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 (Korean genealogy for U.W.H.L. - Academic Chairman)

 

족도(族圖)나 계도(系圖)는 작성 초기에는 모두 필사본이었고, 이후에 조선시대에 들어와 목판본과 활자본으로 그 간행 수단이 발전한다. 이번에는 고 족보의 판본에 관하여 간략히 살펴보자.

1. 간행 형태에 따른 분류

족보는 처음 작성될 때 필서(筆書)로 작성된다. 이후 목판본이나 활자본으로 간행된다. 이러한 간행 형태에 따라 족보를 분류해 보자.

- 필사본 계보 ; 족도나 계도는 작성 초기에는 모두 필사본이었다. 벌족일수록 집안의 여러 혈족이 각기의 직계와 그 형제들의 필사본 계보를 작성하였을 것이다. 필사본으로 작성된 계보를 모아서 취합하여 세보를 편성한다. 그런데 이렇게 편성한 세보를 많은 경비가 들어가므로 간행하지 못 한 때도 있다. 대체로 조선시대에 족보를 판본으로 간행할 여력이 안 되는 경우 복수의 필사본을 제작하여 배포하는 때도 있었다. 필사본의 교정은 지면에 그대로 고쳐 쓰거나, 틀린 부분을 써서 지면에 덧댄다. 서지학에서는 복수의 필사본 제작도 하나의 출판 행위로 본다.

1392년 조선왕조가 개국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기까지 족도나 세보, 족보를 간행한 문중은 모두 37개 문중이다. 그리고 1401년 [해주오씨족도]로부터 1600년 [진성이씨족보] 경자보에 이르는 15~16세기의 200년간 족도나 세보를 편찬한 것이 확인되는 문중은 41개 문중이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에서부터 1600년까지 네 문중에서 더 족보를 편찬한 것이다. 이 가운데 세 문중, 곧 성산(광평)이씨는 1593년(계사보)에, 남평문씨는 1594~1596년경에, 청주정씨는 1595년(을미보)에 족보를 편찬하였다.

모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정유재란이 끝나기 이전의 7년 왜란 기간에 편찬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7년 왜란 기간에 족보를 간행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에 족보를 편성하였고, 서문을 왜란 기간에 썼을 수는 있는 것이다. 족보는 편성한 후 곧바로 인쇄에 들어가는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 간행하는데 수년에서부터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하고, 초보의 상태에서 영영 간행하지 못하는 때도 있다.

- 목판본 세보 ; 임진왜란 이전에 세보나 족보를 편찬했다고 주장하는 문중은 확인된 것이 현재로는 37 문중이다. 추가 확인된다고 해도 40 문중이 좀 못 미칠 것 같다. 17세기까지는 그 편찬된 세보를 대체로 목판본으로 간행한다. 문화류씨문중에서는 1423년에 [문화류씨세보] 초간 계묘보를 류영(柳潁)이 편찬하여 간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423년 초간 계묘보는 현전하지 않으며, 다만 1565년에 간행한 [문화류씨세보]에 서문이 실려 있다. 현전하는 최고본 세보는 1476년 [안동권씨세보] 병신보(丙申譜)로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1545년에 목판본으로 간행한 [청송심씨족보] 을사보가 현전한다. 조선시대에 세보나 족보를 편성하였어도, 이를 간행하는 데는 많은 경비가 들었다.

몇 문중에서는 초간보를 목판본으로 간행하여, 후일 족보를 간행할 때 이를 활용하기도 한다. 한 예를 들자면 청송심씨문중에서는 1545년 을사 초간보 판목을 순천부에 보관하여 오다가, 전주부로 옮겨와서 초간보 판목을 증보 수정하여 1562년에 임술 재간보를 간행하며, 이후 전주부에 보관 중이던 증보 수정한 임술보 판목을 진원(현재의 장성군)으로 옮겨와 다시 증보 수정하여 1578년에 삼간 무인보를 발행한다. 즉, 청송심문은 초간보 판목을 이용하여 1562년 재간보(임술보)를 만들었고, 다시 초간보와 재간보 판목을 이용하여 1578년 삼간보(무인보)를 만든다.

이러한 예는 경주김씨 벽상공신내사령공파의 신묘보(1748)와 무인보(1758)에서도 보인다. 이러한 목판 판각은 후대로 전승되면서 후쇄본(後刷本)을 남기기도 한다. 후쇄본에서는 초쇄본에서 볼 수 없는 목니(木泥) 현상이 나타난다. 또한 목판본은 하나의 목판을 찍어 낸 후, 틀린 부분은 상감(象嵌) 수정하여 인출할 수 있어 임의의 변경이 가능하다.

조선중기까지의 목판본 고족보는 사찰판본(寺刹板本)이 의외로 여러 점 보인다. 이것은 많은 사찰이 출판 역량(인프라)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1545년 [청송심씨족보] 을사보를 보면 좌우변(左右邊)은 없고, 상하단변(上下單邊)에 판심이 없다. 이것은 고려본 불서의 흔적이다. 즉 이것은 사찰판본의 흔적인데, 이러한 현상은 1584년 [부령김씨족보]를 1741년에 옮겨 베낀 필사본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를 보면 1576년 청주 보살사(菩薩寺)에서 간행한 [능성구씨성보(綾城具氏姓譜)] 병자보 목판본 1책(66장) 과 1578년 [고령신씨세보(高靈申氏世譜)] 무인보 목판본 3권2책 외에도 사찰판본이 여러 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1713년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 계사보 목판본 5권5책은 순흥부(順興府)에서 개간한 것으로 기록하면서, 부석사장판(浮石寺藏板)으로 밝히고 있다. 이것은 1713년 청송심씨 계사보는 순흥부에서 개간하였지만, 실제로는 부석사에서 판각 간행하면서 그 판목을 부석사에 영구 보관한 것으로 분석된다. 현재 필자가 확인한 조선시대의 고 족보 사찰판본은 목판본 14종과 목활자본 13종을 합하여 주(註)와 같이 최소 22문중의 27종으로 확인된다.

- 활자본 족보 ;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1613년에 쓴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新編廣州李氏同姓之譜)] 서문에서는 동고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이 1561~2년경에 간행한 [광릉세보(廣陵世譜)]가 활자본이라고 언급한 바 있으나, 이 책은 현전하지 않는다. 현전하는 활자본 고 족보는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족보는 대체로 민간 출판물이므로 주로 민간에서 만든 목활자가 사용되었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목활자본 고 족보는 1650년에 간행한 [신천강씨족보(信川康氏族譜)] 경인보 2책으로,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또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족보는 1689년에 경성(京城) 남부(南部) 훈국방(薰局坊)에서 한구자(韓構字)1)로 찍은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 기사보 15권5책인데, 이 고 족보도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보편적으로는 이동이 간편하고 만들기가 수월한 목활자로 족보를 간행하였다. 조선후기(18~19세기)에는 목활자를 지게로 짊어지거나 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문집이나 족보를 출판해 주는 이동식 출판업이 생기기도 하였다. 활자본은 찍은 후에 활자의 재사용을 위하여 조판을 흩는다. 그러므로 같은 책을 다시 찍어 낼 수가 없다. 그러나 활판을 흩기 전에 오식(誤植)의 교정(校正)은 수월하다.

판심의 상하와 사궤(四櫃)의 모서리가 떨어져 있다. [사진제공 – 이양재]
판심의 상하와 사궤(四櫃)의 모서리가 떨어져 있다. [사진제공 – 이양재]

- 조각판본과 연각활자, 목판의 혼용 ; 한음 이덕형이 1613년에 서문을 쓴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는 조각판본으로 보인다. 많은 족보의 서문은 글을 지은이의 필체를 그대로 판각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경우 목활자본 족보에서도 서문 부분은 목판을 사용하여 판각한다. 때로는 책의 크기에 맞추기 위하여 서문을 잘라서 연각활자, 즉 조각판을 만들어 조판하기도 하였다. 1613년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는 연각활자보다는 작은 크기의 얇은 판목에 일정한 양을 새긴 조각판들을 만들어 이것을 활판 식으로 조판한 후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활자판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 계보 부분의 판심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2. 간행의 주체에 따른 판본 분류

이상의 판본 분류 이외에도 간행 주제에 따라 족보를 분류해 보자. “관판본이냐, 서원판본이냐, 사찰 판본이냐, 사가 판본이냐?”를 구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탐색이다.

- 관판본 ; 관판본은 다시 중앙 관판본과 지방 관판본으로 구분된다. 중앙 관판본은 [선원보(璿源譜)]나 [선원속보(璿源續寶)], 왕의 인척을 위하여 조선왕조가 간행한 족보가 이에 속한다. 왕의 인척을 위한 중앙관서의 관판본은 교서관(校書館)에서 1713년 간행한 [여흥민씨족보(驪興閔氏族譜)] 계사보 8권8책 목판본이 있다. 

민진후(閔鎭厚, 1659~1720)가 서문을 썼는데, 그는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의 오빠이다. 계사보가 교서관(校書館)에서 1713년에 조선왕조의 관판본으로 간행되는 배경에는 민진후가 숙종의 매부(妹夫)라는 사실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지방 관판본은 특정 성씨의 인물이 지방관으로 나갔을 때 현직을 이용하여 족보를 간행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자면 광주이씨문중의 1613년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新編廣州李氏同姓之譜)]는 의성현(義城縣) 개간본이며, 1724년 [광주이씨족보(廣州李氏族譜)] 갑신보 3권3책은 함경감영(咸鏡監營)에서 개간한 목판본이다.

- 서원판본 ; 서원판본도 소수 현전한다. [이존록(彛尊錄)]의 1528년 재간본은 예림서원(禮林書院)에서. 1600년 [진성이씨족보(眞城李氏族譜)] 경자보 3권3책 목판본은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간행하였다. 1731년 [남평문씨족보(南平文氏族譜)] 신해보 3권3책 목판본은 장흥 월천서원(月川書院)에서, 1827년 [청주정씨세보(淸州鄭氏世譜)] 정해보 6권6책 목활자본은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에서 간행하였다.

- 사찰판본 ; 현재까지 필자가 확인한 사찰판 족보는 모두 22개 성씨가 발행한 27종으로 주(註)2)2) 와 같다. 사찰은 불경 출간이라는 사찰 고유의 출판 능력이 있었다. 주2)의 목록을 보면, ⑭번 1745년 [원주이씨족보(原州李氏族譜)]까지 14종은 모두 목판본이고, 이후 1760년부터 간행한 사찰판본 13종은 모두 목활자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조선후기에 사찰에서 간행한 불경 가운데 목활자본은 확인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동식 출판업자가 사찰에 머물며 간행한 것은 아닐까 여겨지기도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다.

- 사가판본 ; 대부분의 우리나라의 고 족보는 사가판본(私家版本)이다. 즉 많은 족보를 개인의 집안(私家)에서 출간하였다는 의미이다. 사가와의 출판 접촉을 위하여 앞에서 언급한 이동식 출판업이 발현(發現)한 것이다. 그들은 민간에서 어떠한 형태의 조직적인 시스템을 갖추었던 것 같다.

3. 제책에 따른 분류

현전하는 우리나라의 계보 및 족보의 제책(製冊)을 살펴 족보를 분류해 보자,

- 선장본(線裝本) ; 우리나라의 옛 족보는 거의 모두 5침 선장본이다. 선장본은 책의 크기가 크거나 작거나 5침 장정을 한다. 작은 크기의 가첩은 4침 선장을 하였으나, 그러한 4침 장정본은 몇 점 되지 않는다. 아마도 많아야 10여점 정도일 것이다. 물론 일제 강점기에 간행된 족보 가운데 소형본은 4침 장정본이 더러 눈에 띈다.

1545년 [청송심씨족보] 을사보, 장5, 목판본. [사진제공 – 이양재]
1545년 [청송심씨족보] 을사보, 장5, 목판본. [사진제공 – 이양재]

- 축본(軸本) ; 일부 족보 필사본은 축본(두루마리)으로 현전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일부 목판본 족보를 보면 축으로 만들었던 증거나 나타나고 있다. 1545년 [청송심씨족보] 을사보는 상하변은 있지만, 좌우변과 판심이 없다. 이와 비슷한 예가 1584년 [부안김씨족보]를 1741년에 필사한 족보도 상하변은 그렸지만 좌우변이 없고 판심도 없는 데서도 나타난다.

- 절첩본(折帖本) ; 우리의 선조(先祖)들은 작은 가첩(家牒)이나 가승(家乘)을 만들어 휴대하거나 자녀들에게 줄 수 있었다. 그러한 휴대용은 절첩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 낱장 ; 1401년 [해주오씨족도]처럼 낱장으로 되어 있는 족도도 있고, 충훈부나 지방관청에서 만든 필사본 계보 단자도 전지 낱장으로 현전한다. 조선시대의 계보 단자는 조선후기의 것이 일부 현전하지만, 1401년 족도처럼 전지(全紙)에 여섯 씨족 혈통의 연결성을 기록한 예는 1401년 족도가 유일한 보서(譜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옛 족보라고 해서 모두 선장본은 아니다. 제책된 원 표지를 가지고 있는 족보의 앞뒤 겉장의 배접된 내지는 능화문(菱花紋)이 요철(凹凸)로 찍혀 있다. 그 능화문도 시대에 따라 문양이 변천한다. 능화문에 만자문(卍字紋)이 들어간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로 연대가 내려온다.

4. 맺음말 ; 족보의 편찬 및 간행 연도에 관하여

족보는 간기를 보고 간행년도를 파악하지만, 간기가 없을 때 가장 늦은 년도의 서문이나 발문으로 간행년도를 파악한다. 그런데 늦은 서문이나 발문을 떼어내고 더 오래된 족보로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서문이나 발문이 없는 고 족보도 종종 보인다. 이럴 때는 등재된 인물들의 생존 및 활동시기를 조사해 보아야 한다. 가장 늦은 생존 기록으로 족보의 편찬 및 간행한 연대를 추산한다. 즉 내용서지학적 탐색이 중요하다.

그리고 족보의 형태를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목판본 족보일 경우 초기 인쇄본인지 후기 인쇄본인지를 구분하는 일이 필요하다. 아울러 활자본은 그 활자의 명칭과 활자가 사용된 년대를 규명하는 형태서지학적 탐색도 중요하다.

계대의 위조는 내용을 교차 비교하면 드러난다. 수단을 위한 단자의 위조는 지질과 편성에서 쉬 구분된다. 문중보학은 과괄(科括)과 현달(顯達)을 논하는데 중점을 둠으로, 문중보학은 말도 안 되는 무리한 주장을 많이 한다. 현대보학은 서지학적 고찰을 기본적으로 한다. 그리고 현대보학에는 문중보학의 폐쇄적 관점을 뛰어넘어, 우리나라 문중 전체를 학문적으로 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선원록 단자], 낱장, 1843년4월, 진주 계묘식. [사진제공 – 이양재]
[선원록 단자], 낱장, 1843년4월, 진주 계묘식. [사진제공 – 이양재]

 

주(註)

1)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 1634~1684)는 자신과 친하던 한구(韓構, 1636~1715)의 필서체로 1679년경에 동활자 한구자(韓構字)를 주조한다. 이 한구자는 조선시대에 주조된 가장 아름다운 서체의 금속활자이다. 크기가 작고 서체가 필서체로 매우 아름답다. 이 한구자로 처음 인쇄한 책은 김석주가 1678년에 저술한 병법서 『행군수지(行軍須知)』(1679년 간행)이다. 이것을 보아 이 활자는 김석주가 자신의 저서를 출간하기 위하여 한구자를 주조(初鑄)한 것으로 보인다. 이 한구자는 1695년에 조선왕조에서 사들였는데, 후일, 이 필서체를 이용하여 두 차례나 더 주조하여 사용한다.

2) 현재까지 필자가 확인한 사찰판 족보는 모두 22개 성씨가 발행한 27종으로 아래와 같다.

➀[능성구씨성보(綾城具氏姓譜)], 1576년(병자보), 초간보, 1책(66장), 목판본, 淸州 菩薩寺.

②[고령신씨세보(高靈申氏世譜)], 1578년(어성보, 무인보), 신담(申湛, 1519~1595), 3권2책, 龜巖寺(충청도 직산 성거산), 목판본.

③[진양하씨세보(晉陽河氏世譜)-사직공파], 1606년(병오보), 河渾 찬, 2권2책, 재간보, 海印寺, 목판본.

④[창녕성씨족보(昌寧成氏族譜)], 1616년(병진보), 1책, 재찬 초간보, 觀龍寺, 목판본.

⑤[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 1617년(정사보), 韓孝仲 韓赫 찬, 1책(68장), 초간본, 淸州 菩薩寺, 목판본.

⑥[남평문씨족보(南平文氏族譜)], 1676년(병진보), 李(이익, 1655~1736) 서, 文宇徵 발, 宋時烈 발(1659), 文汝顯 근지, 海印寺 개간, 목판본.

⑦[진주강씨족보(晉州姜氏族譜)], 1685년(을축보), 姜碩老 편, 姜瑜 서(1667), 姜碩耉 발(1685), 초간보, 3권2책, 南漢 天柱寺, 목판본.

⑧[담양전씨족보(潭陽田氏族譜)], 1700년, 초간보, 田九畹 서, 2권1책, 宜寧 寶泉寺, 목판본.

⑨[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 1713년(계사보), 沈得良 발, 5권5책, 順興府開刊 浮石寺藏板, 목판본.

⑩[진양하씨세보(晉陽河氏世譜)-시랑공파], 1719년(기해보), 河浻 발, 1책(124장), 晋州 靑谷寺 開刊, 목판본.

⑪[진주강씨족보(晉州姜氏族譜)], 1727년(정미보), 은열공파 초간보, 姜鋧(1650~1733) 서, 晋州 牛芳寺, 2권2첵, 목판본.

⑫[남평문씨족보(南平文氏族譜)], 1735년(을묘보), 초간보, 2권2책, 진주 五臺寺 개간, 목판본.

⑬[조양임씨족보(兆陽林氏族譜)]. 1742년(임술보), 林秀栢 서, 林春元 발, 2권2책, 全州 松廣寺 白雲菴, 목판본.

⑭[원주이씨족보(原州李氏族譜)], 1745년, 초간보, 原州 九龍寺刊板因置之, 4권2책, 목판본.

⑮[대구배씨족보(大邱裵氏族譜)], 1760년(경진보), 裵正時 서, 초간보, 3권3책, 羅州 普興寺, 목활자본.

⑯[경주배씨족보(慶州裵氏族譜)], 1765년(을유보), 裵絳 등편, 李象靖(1711~1781) 서(1764), 배강(裵絳) 발, 10권10책, 경상도 칠곡 松林寺 간, 목활자본.

⑰[언양김씨족보(彦陽金氏族譜)], 1767년(정해보), 金景淵 발, 초간보, 6권6책, 稷山 龜巖寺 목활자본. 홍계희 서문.

⑱[천안전씨세보(天安全氏世譜)], 1769년(기축보), 宋德相 서, 千慶佐 발, 5권5책, 身安寺開刊 목활자본.

⑲[진양하씨세보(晉陽河氏世譜)-사직공파], 1772년(임진보), 河永淸 서, 河廷益 발, 6권6책, 同福 安心寺, 목활자본.

⑳[보성선씨족보(寶城宣氏族譜)], 1785년(을사보), 宣始啓 서, 재간보, 長興 日林寺, 목활자본, 5권5책.

㉑[보성선씨족보(寶城宣氏族譜)]-元祉派 別譜, 1786년(병오보), 1권1책(53장).  宣震喆 서, 開興寺刊, 목활자본. 

㉒[선산김씨족보(善山金氏族譜)] - 一善系, 1791년(신해보), 李獻慶 서(1789), 金聖新 발, 12권13책, 高靈 盤龍寺, 목활자본.

㉓[대구배씨족보(大邱裵氏族譜)], 1800년(경신보), 李萬運 서, 裵經國 발, 裵敬履 등편, 6권6책, 慶尙道 柒谷 松林寺, 목활자본.

㉔[탐진최씨족보(耽津崔氏族譜)], 1800년(경신보), 崔梃嵂 서, 昌平龍興寺開刊, 9권8책, 목활자본.

㉕[교동인씨족보(喬桐印氏族譜)], 1826년, 재간보, 12권4책, 靈塔寺 개간. 목활자본.

㉖[나주나씨족보(羅州羅氏族譜)], 1833년계사진보), 羅憲天, 7권8책, 金堤芝陰院中刊于扶安來蘇寺, 翌年三月 訖印于 古阜 酒洞講堂, 목활자본.

㉗[해주오씨족보(海州吳氏族譜)]-향파, 1856년(병진보), 吳取善 등 서, 오두영 발, 3권3책, 종보(從譜), 道林寺, 목활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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