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양윤찬 열사 묘역 안내판. [사진 – 문영임]
고 양윤찬 열사 묘역 안내판. [사진 – 문영임]

양용찬 열사 34주기 추모식, 열사의 투쟁으로 제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34년 전 열사와 함께 제주도 특별법을 반대했던 동지들과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나선 선후배가 한자리에 모였다.

양용찬열사추모사업회, 신례초등학교 23회 동창회, 제주대학교 57대 총학생회, 제주대학교 민주동문회가 주최한 추모식은 열사의 생가가 가까이 있는 신례리 열사 묘역에서 열렸다.

도착해 보니 묘역을 바라보며 단체별로 삼삼오오 모여있는 분들의 나이가 지긋하다. 열사의 능에 등을 기대고 앉아계신 분이 고 양용찬 열사의 어머니신 것 같았다. 한라산을 등지고 제주시로 유학보낼 만큼 귀하게 키운 아들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한을 그동안 어떻게 짊어지고 사셨을까 싶은 안스러운 마음이 울컥 들었다.

고 양윤찬 열사 묘역과 열사의 어머니. [사진 – 문영임]
고 양윤찬 열사 묘역과 열사의 어머니. [사진 – 문영임]

국민을 향해 총을 쐈던 사람이 ‘보통사람’이라며 등장한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의 정국 속에서 위기 극복의 해결책으로 이념논쟁을 몰아가고 있었다. 1988년, 김대중 평민당 총재와 김영삼 민주당 총재는 기자회견을 열어 ‘극우 세력의 준동’을 경계했다. 당시 이념·체제 논쟁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려는 우익 언론의 선동, 내무부의 ‘우익 총궐기’ 책자 대량 배포, 그리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탄압 등이 함께 일어나며 사회적 긴장이 높아졌다.(중앙일보 1988.8.29. 3면 참고)

또한 여소야대 정치권은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정부의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여 200석이 넘는 초대형 여당을 만들고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을 고립시키며 영호남 지역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만들었다.

3당 합당으로 지역갈등이 본격화됐다. [사진 제공 – 문영임]
3당 합당으로 지역갈등이 본격화됐다. [사진 제공 – 문영임]

3당합당 이후 노태우 정권은 노동운동, 통일운동, 민주화운동에 대하여 강경자세로 전환하여 공안정국을 만들고 이후 5공청산은 유야무야되어 버렸다. 여대야소가 된 노태우 정권은 1990년 4월 골리앗 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을 헬기를 동원해 진압했는데, 정부의 이러한 과잉대응은 오히려 노조와 학생운동이 폭발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또한 1990년 6월 4일 충남 공주 한일고 최성묵, 6월 5일 대구 경화여고 김수경, 9월 8일 대전 충남고 심광보 학생이 전국 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탄압에 항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89년 전교조 창립을 전후해서 수많은 고등학생이 ‘고운(고등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전교조 사수 투쟁을 했다.

5월 분신 정국의 민주화 투쟁. [사진 제공 – 문영임]
5월 분신 정국의 민주화 투쟁. [사진 제공 – 문영임]

‘고운’에 참여하여 전교조 탄압을 반대하며 쓰러진 어린 학생들이 대학으로 진학 한 1991년, 이들이 대학가에서 더욱 뜨거운 투쟁 열기를 일으켰을 거라는 기사가 있었다. 고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을 최근 <국가에 대한 예우>란 영화로 만들어 낸 힘도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1991년 5월 노태우 정권퇴진 투쟁은 총 2,361회의 집회가 열리고 최대 40만 명이 참여하면서 1987년 6월 항쟁만큼 뜨거웠지만, 4월 26일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가 시위 중 백골단에 맞아 숨진 것을 시작으로 전남대 박승희, 안동대 김영균, 경원대 천세용이 연이어 노태우 정권퇴진 투쟁 중에 분신했다.

이어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김기설, 노동자 윤용하, 이정순이 앞서 대학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분신했고, 보성고 김철수와 정상순등 8명이 분신하는 동안 5월 6일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구속 후 죽음으로 발견되었고, 5월 25일 성균관대 김귀정이 백골단의 진압에 질식사했다. 또한 6월 분신한 노동자 이진희와 석광주, 8월 분신한 손석용과 11월 7일 오늘 추모제를 드리게 된 양용찬 열사의 분신이 있었다.(위키백과)

추모제에서의 제례. [사진 – 문영임]
추모제에서의 제례. [사진 – 문영임]

서귀포 나라사랑청년회 ‘서귀포지역문제 대책위원회’ 소속으로 서귀포 지역 개발문제, UR 및 제주도개발특별조치법, 농수산물 개방 및 지역 감귤 문제 등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26살 청년 양용찬은 “특별법 저지, 2차 종합개발계획 폐지”를 외치며 또한 이를 추진하는 “민자당 타도”를 외치며 이 길을 간다는 요지의 유서를 남기고 투신했다.

멀리서 선명하게 한라산의 모습이 보이는 추모제는 유족인사에 이어 송문석 양용찬열사추모사업회 이사는 “자신의 안위를 넘어 우리 모두의 삶을 위해 투쟁했던 그의 양심적인 행동과 사람답게 살자! 부끄럽지 않게 살자! 그가 바라던 정의와 평등, 그가 꿈꿨던 더 나은 세상은 우리 모두의 몫이 되었다”고 추모사를 나눴다.

김지완 제주대 총학생장의 추모사에서는 제주사랑, 민중사랑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양용찬 열사가 관광과 개발로 변화해가는 제주보다는, 삶의 터전으로 제주를 지키고자 했던 열사의 뜻을 잇고자 하는 선후배의 노력에 중심축이 되었다고 했다.

이어서 참배자들의 소감에서 위성곤 국회의원은 35년 전 열사의 분신 소식을 듣고 현장을 찾아가던 그 날 한라산에 첫눈이 내린 것을 기억한다며 신념과 가치를 가지고 가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으로 열사의 정신과 사랑을 대중과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인사를 했다.

열사의 생가 앞 비문에서 묵념하는 김정임 정의당 서귀포시 지역위원장. [사진 – 문영임]
열사의 생가 앞 비문에서 묵념하는 김정임 정의당 서귀포시 지역위원장. [사진 – 문영임]

서귀포 송악산 기슭에서 태어나 평생을 제주도에서 벌어지는 천박한 자본주의식 개발사업에 맞서 투쟁하여 온 김정임 정의당 서귀포시 지역위원장은 내년 지방선거에서는 진보정당에서 꼭 승리하여 양윤찬 열사의 제주사랑 정신과 사람답게 살자는 바람을 이루어내기 바라며 끝까지 함께 투쟁하자는 인사로 큰 박수를 받았다.

행사가 끝나고 신례리 열사의 생가를 찾아갔다. 이 비문에 작곡을 하였다는 산오락회 노래패 최상돈 님의 노래 속에서 열사의 삶과 제주도민의 바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열사를 다시 한번 추모하고 정신을 되새기는 마음으로 그의 비문을 이곳에 남긴다.

[추도시] 당신은 남도에서 자라났습니다

                                                                                     김규중

당신은 남도에서 자라났습니다.
남도의 어느 농부의 아들처럼
태양의 고운 빛살이 세포를 키웠고
바다의 거친 바람이 혈관을 흘렀습니다.
항쟁의 역사는 당신의 긍지를 키웠고
팔려가는 제주도 땅은 당신의 사람의 샘을 깊게 했습니다.

당신은 사람에게는 따뜻했고
당신은 역사에는 뜨거웠습니다.
동료의 고민을 자신의 고민처럼 답하듯이
당신은 역사에 온 몸으로 답했습니다.
풀잎으로 자신의 얼굴을 하고
옆으로 돌아누우면 한라산정이 어머니처럼 다가오는
얼어서면 멀리 서귀포 앞바다가 달려오는 땅 속
오늘도 당신은 어둠속 계단을 밟듯 우리들 가슴속을 두들기고 있습니다.
오오, 불을 켜다오

억새꽃이 바람에 머리를 풀어헤치는 날
당신은 우리들 가슴에 눈물로 살아있습니다.
당신은 우리들 가슴에 분노로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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