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폭도>의 정확한 창작 연도는 알지 못한다.
암벽을 강렬하게 구사한 붓질-적묵법(積墨法)은 1751년에 그린 <인왕제색도>와 비슷하다. 이런 이유로 <박연폭도>는 70대 중반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60세 후반에 그린 <박생연> 이후, 내용과 형식을 보완하여 <박연폭도>를 그렸다는 말이다.
[박연폭]은 가로에 비해 세로가 2배 긴 화폭을 선택했다.
여러 번의 배첩(褙貼) 과정에서 상하좌우 일부가 잘렸다.
상단 ‘朴淵瀑’이라는 글자가 화면 끝에 바짝 붙은 것이 증거이다.
화폭의 비율은 의도한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의 생생함을 전달하기 위해 과장된 화폭 비율을 사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박연폭도>의 실경 비율은 30% 밑으로 떨어졌다.
겸재가 실제 폭포를 무시하면서까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 작품은 독특한 조형기법을 사용했네.
화폭의 비율을 과장한 것처럼, 여러 표현기법도 숨어있는 내용을 드러내기 위함이지.
여러 기법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야만 작품의 진면목(眞面目)을 알 수 있네.
첫째, 암벽의 이중구조일세.
암벽은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핵심 요소이지.
연한 먹으로 그린 안쪽 바위를 진하고 거친 먹의 암벽이 감싸고 있는 구조일세.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를 좌우에서 감싸고 있는 거대한 암벽은 상당히 자극적일세.
하지만 실제 박연폭포와는 전혀 다른 표현일세.
의도했다는 것이지.”
“겸재의 그림을 따라 실제 박연폭포를 찾은 사람이 경악했다는 소문도 있네.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지.
실제 박연폭포와는 다른 이중구조로 표현한 이유가 뭔가?”
“미술 구도법에 따른 해석일세.
얼핏 보아도 안쪽 바위는 우측으로, 바깥쪽 바위는 좌측으로 45도 정도 기울게 그렸지. 마치 중앙으로 솟아오르는 느낌을 주는데, 이는 아래로 떨어지는 물과 대비를 일으켜 폭포의 역동성을 높이고 있네.
안쪽 연한 절벽은 여성 성기, 바깥쪽 거친 바위는 남성 성기라고 해석하여 음양의 조화를 표현했다는 가설도 있네.
바깥쪽 절벽 상부는 힘차게 솟은 성기이고, 폭포의 아래쪽 소(沼)를 여성 음부라고 상세 설명하기도 하네.
겸재가 주역에 능통했으니 그럴싸해 보이면서도 자극적이지.
일부 폭포에 미인(美人)을 붙이거나 남녀 관계에 폭포가 등장하는 그림이 있네.
하지만 남녀 성행위나 음양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결과를 설명하지 못하거나 폭포의 감상과 성적 쾌락이 어떤 관계인지 명쾌하지 않네.
[박연폭]처럼 간결한 그림일수록 철학적 내용이 함축되어 있지.
안쪽 절벽은 사람의 깊은 내면, 바깥쪽 절벽은 주변 환경의 상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네.
거친 먹으로 표현한 바깥쪽 절벽은 어려운 현실이며, 폭포 안쪽으로 향하게 그린 소나무들은 변치 않는 양심일세.
폭포는 어려움을 이겨낸 내면의 속삭임이지.
안쪽과 바깥쪽의 바위들이 대각선으로 만나는 모습도 양심에 의해 상승하는 내면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지.”
“내면의 속삭임? 웅장한 폭포 소리가 내면에서 나는 소리란 말인가?”
“다른 요소를 모두 살펴본 뒤에 결론을 내리도록 하지.
두 번째, 폭포 상단의 작은 바위와 아래쪽 소(沼)에 있는 큰 바위일세.
실제 박연폭포와 비교하면, 위쪽 바위는 임의로 넣었고 아래쪽 바위는 하나만 선택했네.
의도한 표현이라는 말이지.
검은 점 같은 작은 바위와 큰 바위 사이의 거리감을 만들어내고, 시선을 위아래로 잡아끌어 폭포가 하강하는 느낌을 더욱 명확하게 전달하는 역할이라고 주장하지만, 설득력이 약하네.”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가?
어떤 사람은 그림 속에서 엄청난 폭포 소리가 들린다고 하는데, 그 소리를 시각으로 듣게 하려면 커다란 물보라를 그리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림에는 물보라의 표현은 없고 큰 바위만 덜렁 놓았군.
그림에서 폭포 소리가 시각적으로 크게 와닿지 않네.”
“상단의 작은 바위는 시작점이고 아래 고모담(姑姆潭)에 있는 큰 바위는 마침표이지.
내면의 움직임에 따른 상태를 표현한 것이네.
내면의 감정 상태가 위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떨어지면서 거대한 울림을 만들어내고 끝 지점에서 절정을 이루고 서서히 아래로 사그라드는 것이지.
마침표 같은 큰 바위는 쿵~하는 절정의 표현일세.”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보게.”
“시각 정보가 감정을 일으키려면 생각을 거쳐야 하네.
시각 정보-생각-감정 유발이라는 순서일세.
편도체는 보자마자 즉각적인 반응과 감정을 일으키기도 하지.
시각 정보-감정 유발인데, 이를 ‘편도체 하이재킹’이라고 한다네.*
무슨 관계냐고?
누구든 폭포를 보는 순간 우람한 소리로 반응한다는 말일세. 여기에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지.
겸재는 알고 있었네.
긴 폭포를 그리면 당연히 큰 폭포 소리가 들리는 환청이 생길 것이라고.
고작 큰 폭포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수많은 폭포 그림을 그리면 고민했을까?
진경산수화는 관념의 그림일세. 특히 <박연폭도>같이 간결하게 그린 작품일수록 깊이 생각해야 감흥이 생기네.
겸재가 그려 넣은 두 개의 점은 ‘생각’ 그 자체네.”
“보는 그림이 아니라 생각하는 그림이라는 말인가?
사실, <박연폭도>는 남들이 소문 난 명작이라고 하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만큼 시각적 매력은 없네.
하지만 두 개의 바위가 생각을 끌어내는 요소라는 데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군.
내가 너무 생각이 많은 건가?”
“겸재도 같은 생각을 했네.
그래서 확신을 주는 큰 한방을 준비해 두었지.” (계속)
[참고]
1) 배첩(褙貼)은 글씨나 그림에 종이나 비단을 붙여 보존 장식하는 전통 서화 처리 기법이다.
중국에서는 장황, 일본에서는 표구라고 한다.
일본식 표구는 튼튼하고 사치스럽기로 유명하다. 그만큼 원본 작품의 훼손이 심하다.
산 정상 부분이 잘린 <인왕산도>, 우리에 갇힌 것처럼 답답해 보이는 <송하맹호도>는 모두 표구 과정에서 원작이 잘린 것이다.
2) 관상감은 조선시대 천문, 지리, 달력, 점치기, 날씨 관측, 시간 파악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도록 설치했던 국가 조직이다.
요즘으로 치면, 한국천문연구원과 기상청과 같다.
주역(周易)에 觀乎天文以察時變 觀乎人文以化成天下라는 말이 있다.
“하늘의 문양에서 봄으로써 시절의 변화를 살피고, 사람이 만든 문양, 즉 문화에서 봄으로써 천하의 변화를 이룬다.”라는 의미로, 하늘을 보아 땅을 살피고, 땅에서 이룬 사람의 문화를 살펴서 천하를 문명화한다는 뜻이다.
겸재 정선이 41세 쯤에 관상감 겸교수라는 관직을 가진다.
종6품 관직으로 교육과 업무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특별히 임용한 전문가이다.
양반 출신이 굳이 중인 관직에 종사한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겸재는 여기서 주역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관상감이 주역과 깊은 관련이 있고, 여기서 주역을 연구하여 그 결과를 책으로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35세 전후 친구 후원으로 이병연과 금강산을 유람하고 금강산 화첩을 제작했는데 현재 전하지는 않는다.
이후 자신의 작품세계를 확장하고 이론을 찾기 위해 주역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겸재의 대표작인 <금강전도>는 주역의 태극 원리에 따라 그렸다.
진경산수화의 이론가였던 겸재의 제자 강희언도 음양과에서 공부한다.
3) 미술사학자인 이태호 명지대 교수는 조선 후기 진경산수 화풍의 화가들이 얼마나 실제의 경치와 닮게 그렸는지를 수치로 제시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겸재의 현장 충실도는 30∼50% 수준에 그쳤다.
<박연폭도>의 현장 충실도는 30%로 최하위이다.
4) 뇌과학 연구는 우리가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 흥미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감정 정보는 뇌에서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처리된다.
첫 번째는 ‘느린 길’로, 시상에서 시작해 시각 피질, 전두엽, 해마를 거쳐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경로다.
두 번째는 ‘빠른 길’로, 시상에서 편도체로 직행하여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경로다.
문제는 빠른 길이 느린 길보다 약 두 배 이상 빠르다는 점이다.
우리는 정확한 판단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감정적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 현상을 ‘편도체 하이재킹’이라고 부른다. 편도체가 상황을 납치하듯 본능적 감정을 유발해 합리적 사고를 방해하는 것이다.
편도체가 완전히 파괴된 여성의 사례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강도가 칼을 들이대는 상황에서도 심박수 변화나 공포 반응 없이 침착함과 호기심만을 보였다. 이는 편도체가 감정 발생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증명하는 사례다.
(출처-감정의 90%가 착각이라고? 뇌과학이 밝힌 감정 조절의 비밀|작성자 the khan)
겸재가 이런 복잡한 두뇌작용을 어떻게 알 수 있냐는 반론이 있겠다.
물론 조선시대에 두뇌과학은 없었다.
하지만 겸재는 유학과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선비였다.
유학은 실용 학문이고 성리학은 사회적 인간에 대한 학문이다.
심리학이라는 용어는 없었지만, 누구보다도 사람의 사회적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의 생생함을 전달하기 위해 과장된 화폭 비율을 사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박연폭도>의 실경 비율은 30% 밑으로 떨어졌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