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 (식민역사문화청산회의 공동대표)
최근 능성구씨문중은 조선시대의 사대성을 벗어 던지고, 스스로 씨족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다. 능성구씨는 백제나 마한 계열의 후손으로서, 후 삼국시대에 드러나기 시작한 우리 민족의 토성(土姓)으로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민족적인 주체성과 씨족으로서의 정체성이 자주적으로 확립되는 현상이다.
1. 구씨(具氏)는 백제계 토성(土姓)
능성구씨(綾城具氏)는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을 본관으로 한다. 시조 구존유(具存裕)는 고려의 공신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重大匡)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을 지냈다고 하는데, 그는 13세기 초의 인물이다.
능성구씨의 시조 구존유 이전에 구씨 성을 쓴 역사상의 인물로는, (후)백제의 장군 구도(具道)와 그의 아들 구단서(具端舒)가 있다.
660년 백제가 망한 이후, 후기 신라는 백제 유민들을 온전히 신라인으로 포섭하는 데는 끝내 실패하고, 백제는 망한 지 약 230년 만에 (후)백제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880년대 말부터 크게 세력을 모았던 견훤(甄萱, 867~935)은 892년에 자신을 스스로 왕을 칭하고 수천 명의 세력을 모아 군사를 일으켰다. 칭왕(稱王) 한지 8년 후인 900년 견훤은 백제 계승을 주장하며 나라 이름을 백제라 한다.
여기에 구도(具道)가 장군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후)백제가 멸망한 뒤 나주(羅州)에서 포로로 잡힌 (후)백제 장군 구단서 이외에, 궁예(弓裔, ?~918)의 태봉국 시중(侍中)이었던 구진(具鎭)1), 탁라(乇羅) 성주(星主)인 배융부위(陪戎副尉) 구대(具代)2)로 보아 구씨는 백제계, 또는 마한계의 토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3)
그러나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시조인 구존유(具存裕)와 이들의 관계는 당시 고려 초기에는 우리나라에서 계보를 처음 편찬하기 이전이므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구씨(具氏)가 고려 초기에 나주(羅州)나 능성(綾城) 지역의 토착 성씨(姓氏)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은 명확한 사실이다.
중국에는 ‘구(具)’씨라는 성이 없고, 우리 민족의 역사상에 구씨는 백제의 부흥운동과 더불어 나타나며,고려의 무신정권시대 이전에 이미 고려의 호족으로 등장한 것은 사실로 판단된다. 능성구씨의 초간보는 1576년에 간행되는데, 그들의 창성(創姓) 후 발전 저력은 후 삼국시대에 이미 형성하고 있었음이 유추된다. 필자는 그러한 잊혀진 사실에 관한 단초를 우리나라 구씨의 연원 탐색과 1576년 [능성구씨세보] 병자보의 연구를 통하여 공감 및 유추할 수 있었다.
2. 고려와 조선의 능성구씨
능성구씨는 시조 구존유 이래로 그 후손이 고려 조정에 계속 진출하여 가문의 명성을 높인다. 2세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구민첨(具民瞻), 3세는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을 지낸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연(具珚), 4세는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5세는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낸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영검(具榮儉), 6세는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문정공(文貞公) 구위(具禕)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낸 구흥(具興)과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구의(具義)가 유명하다. 그리고 7세 문절공(文節公) 구홍(具鴻)은 조선의 개국에 협력하지 않고 은둔하여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킨다.
능성구씨는 시조 구존유의 7세손부터 가세가 크게 번창하여 사재감판사(司宰監判事) 구현좌(具賢佐)를 파조(派祖)로 하는 판사공파(判事公派), 공조전서(工曹典書) 구현로(具賢老)를 파조로 하는 전서공파(典書公派), 시랑(侍郞) 구영량(具英良)을 파조로 하는 시랑공파(侍郞公派), 판안동 대도호부사(判安東大都護府使) 구성량(具成亮)을 파조로 하는 판안동공파(判安東公派)를 비롯하여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도원수파(都元帥派)·재신파(宰臣派)·낭장공파(郎將公派)·감무공파(監務公派)·임천군사공파(林川郡事公派)·참판공파(參判公派)·문천군사공파(文川郡事公派)의 12개 파(派)로 나뉘었으며, 조선 원종(元宗, 1580~1619)의 비이자 제16대 왕 인조(仁祖, 재위 1623~1649)의 어머니인 인헌왕후(仁獻王后, 1578~1626)를 배출한다.
능성구씨의 고려조 문과급제자는 1385년애 문과급제한 구홍의 아들 구종지(具宗之, ?~1417)가 유일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54장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한다.(표1 참조)4) 능성구씨를 비롯한 구씨의 2015년 총인구수는 174,161명이다. 이 총인구수의 구성은 능성구씨 109,669명, 능주구씨 62,574명, 릉성구씨 1,460명, 릉주구씨 458명이라고 하지만, 이 구씨들은 모두 능성구씨이다. 구씨문중에서 54장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다는 것은 적은 장 수가 아니다. 그리고 능성구씨는 상신(相臣) 2명, 공신 9명을 배출한다.
[표1] 능성구씨 문중의 과거급제자 통계
3. 능성구씨 초간보와 세보 편찬
능성구씨문중에서는 조선시대에 1576년(선조9)의 병자보, 1666년(현종7)의 병오보(丙午譜), 1717년(숙종43)의 정유보(丁酉譜), 1787년(정조11)의 정미보(丁未譜), 1853년(철종4)의 계축보(癸丑譜) 등, 모두 6차에 걸쳐 표(2)와 같이 족보를 편찬한다.
[표2] 능성구씨문중에서 편찬한 족보 목록 (연도순)
능성구씨(綾城具氏) 초간보는 1576년 병자보5)이다. 편찬 실무는 구인(具仁)과 구사심(具思諶)이 담당하였으며, 변순(邊循)이 지(識)를 썼다. 간행에 따른 제반 사항은 충청도관찰사였던 구사맹(具思孟, 1531~1604)과 구봉령(具鳳齡, 1526~1586)이 지휘하였으며, 경비는 지방의 수령(守令)으로 나간 내외자손들을 중심으로 조달하였다.
청주의 보살사(菩薩寺)에서 목판으로 간행6)하였는데, 이 목판본 초간보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복본(複本, 청구기호 ‘규41’와 ‘규42’)으로 소장되어 있는데, 두 책 모두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한 복본이 확인되는 족보는 이 1576년 [능성구씨세보] 병자보가 유일하다. 청구기호 ‘규41’번과 ‘규42’번 성보는 각기 ‘제국도서지장(帝國圖書之藏)’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대한제국 시기에 황실(皇室) 소유였음이 확인된다. 그러던 책이 조선총독부를 거쳐 경성제국대학으로, 서울대학교로 넘어온 것이다.
1576년 병자보의 “내용은 능성구씨족보묘지(綾城具氏族譜墓誌)‚ 능성구씨성보(綾城具氏姓譜)‚ 능성구씨별보(綾城具氏別譜)‚ 지(誌)‚ 능성구씨동원(綾城具氏同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지(墓誌)> 상(上)은 1565년(명종20)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쓴 ‘구예묘지(具藝(4世)墓表)‚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구치관비명(具致寬(9世)碑銘)‚ 류인숙(柳仁淑, 1485~1545)의 구수복묘지(具壽福墓誌)가 실려 있고‚ <묘지>하(下)에는 강혼(姜渾, 1464~1519)의 구치홍묘지(具致洪墓誌)‚ 송인(宋寅, 1517~1584)의 구순묘지명(具淳墓誌銘)‚ 송인의 구사안묘지명(具思顔墓誌銘)‚ 찬자미상의 구수영묘지(具壽永墓誌)‚ 명종(明宗, 재위 1545~1567)의 모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의 릉과 관련되어 구치홍(具致洪)의 묘를 이장하게 큰 경위를 간단히 밝힌 천장지(遷葬誌)가 실려 있다. <묘지> 상-하는 모두 13장이다.
이어서 <성보(姓譜)> 상(上)에는 1세~6세‚ 중(中)에는 7세~11세‚ 하(下)에는 12세~16세의 세보가 실려 있다. 세계(世系) 기록상의 특징은 ①1면이 육층횡간(六層橫間)이다. ②이름 아래에 관직을 약기(略記)하였다. ③선남후녀법을 쓰되‚ 서자녀는 ‘첩자(妾子)’‚ ‘첩녀(妾女)’‚ ‘얼(孼)’로 표기하였다. (4) 외손은 전혀 싣지 않았다. <성보>에 이어 <별보(別譜)>에는 구방경(具方慶)이 작성한 제2세 구민첨(具民瞻)의 별손인 구인미(具仁美) 이하 13세의 세계가 실려 있다. 지에는 간행 과정을 밝힌 변순(邊循)의 발과 간행시의 사환 승정(繩正) 목수 각수 서기 창회(唱淮) 서사(書寫)의 명단이 있다. <동원(同源)>은 내파(內波) 외파(外把)로 나뉘는데‚ 내파에는 구씨 명단이‚ 외파에는 전현직 충청지역 목사 군수 현감 등의 명단이 실려 있다.”7)
4. 능성구씨 구봉서 가승과 능성구씨보갑
위의 표(2)에서 제시한 능성구씨문중에서 조선시대에 편찬한 여섯 종의 세보 이외에 1640년 10월에 경상도 관찰사 구봉서(具鳳瑞, 1597~1644)가 목판본 가승(家乘) 1책(18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총 18장 판목 36면으로 출생, 혼인, 급제, 관직, 업적, 사망, 묘소, 배위, 자녀 등 포괄적인 내용을 선조별로 기록하였다고 하는데, 그 판목(板木) 일부를 한국 전쟁 때 잃어버려 현재는 총 18장의 판목 중 8장만 남아있다.
이 목판본 판목 8장과 1680년에 만든 ‘능성구씨보갑’을 보은 ‘능성구씨 판안동파 관기종회’에서 소장하고 있어,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8)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보은 능성구씨 보갑은 유사시에 족보와 관련된 문서를 보관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석함 겉면에 ‘능성구씨 보갑’이라는 글자를 오목새김 하였다. 화강암을 사용하여 상하가 나뉘게 만들었는데, 족보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선중기의 의식 구조와 판목이나 서적의 보존법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유물이다.
한편 인근 지역에 비슷한 형태의 유물 ‘보은 기계유씨 석조보실(報恩 杞溪俞氏 石造譜室)’9)이 있어 좋은 비교 사례가 된다. 이러한 류의 석실에 고문헌을 비장한 예는 이른바 김해김씨문중의 족보 바위도 있다. 그곳은 현재 산청군 금서면 구형왕릉 동쪽편의 앞쪽 절벽으로 세로 70cm, 가로 40cm의 석문이 있고, 이곳 석실에서 칼, 제기, 족보,10) 갑옷 등이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석함은 흔히 장보암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전국 몇 곳에 있다. 그러나 연대로 보면 보령 능성구씨 보갑이 1680년으로 최고 연대로 올라가며 보관되었던 내용물도 일부 현전한다.
5, 맺음말
[표2]에서 언급한 능성구씨의 현전 족보 확인 및 접근은 능성구씨문중에서 나서지 않는 한 매우 어렵다. 그러나 능성구씨문중에서는 1576년 초간보의 현전 사실을 필자가 주목하여 2023년에 처음으로 언급하기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1666년에 송시열이 쓴 병오보 서문이 남아있음에도 병오보의 간행 사실을 현재까지도 확인하지 않고 있다.
수 개월 전 1717년 정유보 영본 3책(권3, 5, 6)이 대구의 한옥션에 출품된 바 있다. 1717년 정유보는 비록 낙질이지만, 능성구씨의 족보가 너무 희소한지라 필자도 응찰하였지만, 낙찰받지를 못했다. 출품 가격을 한참 상회하여 확인 안 되는 누군가가 낙찰받아 갔다.
능성구씨문중의 현전 확인되는 세보로 접근이 가능한 족보는 1576년 병자보 1책과 1787년 정미보 12권12책인데, 이 두 종의 세보는 완질본으로서 매우 중요한 옛 족보이다. 이후에 나온 1853 계축보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20권20책 중에 6책이 결본인 상태로 14책만이 소장되어 있고, 장서각 소장의 1906년 병오보는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무너진 이후에 출간한 족보이다.
능성구씨는 우리나라의 명문(名門) 집안이다. 그러므로 문중의 누군가에게서 현재 소장처 미상의 옛 족보가 갑자기 툭 튀어나올 수 있다. 그것을 기대한다.
1680년에 만들어진 능성구씨 보갑은 한 가족의 가승을 보관하여 만든 것이지만, 아주 독특한 문중유산이다. 그리고 일부 책판 8장이 남아있다는 것은 최소한으로라도 현상이 보존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갑을 만든 목적물, 즉 내용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반가운 것은 최근 능성구씨문중은 조선시대의 사대성을 벗어 던지고, 스스로 씨족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능성구씨는 백제나 마한 계열의 후손으로서, 후 삼국시대에 드러나기 시작한 우리 민족의 토성(土姓)으로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민족적인 주체성과 씨족으로서의 정체성이 자주적으로 확립되는 현상이다. 필자는 능성구씨문중의 이러한 자각은 사대성 극복이 요원한 다른 씨족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갈 것으로 본다.
주(註)
주1) 918년(태조1) 나주도대행대시중(羅州道大行臺侍中)에 임명.
주2) 1101년(고려 숙종 6년)에 탐라 성주(星主) 배융부위(陪戎副尉)인 구대(具代)가 유격장군(遊擊將軍)에 임명되었다. 《고려사(高麗史)》
주3) 우리나라의 제법 여러 문중에서는 자신들의 시조가 중국에서 귀화해 온 분의 후손으로 주장한다. 그러한 씨족들은 대체로 조선중기 이후로 만연한 사대주의 모화사상에 따라 뒤늦게 주장되어 온 것으로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능성구씨도 일각에서도 능성구씨를 중국의 귀화성씨로 주장했으나, 구씨가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라는 일각에서의 주장을 능성구씨 문중에서 공식 철회하고, 구씨의 정체성을 우리나라의 토성으로 바로 잡았다. 이는 매우 대단한 일이다.
참조: “시조공께서 중국에서 오신 것으로 추정하기 어려운 이유는 ①청계(淸溪, 朱潛)공께서 1194년에 출생하시고 1224년에 우리나라에 오실 때 7학사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오셨다 하니 그때 청계공의 춘추(나이)가 30세이신 것을 추상해 보면 우리 시조〔始祖, 諱存裕)공께서 10여 세의 어린 나이로 부모 품에 계실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성(姓)도 다른 청계공을 따라 피난길에 오르시는 위험한 행보에 동행하셨을 것으로 믿기 어려우며, ②고려사(高麗史)에 보면 궁예(弓裔)가 (후)고구려(태봉이라 국호 변경)를 건국하여 활동하던 때인 901∼918년경에 구진(具鎭) 장군으로 하여금 나주(羅州)를 수호케 하였고,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세울 때에도 다시 구진(具鎭) 장군에게 나주(羅州)를 수호케 한 기록이 있는데 그 때는 능주(綾州)가 나주(羅州)에 속해 있었으며, 고려 태조(918) 때에 구족달(具足達)이란 사람은 서도가(書道家)로 벼슬은 흥문감경(興文監卿)이었고 당시 충주(忠州) 정토사(淨土寺)에 법경대사(法鏡大師) 자등탑비(慈燈塔碑)와 강릉(江陵) 지장원(地藏院) 낭원대사(郎圓大師) 오진탑비(悟眞塔碑)의 필적을 남겼는데 우리 시조공보다 300여 년 전 인물로 시조공께서 그 두 분들의 후손일 가능성도 있으나 지금까지 구체적인 전고가 없어 확실하게 추상하지 못하고 있는 바 우리 종인들은 시조공 이하의 제 선조님에 대한 문헌 및 보학연구에만 더욱 힘써 주시길 바라며 더 이상 시조공께서 중국에서 오셨다는 추상은 없으시기 바랍니다.” 능성구씨대종회 상임부회장 구자선(具滋璿)의 [능성구씨 시조(始祖) 존유(存裕)공의 상세(上世)에 대하여]에서 인용“
주4) 능성구씨는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54명, 무과급제자 363명이라고 주장하는데, 무과급제자 363장이라는 주장은 방목으로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장 수이다. 족보에 따른 통계로 보인다.
주5) 이 책의 간기는 “萬曆丙子春淸州菩薩寺開刊”로 되어 있어 1576년 청주 보살사에서 개간한 세보이다. 그러나 문중에서는 1575년에 편찬을 시작한 것으로 인하여 ‘을해보’라고 칭한다.
주6) 청주 보살사에서는 40여 년 후인 1617년에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 초간보 1책을 목판본으로 간행하기도 한다. 청주 보살사는 조선중기에 출판을 위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7) 참조: 규장각 도서 해제.
주8) [보은 능성구씨보갑 및 구씨가승목판(報恩 綾城具氏譜匣 및 具氏家乘木板)], 1680년, 1기(基)와 목판 8장,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2013년 5월 31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지정. 능성구씨 판안동파 관기종회 소장.
능성구씨보갑은 낙주가승(洛州家乘)을 영구히 보관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특이한 형태의 보갑(譜匣)이다. 유사시에 선조들의 족보와 유고(遺稿)를 매장하여 숨길 수 있도록 고안하여 화강암으로 만든 함이다. 아래와 위를 분리할 수 있는 구조이며 크기는 가로 80㎝, 세로 56㎝, 높이 84㎝이다. 표면에는 ‘능성구씨보갑(綾城具氏譜匣)’이라고 음각이 되어 있다. 이렇게 족보를 보관하는 석함은 흔하지 않은 유물이다. 판목은 한국전쟁시에 일부가 분실되어 총 18매 중 현재 8매가 남아 있다.
주9) ‘보은 기계유씨 석조보실(報恩 杞溪俞氏 石造譜室)’, 1690년 추정, 1기, 2012년 4월 6일 충청북도 민속문화유산 지정. 기계유씨 충목공파 부호군은공 보은종중 소장.
주10) 여기서 나온 족보는 ‘오랜 세월의 습기로 인하여 바스러졌다’라고 한다.
- 공 지 -
- 제주시 오등동 소재의 ‘헤리티크 제주’ – 컨벤션 3층 홀에서 ‘광복 80주년-기독교 전래 140주년’을 축하하는 특별전 <어둠속에 빛의 길>전을 9월 17일부터 진행하고 있습니다.
- 예고한대로 이 특별전을 지속하며, 동시에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번개전으로 <韓國名門族譜 特別展>을 병행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명문의 40문중 이상의 희귀 옛 족보를 전격적으로 공개합니다. 누구든 오셔서 보십시요.
‘한국족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
학술위 상임위원장 이양재 / 010-4815-3615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