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 (식민역사문화청산회의 공동대표)
필자는 지난 9월 17일부터 26일까지 제주시 오등동에 있는 ‘헤리티크 제주 컨벤션’ 3층 홀에서 ‘광복80주년-기독교전래 140주년 특별전 [어둠속에 빛의 길]’을 진행하였다. 그 전시 기간이던 9월 24일부터 26일까지 번개전으로 ‘한국명문족보전’을 병행하였다.
번개전을 준비하면서 필자가 기존에 소장하였던 170여 문중의 옛 족보 가운데 40여 문중의 옛 족보를 선정하는 가운데, 30여 년 전에 입수한 [부안김씨족보] 필사본을 내용서지학 관점에서 재검토하였다. 그 결과 이 필사본 족보는 기존에 판단했던 1741년도 편찬본이 아니라, 1584년 [부안김씨족보] 갑신보 사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제 이 갑신보를 바탕으로 하여 본 논고를 쓴다.
1. 부안김씨에 관하여
부안김씨의 관향지 부안(扶安)은 전라북도 남서부 변산반도에 있는 지역이다. 원래 백제 때에는 개화현(皆火縣)이었다가 후기 신라에는 부령현(扶寧縣), 계발(戒發)이라 하였다. 이후 1414년(태종14)에 보안(保安)과 부령현(扶寧縣)을 합하여 지금의 부안현(扶安縣)으로 개칭되었다. 부안김씨가 고려 때 문과급제자 6장과 사마급제자 1장을 낸 것을 보면, 처음에는 부령김씨(扶寧金氏)라고 하였다가, 조선 태종조 쯤에 이르러 부안김씨(扶安金氏)로 칭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부령김씨와 부안김씨라는 호칭은 혼용되었다.
우리나라 토성(土姓)으로서의 김씨는 크게 나누어 신라의 알지(閼智, 65~?) 계 김씨가 있고, 가야의 수로왕(首露王, ?~199) 계 김씨가 있다. 신라의 알지 계 김씨는 대부분 경순왕(敬順王, ?~979, 재위 927~935)의 후손이라 주장한다. 특히 부안김씨 문중에서는 경순왕의 태자(太子, 917년경~?)를 시조로 하고 있다. 따라서 부안김씨는 신라김씨의 장손 집안이라 주장한다. 부안김씨가 경순왕 태자의 후손이라면 논리적으로는 신라김씨의 큰 집안이라는 주장은 옳다.
문제는 경순왕의 태자를 마의태자라고 하고, 그 태자의 이름이 김일(金鎰)이라는데 있다. 경순왕의 태자가 마의(麻衣)를 입고 고려에 항복하는 경순왕을 떠났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마의태자라는 별칭은 일제 강점기에 소설가들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고, 경순왕 태자의 이름이 김일(金鎰)이라는 것은 1784년에 발견된 [김은설묘지명(金殷說墓誌銘)](968년)에서 경순왕의 장자로 ‘일(鎰)’을 언급하고 있는데 있다.1) 즉 경순왕 태자의 이름이 김일이라는 것은 1784년에 와서야 알려진 사실이다.
1584년 부안김씨 갑신보를 보면 경순왕의 태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경순왕으로부터 시조 김경수(金景修)에 이르기까지의 계대는 한 사람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 부안김씨문중에서는 시조 김경수가 경순왕 태자의 후손이라는 구전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1784년에 그 태자의 이름이 확인됨으로써, 그 이후에 나오는 족보에서야 경순왕의 큰아들로 김일을 기재하였으므로, 1584년 갑신보에는 경순왕 아들의 이름이 안 나오는 것이 정상이다.2)
[표1] 부안김씨문중의 [부안김씨 분파도] 일부
2. 부안김씨문중의 과거 급제자
2015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부안김씨 인구수는 69,157명으로, 고려시대에 중시조를 둔 명문가로는 의외로 인구수가 적다. ‘디지털 부안문화대전’(https://www.grandculture.net/buan)에 의하면, 부안김씨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에 뽑힌 사람이 108인이고, 대과(大科)인 문과 급제자가 28인, 무과 급제자가 55명이며, 공신(功臣)으로 녹훈된 사람도 30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을 검색하여 보면 조선시대 문과 27장, 진사 41장, 생원 34장, 무과 9장, 역과 4장, 율과 3장 등 모두 118장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여 [표2]와 같이 정리된다.
[표2] 부안김씨문중의 과거급제자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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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
고려 사마 |
무과 |
역과 |
의과 |
음양과 |
율과 |
합계 |
|
|
진사 |
생원 |
|||||||
|
(고려 6) |
(고려 1) |
9 |
4 |
0 |
0 |
3 |
7 |
|
|
27 |
41 |
34 |
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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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3] 부안김씨문중의 고려조 문과-사마 급제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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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생졸년도 |
급제년도 |
과 |
위 |
|
김정립(金鼎立) = 김의(金宜) |
|
1204 희종 즉위년 |
갑자 갑자방 |
2위 / 30인 |
|
1204 희종 즉위년 |
갑자 갑자방 을과 |
3위 / 30인 |
||
|
김구(金坵) |
1211~1278 |
1232 고종 19년 |
임진 임진방 을과 |
2위 / 31인 |
|
김숙우(金叔盂) |
|
1290 충렬왕 16년 |
경인 경인방 동진사 |
13위 / 31인 |
|
김승인(金承印) |
|
1289 충렬왕 15년 |
기축 진사시 |
장원 / 70인 |
|
1290 충렬왕 16년 |
경인 경인방 동진사 |
18위 / 31인 |
||
|
김여우(金汝盂) |
|
미상, 충렬왕 ?년 |
미상 |
미상 |
또한 부안김씨가 고려시대에 문과급제자 6장과 사마급제자 1장을 내었다는 사실([표3])도 확인되는데, 이것은 성주이씨(星州李氏)와 같은 장 수로서 적은 수가 아니다. 부안김씨의 고려 때 문과급제자는 주로 13C 중기와 후기에 활동한 인물이라면 성주이씨는 주로 14C의 인물이다. 즉 고려조에서는 부안김씨가 성주이씨보다는 일찍 두각을 나타냈다.
이상의 부안김씨 고려조 문과 및 사마급제자 5인은 모두 7장의 급제자를 내었으며, 이들 5인은 김의(金宜)와 그의 아들 지포 김구(金坵, 1211~1278), 그리고 세 손자이니, 모두 3대에 걸친 일가족이다. 부안김씨의 계보를 검토해 보면 김의(金宜)와 그의 아들 지포 김구는 사실상 부안김씨를 중흥시킨 인물이다.
김구는 1222년(고종9)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성균관 진사에 오르고,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원부사록(定遠府司錄)과 제주판관(濟州判官)을 거쳐 원종(元宗, 재위기간 1259∼1274) 때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에 다녀와 「북정록(北征錄)」을 집필하고 40여 년간 벼슬을 역임한다.
김구의 아들 삼 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는데, 장남 김여우(金汝盂)는 충렬왕(忠烈王)이 세자(世子) 시 원(元)나라에 4년간 볼모로 가 있을 때 이를 호종한 공(功)으로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올랐고, 차남 김종우(金宗盂)는 수창궁(壽昌宮) 녹사(錄事)를 거쳐 전교시부령((典校寺副令)을 지냈으며, 셋째 김숙우(金叔盂)는 서도판관(西都判官), 막내 김승인(金承印)은 강릉존무사(江陵存撫使)와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
3. 부안김씨 계보는 언제 기록되기 시작하였을까?
부안김씨 계보는 언제 기록되기 시작하였을까? 이 점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1584년 [부안김씨족보] 갑신보가 나왔다고 해도, 이 1584년 갑신보에 수록한 계보는 1584년(선조17년)에 창작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1584년 [부안김씨족보] 갑신보에 의하면 김구의 6세조 김경수(金景壽)는 경순왕의 후손이지만, 경순왕으로부터 김경수에 이르는 계대에서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김경수는 경순왕의 6세손으로 하고 있다. 이 김경수의 5세손이 김의(金宜)인데, 그가 지포 김구의 부친으로 부안김씨문중의 첫 문과급제자이다. 김의의 초명(初名)은 김정립(金挺立)이며, 이명(異名)으로는 김정립(金鼎立)이라고도 한다. 갑신보에 경순왕부터 김구의 아들 김여맹에 이르는 13세의 계대는 다음과 같다.
|
傅 |
金 -> |
金 -> |
金 -> |
金 -> |
|
金 -> |
吏部尙書
|
領議政 |
戶長副正 |
吏部尙書 |
|
平章事僕射 |
文貞公 |
文翰公 |
|
|
이러한 1584년 [부안김씨족보] 갑신보에서 보면 부안김씨의 시조 김경수(金景修)의 손자대(孫子代)부터 배위(配位)가 기록되어 있다. 김의로부터 조부대(祖父代)이다. 김의가 과거에 급제한 이후 벼슬을 하면서 자신의 인적 사항을 관부(官府)에 이와 같은 기록을 적어 넣었을 것이다. 김의로부터 고조부까지의 5세는 13세기 초에 김의가 기억한 계대이며, 그 이상은 경순왕의 11세손이라는 정도만 구전으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부안김씨의 계도는 김의(金宜)와 김구(金坵) 부자대(父子代)에서 상계대(上系代)를 기록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4. 현재 문중에서 주장하는 부안김씨 상계대(上系代)의 문제점
김광(金光)은 당시 문중 전래의 계보를 수집하여 1574년경에 [부안김씨족보]를 편찬하였고, 십 년이 지난 1584년에 간행하였다. 이 갑신보는 임진왜란 때 대부분이 소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7년(1592~1598)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나고 176년이 되도록 부안김씨문중은 달리 족보를 내지 않았다.
부안김씨문중에서는 1584년 갑신보 이후의 대동보는 375년 후에 편찬된 1959년 기해보로 본다. 1584년부터 1959년 사이에는 각 파마다 파보로서의 초간보를 내었다. 그 파보의 가장 이른 연대의 것이 사직공파의 1785년 을사보이다.3)
조선시대에 편찬된 부안김씨 각 파보를 교차 연구하여야 하겠지만, 우선 1584년 갑신보와 현재 문중에서 주장하는 상계대에서는 다른 점이 보인다. [표4]의 [부안김씨 분파도]를 보면, 29세 태자 일(鎰)로부터 32세 경수(景修), 즉 부안김씨의 시조 김경수는 경순왕의 5세기 된다. 경순왕(敬順王, ?~979)은 10세기 중후반의 인물이며, 경순왕의 태자도 왕건의 고려 건국할 때 이미 태자로서 신라의 멸망을 비통해 한 인물이다. 경순왕 태자의 후손이라는 김구(金坵, 1211~1278)는 1211년에 태어난 인물이다. 태자로부터 300년 후의 인물이다.
김구는 김경수의 6세이다. 즉 김구는 경순왕 태자의 9세라는 셈이다. 그러나 10세기 초반에 생존했던 태자의 8대손이 1211년에 태어난 김구라면, 그 간격의 세월 300년 동안 8대가 대체로 40세에 득남했다는 말이 된다. 고려초의 “평균 수명이 얼마였을까?”를 생각해 보면, 300년간 10대 이상이 내려와야 한다. 1584년 갑신보에 나타난 대로 김구는 경순왕의 10세손이 아니라 12세손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것을 보면 후대에 1584년 [부안김씨족보] 갑신보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휘자(諱字) 불명(不明)의 2대가 증발하며, 은둔공 김기로(金箕輅)와 은거공 김희보(金希寶)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계대를 확정한 것으로 분석된다.
[표4] [부안김씨 분파도] 부분
1584년 부안김씨 갑신보는 [부안김씨족보]의 표준으로 보아야 하지만, 편찬 간행된 후에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이 소실되고 한 부 정도가 남아 비전하였고, 그 한 부의 필사본이 각기 복수(複數)로 제작되었다. 그 필사본이 1990년대에 필자에게 수집되었음을 이번 번개전을 준비하며 확인한 것이다.
5. 1584년 [부안김씨족보] 갑신보와 부안김씨문중 편찬 족보에 관하여
조선시대에 부안김씨문중에서 편찬한 중요 족보는 [표5]와 같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족보는 1584년 5월에 김광(金光)이 편찬한 [부안김씨족보] 갑신보이다. 그런데 김광이 쓴 서문에서, 자신의 당숙 이조정랑(吏曹正郎) 김석필(金錫弼)이 [부령김씨족보(扶寧金氏族譜)]를 목판본으로 간행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김석필은 연산군 12년경에 이조좌랑을 지냈고, 1506년 그에게 내린 [정국원종공신록권(靖國原從功臣錄券)]에는 ‘吏曹正郎 金錫弼’이라 되어 있어 그가 중종반정에 참여하였을 때 이조정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김광의 1584년 갑신보 서문에서 언급한 김석필이 [부령김씨족보]를 간행한 시기가 이조정랑직에 있었던 때이니, 그 시기는 1506년경이다. 당시까지의 부안김씨 인구수를 미루어 보면, 1506년경 족보는 20장 내외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표5] 부안김씨문중에서 편찬한 족보 목록 (연도순)
|
번 |
명칭 |
연도 |
서발 |
판종 |
권책 |
소장처 |
|
1 |
扶寧金氏族譜 |
1506년경 |
金錫弼 편 |
목판본 |
1책 |
실전 |
|
2 |
扶安金氏族譜 |
1584년 |
金光 서 |
목판본 |
12권1책 |
필자(1741년 필사) |
|
3 |
扶安(扶寧)金氏族譜 |
1774년 |
|
목활자본 |
2권2책 |
필자 |
|
4 |
扶寧金氏世譜-司直公派 |
1785년 |
金東灝 서, |
목활자본(?) |
2권 |
부안김씨 |
|
1860년 |
미확인 |
미확인 |
2책 |
부안김씨연구소 |
||
|
1897년 |
미확인 |
미확인 |
4책 |
부안김씨 |
||
|
5 |
扶寧金氏承旨公派譜 |
1801년 |
宋煥箕 서. |
미확인 |
미확인 |
미확인 |
|
扶寧金氏承旨公派世譜 |
1845년 |
宋達洙 서(1846), |
목활자본 |
3권4책(?)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
|
1897년 |
미확인 |
미확인 |
미확인 |
미확인 |
||
|
6 |
扶寧金氏族譜-少監公派 |
1824년 |
미확인 |
초보(?) |
미확인 |
미확인 |
|
扶寧金氏世譜-少監公派 |
1870년 |
미확인 |
미확인 |
미확인 |
미확인 |
|
|
7 |
扶寧金氏世譜-直長公派 |
1833년 |
宋欽大 서, 洪冕周 계보서, 申淳 파보서 |
목활자본 |
4권4책 |
국립중앙도서관 |
|
1882년 |
미확인 |
미확인 |
3책 |
부안김씨 |
||
|
1907년 |
미확인 |
미확인 |
미확인 |
미확인 |
||
|
8 |
扶安金氏族譜-持平公派 |
1835년 |
미확인 |
미확인 |
미확인 |
미확인 |
|
1868년 |
미확인 |
미확인 |
3책 |
부안김씨 |
||
|
1905년 |
미확인 |
미확인 |
4책 |
부안김씨 |
||
|
9 |
扶寧金氏侍直公派譜 |
1836년 |
미확인 |
미확인 |
2책 |
부안김씨 |
|
1867년 |
미확인 |
미확인 |
미확인 |
미확인 |
||
|
1907년 |
미확인 |
미확인 |
미확인 |
미확인 |
||
|
10 |
扶寧金氏世譜-少尹公派 |
1863년 |
미확인 |
초보(?) |
미확인 |
미확인 |
|
1880년 |
미확인 |
미확인 |
2책, 또는 4책 |
부안김씨연구소 |
||
|
11 |
扶寧金氏侍丞公派世譜 |
1871년 |
미확인 |
미확인 |
2책 |
부안김씨 |
|
12 |
扶安金氏世譜-左承旨公派 |
1868년 |
미확인 |
미확인 |
3책 |
부안김씨 |
|
13 |
扶安金氏正兵校尉公派譜 |
미확인 |
미확인 |
미확인 |
미확인 |
미확인 |
그런데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1584년 [부안김씨족보]를 기준으로 보면 부안김씨는 조선시대에 족보를 간행한 30번째 쯤 되는 문중이지만, 김석필이 1506년경에 족보를 편찬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면 부안김씨문중은 조선시대에 족보를 편찬한 14번째 쯤 되는 문중이다.
김광은 김석필이 편찬한 족보의 보명은 [부령김씨족보(扶寧金氏族譜)]이고 목판본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였지만, 김석필이 쓴 서문은 남아 있지 않다. 김석필의 편찬본은 서문이나 발문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조선시대의 많은 족보들이 서문이나 발문 없이 간행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러한 서지학적인 관점에서 조선시대에 부안김씨문중에서 편찬한 족보를 정리하면 [표5]와 같다.
위의 [표5]는 부안김씨연구소에서 정리한 [부안김씨 족보 전승도]를 참고하여 연도별로 재정리한 것이다. [표5]에서 보듯이 부안김씨문중에서 신분제가 무너진 갑오경장 이전에 편찬한 족보 및 파보는 모두 12종이다. 이 가운데 순조 말년(1834년)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에 간행된 옛 족보는 7종이며, 정조 말년(1800년)까지 간행된 족보는 4종이다. 그 4종 가운데 2종의 원본이 현전하며, 임진왜란 이전에 편찬 간행한 2종의 족보의 원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다만 1584년 [부안김씨족보] 갑신보를 1741년에 베껴 쓴 필사본은 현전한다.
서두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번(2025년) 9월 17일부터 26일까지 제주시 오등동에 있는 ‘헤리티크 제주 컨벤션’ 3층 홀에서 ‘광복80주년-기독교전래 140주년 특별전 [어둠속에 빛의 길]’을 진행하면서, 그 전시 기간이던 9월 24일부터 26일까지 번개전으로 ‘한국명문족보전’을 병행하였다. 이 번개전에서 필자는 기존에 소장하였던 170여 문중의 옛 족보 가운데 40여 문중의 옛 족보를 선정하여 전시하였다. 그 전시물로 출품하기 위하여 30여 년 전에 입수한 [부안김씨족보] 필사본을 내용서지학의 관점에서 검토하였다.
6. 1584년 [부안김씨족보] 갑신보 해제
2020년 5월 부안김씨족보연구소(소장 김형선)이 발행한 [부안김씨족보(만력 갑신)] 2020년 영인본(이하 영인본)4)과 필자 소장(이하 백민본)을 비교 검토한 결과 필자 소장의 1741년 필사본은 1584년 갑신보를 옮겨 베껴 쓴 것임이 확인되었다.
[백민본 [부안김씨족보] 갑신보 필사본 해제]
계도 - 40장, 김광 서문 - 반장, 김상후(金商垕) 지 – 1장 반, 문한학사 김선생 책권(文翰學士金先生冊卷, 지원29년 - 1292년) – 1장. 모두 43장. 장정은 오침(五針) 선장본(線裝本)이고, 종이는 닥지(楮紙)에 세로 발이다.
표제(表題); 부안김씨족보(扶安金氏族譜), 내제(內題); 부령김씨족보(扶寧金氏族譜). 장차(張次)와 세대수(世代數) 및 횡칸(단) 표시 없음, 시조(始祖) 표시 없음.
장1 – 김씨세보(金氏世譜).
장2~장40 - 부안김씨족보(扶安金氏族譜) 신증(新增)5) / 계도(系圖).
장41 앞면 – 만력(萬曆) 갑신(甲申) 오월(五月) 후예(後裔) 김광(金光) 근지(謹識).6)
장41 뒷면 – 세(歲) 신유(辛酉) 유화(流火, 음력 7월) 상완(上浣) 상후(商垕) 지(識).
장42 – 세(歲) 신유(辛酉) 칠월 일(七月 日) 김상후(金商垕).
장43 - 문한학사 김선생 책권(文翰學士金先生冊卷, 지원29년 – 1292년).
이상 43장.
영인본과 백민본을 대비하여 보면 내용상의 차이는 몇 곳에 불과하다. 영인본에는 백민본에 없는 상대와 하대의 연결 장(張)을 적고 있지만, 형태로 보았을 때 백민본이 2020년 영인본보다 1584년 갑신보 원본을 충실히 베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영인본은 필사 연도와 필사자를 밝히지 않고 있지만, 백민본은 필사 연도와 필사자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1584년 갑신보 필사본은 영인본이든 백민본이든 김광의 지(識)가 권말에 들어가 있다. 백민본은 김광의 지 뒤에 김상후(金商垕)의 신유년(辛酉年) 지를 두 편이나 덧붙여 쓰고 있다. 영인본은 복사에 복사를 거듭하여 영인본 발행할 때 종이 바탕을 수차 수정하여 판독율이 떨어지지만, 백민본은 필사 원본이므로 판독율이 매우 양호하다. 또한 영인본은 사주와 판심을 그려 넣었지만. 백민본은 원형을 그대로 옮겨 베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백민본을 검토하여 보면 사주는 그려져 있지만 판심(版心)과 장차(張次)는 없다.
백민본은 영인본보다 먼저 필사 복제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영인본은 백민본에 없는 부분이 극히 몇 곳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민본은 거의 완벽한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영인본은 상하가 손상된 것을 복원한 상태이다. 그리고 영인본은 영인하면서 좌우의 폭보다는 상하의 길이를 더 짧게 축소하였다. 그런데 백민본에 장차와 판심이 없다는 것은, 이 책의 1584년 원 목판본을 그대로 베낀 것으로 보아 1584년 원 목판본은 두루마리(軸本)로 제책할 수도 있도록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편성의 예는 1545년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 을사 초간보의 예와 동일하다. 이렇게 두루마리로 제작할 수 있는 상태로 보았을 때, 1584년 [부안김씨족보] 갑신보는 사찰판본일 가능성이 높다.
7. 맺음말
필자는 이상에서 부안김씨의 고려 때 문중 형성 시작과 계도의 출현, 그리고 조선시대에 문중에서 편찬 간행한 여러 족보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고찰 결과 부안김씨문중에서는 정조(正祖) 시기부터는 족보를 파보로 발행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각파마다 초간 파보가 있다.
부안김씨문중에서 편찬한 족보를 탐색하면서, 1584년 갑신보는 편성한 지 10년이 지난 후에 부안과 장수에서 목판으로 분각(分刻)하여 간행하였음과, 또한 갑신보 이전에 김석필이 이조정랑에 있던 1506년경에 부령김씨 족보가 목판본으로 간행되었음을 김광의 1584년 지문(識文)을 통하여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부안김씨 1584년 갑신보는 지금까지 주장되어 온 초간보가 아니라 분명 재간보이다.
그리고 아울러 좀 까다로운 문제이지만 부안김씨문중에서 현재 주장하는 상계대가 재간보와 차이가 있음도 이번 탐색에서 지적하였다. 문중에서 이 지적이 불편하더라도 이 고찰은 학구적 탐색이니 양해를 바란다. 이번에 필자에 의하여 1584년 갑신보의 또 다른 필사본이 확인되었듯이 1506년경에 간행한 [부령김씨족보]도 출현하였으면 한다. 어딘가에 비장되어 있을까?
추신 : 1584년 [부안김씨족보] 2020년 영인본을 제공해 주신 김형선 부안김씨연구소장에게 감사드린다.
주(註)
주1) 968년에 만들어진 이 [김은설묘지명] 지석(誌石)은 1784년(정조8년)에 개성시 오령산에서 출토하였으나, 현재 실물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 내용이 [경주김씨족보]에 간략하게 인용되어 있고, 필자는 그 지석은 인용된 문장으로 보아 실제로 출토된 사실이 있음을 인정한다.
“新羅敬順王金傅第四子, 侍中侍郞, 有高麗平章事殷說, 卒于戊辰三月初四日己丑. 葬于城北十里鍾岩下五龍山南麓, 雙龍合金壬坐之原. 兄則鎰, 次鍠, 次鳴鍾, 弟曰重錫, 曰鍵, 曰鐥, 曰鍾, 子江陵君泰華.”
번역문 ; “신라 경순왕 김부의 넷째 아들로, 시중 시랑(侍中 侍郞)이자 고려의 평장사인 은설(殷說)이 무진년(968) 3월 초4일 기축일에 세상을 떠났다. 도성 북쪽 10리〈에 있는〉 종암 아래 오룡산 남쪽 기슭에 두 마리 용이 모이듯이 산줄기 둘이 합쳐지는 곳의 북쪽(壬坐) 언덕에 장사지내었다. 형은 김일(金鎰)이고, 다음은 김굉(金鍠)이며, 다음은 김명종(金鳴鍾)이다. 아우는 김중석(金重錫), 김건(金鍵), 김선(金鐥), 김종(金鍾)이고, 아들은 강릉군(江陵君) 김태화(金泰華)이다.”
주2) 부안김씨문중에서 시조 김경수가 경순왕의 7세라는 것은, 즉 경순왕으로부터 시조 김경수에 이르는 5대의 이름이 일실(逸失)되었지만, 시조 김경수가 경순왕의 7세라는 것은 고려말부터 오랫동안 부안김씨문중에 구전되어 내려왔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1845년 [부령김씨승지공파세보(扶寧金氏承旨公派世譜)] 을사보는 1846년에 송달수(宋達洙, 1808~1858)가 쓴 서문이 판각되어 들어있고, 실제로 수단한 인물들의 하한선에 순조(純祖, 재위 1800~1834)와 간지가 보여, 순조가 사망한 이후 헌종조에 편찬된 파보인데, 이 파보에서도 경순왕 태자의 이름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경순왕으로부터 5대의 휘자를 잃었음을 적고 있다.
주3) 2023년 현재까지는 부안김씨문중의 18세기 족보는 1785년 사직공파 을사보가 유일하다. 필자가 2023년 1월부터 ‘광주이씨대종회 회보’에 ‘이양재의 옛 족보이야기’를 연재하면서 1774년 [부안(부령)김씨족보] 갑오보 2권2책(목활자본)을 소장하고 있음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1774년 갑오보는 부안김씨문중의 족보 발간 이력에는 빠져있다. 아직 문중에서는 그 존재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주4) 2020년 영인본의 모본은 부안김씨대종회에 복사물로 비치되어 있던 사본이다. 그 사본의 원본, 즉 필사본은 문중에 있었으나 일실(逸失) 되었다. 영인본은 그 복사물에 판심과 사주를 그려 넣었고 장차를 메겼으나, 기본적인 내용은 계대를 잇는 선 마저 똑같다.
주5) 여기서 신증(新增)이라 한 이유는 1506년경 김석필의 [부령김씨족보]를 ‘새로 증보’했다는 의미이니, 김석필 편찬본이 초간보임을 확실히 한 것이다.
주6) 扶寧金氏族譜吾堂叔吏曹正郎諱錫弼公所纂也。 年代旣久板多遺失余用慨然與 外裔李永孝更加纂錄。 稍似詳備欲遂入梓以廣其傳力 綿未就殆將十年會 金公諱景憲 楊公諱大樹來守兹邑皆系聯吾譜助其工役之費而 吾族姪壽福適作宰長水縣爲之 分刻不數月功告訖何其幸歟。 萬曆甲申 五月日 後裔光謹識。
번역문 / 부령김씨(扶寧金氏) 족보(族譜)는 우리 당숙(堂叔) 이조정랑(吏曹正郞) 휘(諱) 석필공(錫弼公)께서 편찬하신 바이다. 연대(年代)가 오래되어 판목(板木) 유실(遺失)이 많으므로 유감(有感)스럽게 생각하여, 외예(外裔) 이영효(李永孝)와 다시 찬록(纂錄)하니 전(前)보다 자상(仔詳)하다. 곧 판출(板出)하여 널리 전(傳)하게 하고자 하나 재력(財力)이 부족(不足)하여 자못 십 년이나 미루다가 마침 김공(金公) 경헌(景憲)과 양공(楊公) 대수(大樹)가 부안현감(扶安縣監)으로 오셨으니, 다 우리 보첩(譜牒)과 관련이 있어 인쇄비(印刷 費用)를 보조(補助)하고 마침 족질(族姪) 수복(壽福)이 장수현(長水縣) 원님이 되어 판목(板木)을 나누어 판각(板刻)하게 되어 수개월이 못 되어 끝마치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多幸)이지 않으랴. 만력(萬曆) 갑신(甲申) 오월(五月) 일(日) 후예(後裔) 광(光) 근지(謹識).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