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줄무늬 호랑이와 표범이 결합한 호랑이 그림이 유행한다.
단원 김홍도의 줄무늬 호랑이 그림 이후로 변화가 생긴 것이다.
당시 표범은 줄무늬 호랑이보다 최소 5배 이상 많았다.
줄무늬 호랑이, 표범 그림이 각각 발전하지 않았다.
호랑이 그림은 독자 발전했으나 표범은 줄무늬 호랑이에 흡수된다.
원인은 대중화에 있다.
대중문화는 비빔밥 특성이 있다. 좋은 요소로 하나로 합치면 한 점 값으로 두 점을 사는 가성비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 양반들이 독점했던 청나라 문화가 대중까지 확산했다.
중국의 표작도(豹鵲圖, 중국 세화 신년보희도, 송희작표도)에서 까치호랑이가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중국의 표작도(豹鵲圖)는 소나무, 표범, 호랑이, 까치, 오동나무, 원숭이와 같은 다양한 소재로 그린다.
그중에 까치와 호랑이 요소만 특정하여 지칭한 것이다.
작호도(鵲虎圖-까치와 호랑이 그림)라는 용어는 우리 전통 그림에서 사용된 적이 없다.
그냥 ‘맹호도’, ‘호도’, ‘범 그림’ 따위로 불렀다.
까치 호랑이라는 말은 1970년대 일부 세력이 만들어 퍼트렸다.
호랑이 그림은 고급이었다.
그리기도 어려운 데다가 값이 비쌌다. 더욱이 ‘양심을 실천하는 용맹한 군자’라는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선의 백성은 정치의 수혜자였다.
용맹한 군자는 백성이 아니라 선비나 양반의 가치였다.
백성들은 호랑이를 산군, 산신령 개념으로 수용했다.
산군(山君)은 자연재해, 역병, 악귀 따위를 물리치는 역할이다.
군자의 정치를 수혜자인 백성의 내용으로 바꾼 것이다.
까치의 상징은 ‘내면의 즐거움-철학적 쾌락’이다.
백성들은 어렵고 심오한 까치의 상징을 수용하지 않았다.
청나라에서 수입된 작호도에서 까치는 ‘좋은 소식’의 뜻이다.
심오한 내용이 아니다. 까치의 울음소리를 밝은 웃음소리, 기쁜 소리, 기쁜 소식으로 수용한 것이다.
호랑이 그림이 대중화하는 과정에서 청나라의 까치가 결합한 것이다.
따라서 까치호랑이가 중국에서 수입된 새로운 그림이라는 말은 얄팍한 정치적 공세에 불과하다.
이 말을 인정하면, 조선의 호랑이 그림의 전통을 완전히 끊긴다.
백성들이 전통 호랑이 그림을 부정하고 청나라에서 수입한 호랑이 그림으로 대체했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까치호랑이 그림을 일제 총독부에서 의도적으로 키웠다.
호랑이를 양반 지배계급, 까치를 피지배 백성으로 대립시켜 이간질하고, 일본이 까치 편을 들어 조선을 해방시켰다는 논리를 퍼트린 심리전 그림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까치 호랑이 그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 빠르게 사라졌고, 그 자리를 채운 호랑이 그림이 나타났다. (계속)


중국의 표작도(豹鵲圖, 중국 세화 신년보희도, 송희작표도)에서 까치호랑이가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중국의 표작도(豹鵲圖)는 소나무, 표범, 호랑이, 까치, 오동나무, 원숭이와 같은 다양한 소재로 그린다.
그중에 까치와 호랑이 요소만 특정하여 지칭한 것이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