남북대결관계도 풀리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김대중 정부의 실책을 번복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되며, 남북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가 "남북한 당사자주도"를 평화구축 3원칙의 제1로 내세운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그가 참으로 그대로만 한다면 그의 주장대로 먼저 남북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대결구도를 해소한 다음 교류.협력도 추진하고 남북간의 자유왕래도 실현하는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현행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나가서는 동북아평화협의체를 구성하는 일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지난 반세기 동안 남북문제는 단지 남북한 2자간의 문제가 아니라 남북미 3자간의 문제였으며, 그 추이는 항상 미국의 뜻과 힘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왔다. 이 후보가 "남북한 당사자주도"를 굳이 평화구축의 제1원칙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그도 그렇게 알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또 남한은 미국이 주도하는 소위 한미일 공조체제에 예속되어 남북문제에 관한 정책의  수립과 시행은 물론 남북대화의 진행에 있어서도 미국으로부터 음양으로 통제를 받고 있다. 이 후보는 물론 그런 사정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남북당사자주도"의 원칙을 제창하면서도 이를 위해서 미국과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현재 남한에는 37,000명의 미군이 무기한으로 주둔하고 있으며 한국의 대통령도 모르게 미국의 무기와 병력이 저들 마음대로 들락날락하고 있다. 국군이 있다지만 싸울 때는 미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돼있다. 또 한국정부는 대북 관계도 미국의 훈수에 따르거나 눈치를 살펴가면서 진행하고 있다. 이런 사정에 대해 이 후보가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남북문제에 있어서의 대미예속관계는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라는 결론을 불가피하게 한다. 그렇다면 그가 제시한 원칙과 정책과제의 실현가능성은 매우 희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남한의 대미 예속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아

우선 평화구축 3원칙의 첫째인 "남북한 당사자주도"는, 5대 정책과제 중 4번의 "교류협력의 제도화와 인도적 문제 해결"에서나 가능할까, 나머지 과제들은 대미 예속관계가 존속되는 한 남북한 당사자주도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이 후보는 "남북간 긴장완화와 적대적 대결구도"를 "남북한 당사자주도"의 원칙으로 해소한다지만, 한반도의 긴장과 대결구도는 미국과 북한의 적대관계로 인한 것인데, 미국의 군사적 통제하에 있는 남한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당사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미국이 용납도 하지 않겠거니와 북한도 이 문제를 미국을 제쳐놓고 한국과 해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평화구축이 가시화 되면 본격적인 대북 지원을 한다는 말이나 대북 경제원조를 위한 동북아개발은행을 설립하겠다는 소리나 다 일종의 공수표가 되고 말 것이다. 

소위 "북한 대량살상무기" 문제도 반세기에 걸친 미국의 대북 군사위협과 압살정책의 반작용으로 생긴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미국을 빼고 "남북한 당사자주도"의 원칙으로 해소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북에 대한 IAEA 사찰을 "즉각" 수락하라는 요구는 미국이 제네바합의를 파기하기 위해서 두는 수순인데, 이 후보는 제네바합의는 지켜야 한다면서도 이를 파기하려는 미국의 입장을 두둔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제네바합의는 "경수로사업의 상당부분이 완료될 때, 그러나 주요 핵심부품의 인도 이전에", 북한이 IAEA 사찰을 받기로 되어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론 불안한 현행 정전체제를 공고한 평화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이 후보의 주장은 백 번 옳은 말이지만 지금까지 그것을 못하고 있는 것은 북한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반대하기 때문이었다. 또 동북아평화협의체를 통해서 한반도의 안전을 보장받겠다는 것도 매우 타당한 구상이지만, 현재 아무제약 없이 맘대로 남한을 군사기지로 사용하고 있는 미국이 왜 여러 나라와 번거로운 협의를 거쳐야 하는 지역적 집단안보협의체를 만들자는 데 동조하겠는가? 그것은 한국이 대미예속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난 후 남북의 공동노력으로 주변 4국을 설득함으로써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일이다.

또 이 후보가 주장하는 상호주의와 투명성과 검증도 미국이 남한에 버티고 서서 북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한 실현되기 어려운 원칙이다. 예컨대 북한이 대량살상무기의 철폐와 그 이행여부를 확인하는 검증을, 북한뿐 아니라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서 미군기지를 포함한 남한에서도 실시하자고 주장한다면, 이 후보가 한국의 대통령이 된다 한들 무슨 수로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회창 후보의 대북 정책요강이 우리의 장래를 진심으로 우려하는 민족지도자의 깊은 사고의 결과로 짜여진 청사진이라면, 그가 내놓은 여러 원칙과 정책과제의 성공적 시행을 위해 불가피한, 한국의 대미예속관계의 청산을 위한 처방이, 그 속에 포함돼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한낱 공염불로 끝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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