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 (Korean genealogy for U.W.H.L. - Academic Chairman)

 

허씨는 모두 우리나라 금관가야(金官伽倻) 계열의 토성(土姓)이다. 통계청의 2015년 인구조사에서 326,770명으로 조사되어, 우리나라 성씨의 인구 순위 29위이다. 본관은 양천(陽川), 하양(河陽), 태인(泰仁), 김해(金海) 등이 있다.

1. 허씨(許氏)

우리나라 허씨의 기원은 가야국1) 수로왕(首露王)의 왕비 허황옥(許黃玉)에게 둔다. 허황옥은 본래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A.D.48년 16세 때 배에 석탑을 싣고 가야국(지금의 경남 김해)으로 들어와, 수로왕의 영접을 받고 왕비가 되었다.” 허씨문중에 의하면 “허황옥은 10남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 거등(居登)은 김씨(金氏)로 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황옥의 유언에 따라 성(姓)을 허씨로 삼았다.”

허황옥의 시대에 우리나라에는 성씨가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이 전설적 이야기는 문화인류학에서는 매우 중대한 설화(說話)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설화는 모성(母姓)을 이은 것을 말하는 대표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즉 수로왕과 허황옥의 만남에 관한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설화는 문화인류학에서는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사실적(史實的)인 구전(口傳)으로 연구될 수 있다.

허황옥이 가야국에 올 때 배에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 [사진 제공 – 이양재]
허황옥이 가야국에 올 때 배에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 [사진 제공 – 이양재]

2. 양천허씨가 번성한 고려시대

가야가 망하면서 신라에 복속한 김해김씨와는 달리, 이들 허씨는 532년에 금관가야(金官伽倻)가 신라에 항복하면서 각 지방에 흩어졌을 것이다.

이후 (후) 삼국시대에 허황옥의 30세손으로 전하는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공암촌(孔巖, 서울 강서-양천)의 호족으로 등장한다. 고려(918년 건국) 태조 왕건이 (후) 백제의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이 부족하여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군량을 보급해 주었고, 왕건은 “그 공을 가상히 여겨 허선문에게 공암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한다.

즉 금관가야가 망한 532년 이후 왕건이 견훤과 싸우던 927년~93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양천허씨의 시조 허선문이 출현한 것이다. 허선문은 빠르면 880년경부터 940년경까지의 시기에 활동한 인물이므로, 양천허씨는 현전하는 허씨문중 가운데 가장 일찍 집안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이후 허황옥의 30세손으로 전하는 태인허씨(泰仁許氏)의 시조 허사문(許士文)이 등장한다. 그는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 877~943)의 부마(駙馬)였으며 시산군(詩山君)에 봉해졌다. 시산은 현재의 전북 정읍시 태인면이다. 그러므로 태인을 관향으로 한다. 이 태인허씨(泰仁許氏)에서 인천이씨(仁川李氏)가 분관되었고, 다시 인천이씨에서 양산이씨(梁山李氏)와 흥양이씨(興陽李氏)가 분관된다. 허사문은 허선문보다는 한 세대 이후의 인물로 판단된다.

또한 허황옥의 33세손으로 전하는 하양허씨(河陽許氏)의 시조 허강안(許康安)이 등장한다. 고려 현종(顯宗, 재위 1010~1031) 때 호부낭장(戶部郞將)을 역임하고, 말년에 호장(戶長)을 지내고 하주(河州, 후일 하양으로 개칭) 자사(刺史)가 되었다고 한다.

허황옥의 35세손으로 전하는 김해허씨(金海許氏)의 시조 허염(許琰)이 이들에 이어 등장한다. 그는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지내고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허염이 정확히 고려의 어느 왕 때 인물인가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의 5세(6세?)2)인 허유전(許有全, 1243~1323)의 생존 연대로 보아 그는 11세기 말에서부터 12세기 초에 활동하였던 인물로 유추된다. 현전하는 네 관향의 허씨 가운데 김해허씨가 문중의 형성이 가장 늦다.

[표1] 허씨문중의 고려-조선 과거급제자 통계

본관

고려문과

고려사마

무과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

합계

조선문과

진사

생원

양천허씨

고려 19

고려 3

116

3

4

0

0

고려 22

96

121

139

479

태인허씨

1

6

1

1

0

0

0

0

9

하양허씨

고려 1

고려 2

10

0

0

0

0

고려 3

16

10

13

49

김해허씨

고려 1

28

44

68

0

0

0

0

고려 1

16

156

고려 21

합계

고려 5

195

3

4

0

0

고려 26

129

165

197

693

 

[표1]에 표기된 숫자는 명수(名數)가 아니라 장수(張數)이다. 원래 전승되어 온 재래 보학에서는 명수를 세지 않고 장수로 세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외국인 한국학 연구자들이 명수를 세는데 집착하여, 우리나라의 사학계에서도 명수로 세어서 표기하는 변화가 일었다. 이를 절충하여 ‘몇 명 몇 장’ 하는 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표1]에서 보다시피 영천허씨문중에서는 고려시대에 19장의 문과급제자와 3장의 사마급제자를 내었다. 반면에 하양허씨와 김해허씨는 고려시대에 각기 1장의 문과급제자를 내었다. 이를 합하면 고려시대 허씨의 문과급제자는 모두 21장이 된다. 허씨가 고려조에서 21장의 문과급제자를 내었다는 것은 ‘여흥민씨’ 27장, ‘경주이씨’ 26장과 ‘광산김씨’ 23장, ‘안동권씨(安東權氏)’의 22장에 이은 ‘순흥안씨’ 21장과 공동 5위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한편 태인허씨에서 갈라져 나간 인천이씨의 고려시대 문과급제자는 20장이다.

[표2] 양천허씨 고려시대 급제자

성명

생졸년

급제년 방

과 등

許玄

 

경종 (재위

975~981)

 

許宣文

 

2

許元

 

997 정유방

갑과 2

許玄

許宣文

3

許慶

?~1115

선종 (재위

1083~1094)

 

 

 

미상

許純

1062~1144

1114 갑오방

을과 5

許載

許正

6

許利渉

 

1158 무인방

을과 2

許純

許載

7

許京

 

1176 병신방

을과 3

許利涉

許純

8

許遂

 

1219 기묘방

을과 2

許京

許利涉

9

許珙

1233~1291

1258 무오방

병과 2

許遂

許京

10

許冠

 

1303 계묘방

병과 1

許珙

許遂

11

許伯

?~1357

1317 정사방

을과 3

許冠

許珙

12

許絅

?~1354

1336 병자방

을과 3

許伯

許冠

13

許錦

1340~1388

1357 정유방

병과 5

許絅

許伯

14

許璡

1337~?

1360 경자방

동진사 6

許僐

許冠

13

許時

 

1362 임인방

병과 7

許僑

許冠

13

許溫()

 

1368 무신행구재친시방

6

許順

許富

13

許應

?~1411

1371 신해방

동진사 18

 

 

13

許乾

 

1374 갑인방

동진사 18

許僑

許冠

13

許操

 

1377 정사방

동진사 13

許湜

許瑄

14

許晐

 

1382 임술방

동진사 22

許完

許富

13

 

[표2]의 문과급제자 19인 가운데 허경(許慶, ?~1115)은 [양천허씨세보]에 누락되어 있다. 허경을 제외한 18명의 계대를 정리하면 아래의 [표3]과 같이 상하대(上下代)가 연결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6세 허순부터 14세 허금(許錦, 1340~1388)까지의 직계 9대가 한 대를 거르지 않고, 고려시대의 문과급제자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고려조에서 기록적인 일이다. [양천허씨세보]에 허금의 아들 허기(許愭, 1365~1431)는 1380년에 진사시에 입격한 것으로 나온다. 이들 양천허씨 고려조 인물들은 13~14세기에 최고의 문벌(文閥)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들 고려조의 양천허씨 집안은 안동권씨, 문화류씨 등의 고려 명문가 집안과 잦은 혼사를 갖은 것으로 확인된다. 한 예를 들자면, 양천허씨 시조 허선문의 사위가 안동권씨 시조 권행(權幸)의 아들 권인행(權仁幸)이다. 양천허씨와 안동권씨는 시조때부터 사돈이었으니, 안동권씨 전체는 양천허씨의 외손이 된다(사진 참조). 이런 연고로 미루어 보면, 그리고 [표3]에서의 계대 연결사항을 보면, 양천허씨도 이른 시기에 족도나 보도를 편성한 것으로 유추된다.

필자가 보기에는 10세 허공(許珙, 1233~1291) 대에 이미 편성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울러 1세부터 14세까지 아렇게 18명이 연결되어 문과에 급제하였다면, 그 계대는 확실하게 정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3] 양천허씨 고려시대 급제자

1[시조]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許宣文

許玄

許元

許正

許載

許純

許利渉

許京

許遂

許珙

許程

許瑄

 

 

 

 

 

 

 

 

 

 

 

 

許富

許順

許溫()

 

 

 

 

 

 

 

 

 

 

 

 

 

 

許完

許晐

許綿

 

 

 

 

 

 

 

 

 

 

 

 

許冠

許伯

許錦

許愭

許扉

 

 

 

 

 

 

 

 

 

 

 

許僐

 

 

 

 

 

 

 

 

 

 

 

 

 

 

許僑

許時

 

 

 

 

 

 

 

 

 

 

 

 

 

 

 

許乾

 

 

 

 

 

 

 

 

 

 

 

 

 

 

 

許應

 

 

 

 
[양천허씨세보] 시조 기록 부분, 1808년, 목판본. 허선문의 사위가 안동권씨 시조 권행의 아들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양천허씨세보] 시조 기록 부분, 1808년, 목판본. 허선문의 사위가 안동권씨 시조 권행의 아들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우리나라의 서지학에서는 고려전기에 생존했던 허진수(許珍壽)란 인물이 아주 유명하다. 그는 고려 정종12년(1046)에 김해부(金海府)의 호장(戶長)으로 있으면서, 국왕과 국가의 평화를 빌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복(冥福)과 살아계신 어머니의 수복(壽福)을 빌기위해 초조대장경 『대반야바라밀다경』을 찍었다는 내용의 발원문이 그 책 끝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허진수는 족보를 비롯한 사서에 기록으로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10~11세기 고려에는 기존에 알려진 허씨 외에 다른 허씨도 있었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3. 조선시대와 근대의 허씨

[표1]에서 보듯이 양천허씨는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96장을, 사마시에서 260장을 배출하였고, 무과에서 116장을 배출하였다. 태인허씨의 조선시대 문과급제자로 허사문(許斯文) 1장이 있다. 하양허씨는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16장을 배출하였다. 김해허씨는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16장을 배출하였다. 필자의 급제자수 통계는 일부 허씨문중의 통계보다 1장 정도가 더 많다.

양천허씨는 조선조에 와서는 재령군수(載寧郡守) 허손(許蓀)의 아들로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허종(許琮, 1434~1494)과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허침(許琛, 1444~1505) 형제가 뛰어났다. 한편 선조 때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허욱(許頊, 1548~1618)은 허종(許琮)의 현손(玄孫)으로 광해군(光海君) 때 능창군(綾昌君) 추대사건에 관련하여 원주에 유배된 후 배소(配所)에서 임종하였으나, 인조반정 후에는 청백리(淸白吏)로 녹선되었다. 이외에도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1580)과 교산 허균(許筠, 1569~1618), 허난설헌(許蘭雪軒)이 있다.

특히 숙종 때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은 송시열(宋時烈)과 쌍벽을 이루던 학자로 남인의 영수였으며 학문(學問)이 높았고, 문장(文章)·그림·서예(書藝)에 뛰어났다. 특히 전서(篆書)에 능하여 동방(東方)의 제일인자(第一人者)로 일컬어졌다. 구암(龜巖) 허준(許浚, 1539~1615)은 선조 때 명의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하였으며 호성공신삼등(扈聖功臣三等)에 올랐다. 그리고 허적(許積, 1610~1680)은 현종, 숙종때 세차례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탁남의 영수였으며, 재정의 고갈을 막기 위해 1678년(숙종 4)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유통시켰다.

태인허씨는 허씨 가운데 인구가 가장 적다. 태인허씨문중에서는 시조 허사문(許士文)의 둘째 아들 허도(許棹)의 후손이 분적하여 나가 인천이씨(仁川李氏)가 되었다고 한다. 인천이씨는 고려후기에 고려의 벌족이 된다. 하양허씨의 명인으로는 1390년(공양왕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허조(許稠, 1369~1439)가 있다. 또한 허임(許任)은 선조·광해군 때의 어의(御醫)로서 조선 제일의 침의(鍼醫)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1644년에 [침구경험방]을 간행하였다.

김해허씨는 한말의 13도의병대장 허위(許蔿, 1855~1908)를 배출한다. 독립운동가이자 LG그룹의 공동창업주 허만정(許萬正)이라든가, 3.1운동에 참가한 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였다가 광복후에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여 4.19가 일어나자 대통령 권한대행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과도내각수반 허정(許政)도 김해허씨이다.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에서 허씨들의 활동력은 일일이 지적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매우 크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는 양천허씨는 149,505명이 현전하는 것으로 조사되었고, 테인허씨는 태인허씨 6,870명, 시산허씨(時山許氏) 5,120명으로 합하여 11,990명으로 조사되었으며, 하양허씨는 20,608명으로, 김해허씨는 134,068명으로 조사되었다. 2015년 국내 거주의 허씨는 모두 316,171명이다.

4. 허씨문중이 편성한 족보

필자가 조사한 각 허씨문중이 조선시대에 편성한 중요한 족보를 소개하고자 한다.

(1) 양천허씨 족보

➀[양천허씨세보(陽川許氏世譜)], 1529년(기축보), 金安國 서, 초간보, 1책, 실전. /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필자는 양천허씨 선조의 경우에는 13세기 중반부터 가승을 적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한다. 양천허씨는 안동권씨나 문화류씨와 혼인 관계가 깊다. 1476년 [안동권씨세보]나 1565년 [문화류씨세보]의 여러 곳에 외손으로서의 양천허씨가 수록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1529년 [양천허씨세보] 기축보의 내용을 1565년 [문화류씨세보]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➁[양천허씨세보(陽川許氏世譜)], 1671년(신해보), 許穆 서, 재간보, 2책, 원본 필사본, 소장처 미확인.

➂[양천허씨세보(陽川許氏世譜)], 1742년(임술보), 許集-허창 서, 삼간보, 허휘 발, 6책, 소장처 미확인. → 1753년 계유보와 대비 필요,

➃[양천허씨세보(陽川許氏世譜)], 1753년(계유보), 許采 서(1750), 許彙 발, 6권6책,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양천허씨족보] 권지1, 1808년대, 목판본, 10권10책. [사진 제공 – 이양재]
[양천허씨족보] 권지1, 1808년대, 목판본, 10권10책. [사진 제공 – 이양재]

➄[양천허씨족보(陽川許氏族譜)], 1808년(무진보), 허술조 서, 허복천 발, 10권10책, 소장처 ; 필자, 양천허씨대종회. / 1808년 [양천허씨족보] 무진보 권1을 살펴보면, 마치 임진왜란 이전에 편찬된 족보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7단의 횡보로 선남후녀식의 순서로 등재하고 있지만, 권1 상계의 일부에서는 사위의 이름 위에는 출생한 순서를 숫자로 적고 있어, 사실상 권1의 상계에서는 출생순으로 등재한 효과를 갖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1529년 기축보에서 보여 주는 출생 순서를 선남후녀로 바꾸면서 이렇게 표시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1808년 무진보를 통하여 기축보의 원형을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1565년 [문화류씨세보] 을축보에 등재되어 있는 양천허씨의 같은 계대의 출생순을 비교하여 보면 대체로 일치한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출생순이 뒤바뀐 경우도 일부에서 보이기는 한다.

1808년 무진보는 조선중기와 후기의 다른 족보들과는 달리 외손의 본관도 밝힐 수 있는 만큼 밝히고 있고, 적서의 구별 등재도 분명하다. 다만 외손의 경우에는 외손자(外孫子)까지만 등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중요한 인물의 하대(下代)는 횡칸을 무시하고 작은 글씨로 적어서 등재한다.

1808년 [양천허씨족보] 무진보는 비록 편찬 연도가 늦기는 하지만, 상계대(上系代)의 혼인 관계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1476년 [안동권씨세보]나 1565년 [문화류씨세보]와 대비하며 고려시대의 계대와 혼인 관계를 교차 검증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조선후기의 1808년 무진보는 같은 시대 다른 문중의 족보 편집에 비하여 매우 우수하고 내용도 정확을 기하고 있다. 1671년 신해보와 1742년 임술보를 확보하여 1808년 무진보와 대비 연구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➅[양천허씨족보(陽川許氏族譜)], 1852년(임자보), 許傳 서, 12책, 소장처 ; 양천허씨대종회. 국립중앙도서관.

(2) 하양허씨 족보

➀[하양허씨세보(河陽許氏世譜)], 1610년대, 필사본, 1책(47장), 소장처 ; 필자. / 1990년대 중반 이전에 이 세보를 입수한 것 같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 서고에 보관하였다가 최근 꺼내서 살펴보니, 이 책에 수록된 인물들은 1615~6년 이후에 태어난 인물이 없다. 1751년(신미)에 [하양허씨세보] 초간 신미보가 나왔는데, 그 보다 130년 훨씬 전에 작성한 세보(世譜)로 규명된다. 400여년전에 하양허씨 누군가가 초보를 편성해 놓고, 간행할 비용도 권력도 없어 간행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양허씨세보], 1610년대, 원고본, 1책(47장). [사진 제공 – 이양재]
[하양허씨세보], 1610년대, 원고본, 1책(47장). [사진 제공 – 이양재]

➁[하양허씨세보(河陽許氏世譜)], 1751년(신미보), 許鏶 발, 초간보, 3권3책, 목활자본,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➂[하양허씨세보(河陽許氏世譜)], 1846년(병오보), 洪直弼 서, 許鎰 발, 24권3책, 敬菴宗家重刊, 목활자본,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➃[하양허씨세보(河陽許氏世譜)], 1909년(기유보), 宋秉珣 서, 許璿 발, 12권6책, 목활자본,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3) 태인허씨 족보

➀[태인허씨족보(泰仁許氏族譜)], 1698년(병인보), 초간보, 4권3책, 목판본, 소장처 ; 필자, 국립중앙도서관.

➁[태인허씨족보(泰仁許氏族譜)], 1823년(계미보), 許鋏 서, 許廉 발. 4권4책, 목활자본,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권4 결).

(4) 김해허씨 족보

➀[김해허씨족보(金海許氏族譜)], 1761년(신사보), 李存中 서, 許瑗 발, 초간보, 6권6책, 松川開刊 목활자본,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➁[김해허씨세보(金海許氏世譜)], 1813년(계유보), 李羽晋 서(1811), 許鏛 발, 7권7책, 목활자본,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➂[김해허씨족보(金海許氏族譜)], 1857년(정사보), 李應寅 서, 許駃 발, 10권10책, 矗城 忠烈院 活印, 목활자본,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5. 맺음말

필자는 허씨에 관하여 아주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1991년 초반에 허씨 누군가가 나를 허양재라 불렀다. 나는 질색하였지만, 광주이씨(廣州李氏)인 나를 여러 허씨(許氏)들이 동족으로 대우해 준 것이기에 살며시 웃음을 띄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나는 허준 선생의 묘소를 민통선 안에서 찾아 냈다. 나는 미수 허목 선생의 글씨를 아주 좋아한다. 허균이 실천하려 했던 사회 혁신의 길에 대하여 깊이 존중한다. 이제는 미수와 교산의 글씨는 한 눈에 보아도 안다.

필자는 이번에 허씨의 족보와 여러 자료를 통하여 고려시대의 허씨들을 재차 탐색하면서, 고려초에 왕건을 도왔던 양천허씨 시조 허선문(許宣文)과 안동권씨 시조 권행(權幸), 그리고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柳車達) 등의 고려말 조선초기 자손들을 살펴보았다. 이들은 얽히고설킨 혼맥의 한 덩어리였다. 고려조의 그 얽히고설킨 혼맥은 서로가 모두 “누구?”라고 지칭하면 알만한 사람들이 되었고, 그들 무리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조선 사회의 지배층으로 군림하였다.

오늘날도 그 시대와 유사한 얽히고설킴이 있다. 깊이 생각해 보면 글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사회지배의 원리가 보이고, 그것을 깨는 방법도 보인다. 그러나 마음의 심연에 기다란 낚싯대를 드리운다. 금년 한 해도 어느덧 이렇게 저물어 간다.

주(註)

1) 필자, ‘가야국의 실체와 『가락국기』’,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27),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847

2) 규장각 소장의 [등과록(登科錄) 전편(前篇)]에 의하면, 김해허씨 허유전의 초명은 허전(許全)이고 부는 허폐(許獘), 조는 허연(許延), 증조는 허자(許資)라고 한다. 그러나 족보에는 허유전의 부친이 허연으로, 조부가 허자로 나와있어, 부친 허폐가 삭제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고려사] 열전의 ‘허유전’전에는 그의 초명이 허안(許安)이라 기록하고 있다.

근거 자료

본인

증조

고조

자료 소장처

登科錄 前篇

許有全 (許全)

許獘

許延

許資

 

규장각

金海許氏族譜

許有全

許延

許資

許君彦

許琰

필자

高麗史 列傳

許有全 (許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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