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섭  / 출판인

 

‘남정현’ 하면 보통 <분지>를 떠올린다. 소설 <분지>를 통해 남정현(1933~2020)을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1999년 봄 《한국 언론의 미국관》을 쓰기 위해 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지다 소설 <분지>를 만났고, 당시 그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

1965년에 쓰인 이 소설을 읽은 느낌은 전율이자 전의였다. 미군한테 겁탈당하고 미쳐버린 어머니, “이 죽일 놈들아! 날 죽여다오”라고 외마디소리 지르며 영영 눈을 감아버린 〈분지〉의 주인공인 홍만수 어머니의 참상에 대한 전율이었으며, 어머니를 죽게 만든 자들에 대한 전의였다. (‘2000년 1월 1일의 신문과 반미소설 〈분지〉’ 중에서)

지난 9월 3일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 발표 60주년 기념식–남정현의 삶과 문학’ 행사 장면. ⓒ최희영

40킬로그램의 몸으로 미국에 맞선 작가

<분지>는 널리 알려진 한국의 소설과는 그 내용과 형식에서 독특한 점이 많았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평지 돌출한 작품이었다. 《작가연구》 2001년 하반기호는 186쪽 분량의 특집으로 남정현 작가를 다뤘는데, 한국문학사에서 차지하는 그 '특이성'에 주목했다. 채호석 편집인은 책머리에 “한국문학사에서 앞도 없고, 뒤도 없는 자리가 바로 남정현 소설의 자리가 아닐까”라고 쓰기도 했다.

한국 문단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남정현 작가와 반미소설 <분지>를 나이 사십이 다 되도록 몰랐다는 사실에 일종의 자책감마저 들었다. 필자의 무지함과 게으름에도 책임이 있겠지만 국가보안법(반공법)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박정희 군사정권의 잘못도 크다. 1965년 《현대문학》에 발표된 직후 필화사건으로 금서가 된 <분지>는 1987년 6월항쟁 이후에야 합법적으로 출간될 수 있었다.

<분지>를 읽고 감탄한 필자는 《말》지 기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이기형 시인에게 부탁해서 남정현 작가를 2000년 초 서울 동숭동 대학로의 한 음식점에서 함께 만났다. <분지>를 읽은 독자는 처음엔 힘깨나 쓰고 기운 세 보이는 야성적인 작가를 떠올린다. 하지만 막상 작가를 직접 만났을 때 왜소한 체격과 부드러운 인상에 놀라곤 하는데,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오적>의 시인 김지하도 2005년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분지〉를 탁 보고 대단히 우람한 사람을 연상했어요. 그런데 조그마하니 약체, 그래서 더, 놀랐죠. 남 선배, 큰일 하셨다고 그랬어요. 아메리카에 대해 그 후에도 그렇게 쓴 작품이 없죠.”라고 증언했다.

그즈음 남정현 작가의 몸무게는 채 40킬로그램이 될까 말까 했다. 유소년 시절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병고에 시달리고, 20대 초반까지 결핵을 심하게 앓은 후유증 탓이었다. 그 병약한 몸으로 1974년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사태 때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이로 인해 평생 어지럼증을 달고 살아야 했다.

대학로에서의 만남 이후 10여 년이 지난 2013년 《분단시대의 지식인-통일 만세》를 쓰면서 남정현 작가를 세 차례 만나 인터뷰했다. 이때 그를 인터뷰한 장소는 자택 쌍문동에서 멀지 않은 대학로의 카페 앨빈이었다. 남정현은 이 카페의 단골이었다. 2017년에는 그의 마지막 소설집 《편지 한 통-미 제국주의 전상서》를 도서출판 말에서 출간했다.

“그의 작품은 분명히 훗날 재평가를 받을 것이다”

2024년 초에는 작가의 장남 남돈희 씨와 함께 마석 모란공원 묘지를 찾았다. 묘비 앞면에는 “민족자주를 열망한 ‘분지’의 작가 남정현의 묘”라고, 뒷면에는 문학평론가 김병욱의 ‘천부적 이야기꾼’에서 따온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필자가 묘지를 방문하기 전에 읽은 남정현 관련 비평 중에 가장 인상적인 구절의 하나였는데 묘비에서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남정현의 문학은 결코 농담에 가까운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일깨우는 처절한 목소리다. 그런데도 그 작품에는 웃음이 있다는 것이 한 특징이다. 그것이 말하자면 남정현의 삶의 여유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을 가장 정직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문에 인용한 김병욱 평론가의 글 〈천부적 이야기꾼〉에는 위의 ‘왜냐하면’ 앞에 “그의 작품은 분명히 훗날 재평가를 받을 것이다.”가 들어가 있다. 이 비문은 남돈희 씨가 직접 골랐는데, “아버님을 잘 표현해 주신 것 같아 늘 마음속에 새기던 글귀”라고 했다. 마석 묘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민족자주를 열망한’ 남정현 작가를 기리는 책을 한 권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누가 시키지는 않았으나 우연한 만남이 쌓여 운명적인 만남이 되었고, 인생의 숙제로 떠안게 된 셈이다.

2024년 초 마석 모란공원의 남정현 작가의 묘지를 방문한 《남정현의 삶과 문학》의 저자 최진섭 ⓒ최진섭
2024년 초 마석 모란공원의 남정현 작가의 묘지를 방문한 《남정현의 삶과 문학》의 저자 최진섭 ⓒ최진섭

처음에는 <분지> 60주년이라는 걸 머릿속에 떠올리지도 않았다. 4주기 추모식이 열리는 2024년 12월 21일까지 책을 내면 좋겠다는 생각 정도였다. 그러나 작가의 소설을 정독해서 읽고, 관련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1965년 《현대문학》에 실린 <분지> 이전의 작품도 금기가 많은 ‘경고 구역’에서 온 힘을 다해 쓴 ‘불온’하기 짝이 없는 작품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남정현 작가는 《2004년도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남정현》에서 1958년 <경고구역>으로 등단해서 1965년 ‘분지 필화사건’을 겪을 때까지의 소설에 대해 회상하며 “내 능력으로는 이렇게 육체적으로 좀 허약하고, 또 정신적으로 허약한 데 그래도 내가 최선을 다했구나.”라고 말했다. 그는 “그때 처한 엄혹한 상황에서는 우리글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울면서 썼다.”라고 회고했다. 남정현은 이렇게 죽을힘을 다해 쓴 소설을 지금 독자들이 잘 보지 않는 것을 아쉬워했다.

필자는 남정현 작가가 생전에 느낀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고 싶다는 마음에 그의 작품을 빠짐없이 다뤄야겠다는 ‘욕심’이 생겼고, 그 바람에 마감은 마냥 늘어졌다. 게다가 12.3 계엄 사태까지 터지면서 몇 달 동안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그 시기의 그로테스크한 초현실적 상황은 남정현 작가가 소설 <부주전상서>(1964)에 쓴 “현실에 참패한 픽션, 픽션을 제압한 현실”이라는 구절과 딱 어울렸다. 그렇게 해를 넘겨 집필 작업을 하다, 문득 2025년 3월은 <분지> 발표 60주년이고, 2025년 5월은 <분지> 필화사건 60주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됐다.

《남정현의 삶과 문학》 쓰다가 ‘분지 60주년 기념식’ 떠올려

한국 문단 최고의 풍자소설이자, 반미소설로 꼽히는 <분지> 60주년을 그냥 넘어간다는 것은 허전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여겼다. 필자는 지난 7월 중순 《남정현의 삶과 문학-부활과 웃음의 미학》(도서출판 말)을 발간한 뒤 ‘<분지> 발간 60주년 기념식’을 조촐하게라도 하리라 마음먹었다. 바로 그즈음 우연한 기회에 문학TV의 최희영 대표를 페이스북에서 만났고, 이 행사를 공동주최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분지> 발표 60주년 기념식’은 지난 9월 3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사회는 전대협동우회의 안영민 회장이 맡았고, 축사는 전덕용 사월혁명회 상임대표, 한도숙 민족작가연합 고문, 가수 백자가 했다. 지난 겨울 탄핵정국에 <탄핵이 답이다>라는 노래를 유행시켰던 가수 백자는 원래 <오작교> 등의 축가를 부를 예정이었으나 프란치스코 회관 측에서 규정상 노래, 공연은 할 수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축사로 대신했다.

1983년, 군 복무 중 휴가 나온 아들(남돈희)과 함께 쌍문동 자택에서 찍은 가족 사진. ⓒ남돈희
1983년, 군 복무 중 휴가 나온 아들(남돈희)과 함께 쌍문동 자택에서 찍은 가족 사진. ⓒ남돈희

기념식에서 작가의 아들 남돈희(65) 씨가 약력을 소개했고, 딸 남진희(56) 씨가 ‘다정다감한 나의 아빠’란 글을 써서 읽었다. 남진희 씨가 기억하는 소설가 남정현은 ‘반미작가’ ‘민족문학작가’ 이전에 ‘다정도 병인 양하여’라는 글귀가 꼭 들어맞는 다정다감한 아빠였다.

“고등학교 때까지 새 교과서가 나오는 날은 아빠가 제일 신이 나는 날이었다. 아빠는 며칠 전부터 고르고 골라 사 놓았던 포장지와 비닐로 온종일 교과서를 쌌다. 내 책가방에는 늘 포장지와 비닐로 예쁘게 싼 교과서들과 아빠가 깎아준 연필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아빠는 내 소풍날과 운동회날도 항상 함께였다. 그 시절에는 아이와 관련된 일들은 엄마가 하는 게 당연하던 때라 아빠는 언제나 청일점이었다. 아빠는 내가 도시락을 두 개 싸가야 하는 학년부터는 따뜻한 밥을 먹으라고 저녁 도시락을 늘 학교로 갖다 주기도 했다.”

남진희 씨는 아빠의 다정함과 끝없는 사랑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뒤에도, 40이 넘어 뒤늦게 결혼을 할 때까지 같이 사는 동안에도 변함이 없었다고 말했다.

북한 작가들이 존경의 예를 표하는 남쪽 문인

최희영 문학TV 대표는 남정현 작가를 추모하는 영상을 준비했다. 10분 분량의 이 영상에는 남정현 작가가 생전에 국가보안법 폐지 연설하는 모습,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에 참석한 장면, 그리고 장례식에 참석한 문인들의 발언 등이 담겨 있었다. 장례식장 화면에는 문학평론가 임헌영이 “남정현 작가는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봤고 제국주의론에 통달했다. 사회과학에서 리영희 선생이 한 똑같은 역할을 문학에서는 남정현이 했다.”라고 말하는 장면도 나왔다.

“두 분 주장은 똑같다. 우리나라 민족문제의 핵심은 친일파 청산, 미국 문제로 보았다. 미국은 분단, 남북긴장, 적대감 유지하는 정책을 폈다. 남정현은 등단 초기부터 국가보안법(반공법)은 일본이 만든 법을 미국이 현대화, 모더나이즈하게 만든 법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말한 국가보안법의 ‘국가’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이다.”

젊은 시절부터 남정현 작가와 문학적 교류를 한 임헌영 평론가 ⓒ최희영 
젊은 시절부터 남정현 작가와 문학적 교류를 한 임헌영 평론가 ⓒ최희영 

임헌영 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 소장)는 이날 기념식에서 남정현 작가와의 추억담을 들려줬는데 “(1960년대에) 미국이나 일본에서 기자들이 왔을 때 가장 먼저 남정현 선생을 찾아가 인터뷰할 정도로 당시 국제사회에도 널리 알려진 작가였다.”라고 말했다. 윤동주 묘지를 발견한 일본의 한국문학자인 오무라 마스오(1933~2023) 와세다대 명예교수도 한국에 오면 남정현 작가를 만났고, 부인 신순남 씨가 폐암에 걸렸을 때는 일본에서 약을 구해 찾아오기도 했다.

북에서도 남정현은 유명했다. 《실천문학》 주간을 지낸 소설가 김영현은 2005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에 참가했을 때 남정현 작가와 고려호텔에서 같은 방을 썼다. 그는 나중에 에세이 <엄마 하나님-남정현 선생과 함께>에서 “많은 북한 측 작가들이 같이 갔던 기라성 같은 남쪽의 작가들을 제치고 남 선생에게만은 진정으로 존경의 예를 표하는 것을 나는 곁에서 여러 번 보았다.”라고 썼다.

북의 작가들이 유독 남정현 작가에게 예를 갖추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국 최고의 반미소설 <분지>를 쓴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혹시 북한의 문학연구자들이 남정현이나 <분지>를 언급한 비평, 논문을 볼 수 있을까 싶어 국립중앙도서관 북한자료센터를 방문했으나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여성주의적 관점의 <분지> 비판에 대한 반론

기념식에서 소설가 이수경은 ‘<분지>와 여성주의 논쟁’을 주제로 한 비평문을 발표했다. 이수경 작가는 “여성의 신체와 그에 가해지는 폭력을 알레고리로 삼거나 성 역할을 고착하는 문학 현상에 대한 비판은 그것대로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며, “소설 <분지>의 상징적 요소와 잔인하리만큼 사실적인 묘사는 불편을 넘어 어떤 불쾌함을 줄 수도 있겠다고 일면 이해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분지>를 ‘가부장제 식민지 남성주의’, ‘여성에 대한 겁탈, 강간, 혐오 서사’, 심지어 ‘음란물과 폭력물의 요소를 모두 갖춘 삼류성인소설’, ‘미국 여성의 신체를 제압하여 성적 욕망을 해소하고자 하는 남성의 뒤틀린 지배 욕구’ 같은 것으로 해석한 여성주의적 관점의 논문과 비평”에 관해서는 이렇게 반론을 펼쳤다.

“각별한 주의와 긴장을 유지하며 소설을 반복해서 읽은 저로서는, 이 비판들이 ‘텍스트에 대한 치밀한 독법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남정현 문학 연구> 강진구 선생의 지적이나 <분지>를 평하며 ‘발화자의 위치, 말하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어떤 시간적 공간적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의미 맥락이 달라진다.’ 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정선태 교수 등의 견해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설은 표면적, 결과론적 사실을 넘어 플롯을 찾아가는 예술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수경 작가는 소설 <분지>에 대하여 “해방 후 미군이 주둔한 우리 민족의 현실과 그로 인해 훼손된 것들을 목격하고 인식하는 주체의 고통을 치밀한 알레고리로 구축한 저항 소설”이라고 평하며 발표를 마무리했다.

지난 9월 3일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 발표 60주년 기념식 –남정현의 삶과 문학’ 행사에서 를 낭독하는 참석자들. 좌측 황선 평화이음 대표, 마이크 잡은 사람은 소설가 문영심 ⓒ최진섭
지난 9월 3일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 발표 60주년 기념식 –남정현의 삶과 문학’ 행사에서 를 낭독하는 참석자들. 좌측 황선 평화이음 대표, 마이크 잡은 사람은 소설가 문영심 ⓒ최진섭

행사의 끝에 네 명의 참석자가 <분지> 소설의 일부를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황선 평화이음 대표는 소설 <분지>의 마지막 구절을 읽었다.

“앞으로 단 십 초. 그렇군요. 이제 곧 저는 태극의 무늬로 아롱진 이 러닝셔츠를 찢어 한 폭의 찬란한 새 깃발을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구름을 타고 바다를 건너야지요(…) 자, 보십시오. 저의 이 툭 튀어나온 눈깔을 말입니다. 글쎄 이 자식이 그렇게 용이하게 죽을 것 같습니까, 하하하.”

임헌영 평론가는 남정현 작가에게 “<분지>를 쓰면서 ‘태극’이라는 단어를 두고 고심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반미’ 성향의 불온한 소설에 대한 방어막으로 ‘태극’을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승만 정권 시절에 제작된 <피아골>이란 영화도 상영금지 됐다가,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빨치산 생존자의 모습 위에 태극기가 겹쳐 나오게 처리하면서 극장에 올릴 수 있었다. 남정현은 ‘태극의 무늬’를 안전장치로 삽입했지만 반공법의 마수를 피하진 못했다.

진짜 세상을 위한 홍만수의 ‘찬란한 새 깃발’은 어디에

단군의 후손이고, 홍길동의 10대손인 홍만수를 내세워 ‘찬란한 새 깃발’을 만들고자 했던 남정현 작가. 그가 2020년 12월 21을 세상을 떴을 때 김민웅 교수(촛불행동 상임대표)는 페이스북에 추모의 글을 올려 “미제국주의가 채운 노예의 족쇄를 금이야 옥이야 끼고 사는 세상은 반드시 허물어야 한다.”라고 썼다. 그리고 “근데 참, 그 홍만수의 옷을 찢어 만든 황홀한 한 폭의 깃발은 뭐였을까? 우리에게 그게 있긴 있을까, 지금.”이라고 질문을 던지며 글을 끝맺었다.

남정현 작가가 <분지>를 발표한 지 60년, 홍만수가 ‘새 깃발’을 만들어 바다 건너 ‘위대한 대륙’ 미제국주의의 땅으로 건너겠다고 선언한 지 60년이 흘렀다. 지금 사우스코리아,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남정현은 생전에 “그때나 이때나, 한국은 분지야!”라는 말을 자주했다. 미군 수만 명이 주둔하고, 군사작전권도 없으며, 그리고 미국이 창조한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살아 있는(남정현이 78세에 쓴 마지막 소설 <편지 한통 –미제국주의 전상서>의 주인공은 미국과 국가보안법이다) 남한은 지금도 60년 전과 다름없이 ‘똥땅’ 분지라는 것이다. 남정현은 시론 ‘그때나 이때나’에서 미국을 힘만 앞세우는 ‘밀림의 왕자’로 묘사했다.

“1960년대 초, 미국이란 존재는 나에게 있어서 왠지 혐오의 대상이었다. 어쩌자고 힘만이 곧 선이요, 정의라고 맹신하는 일종의 험상궂은 밀림의 왕자처럼 보이는 탓이었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어디 한 군데 예쁜 구석이 없어 보였다.”

<분지>는 자주독립을 향한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 같은 소설

2005년 7월 백두산 밀영지에서 북한 안내원들과(가운데 남정현, 오른쪽 김영현, 왼쪽 박도). 북한 안내원 복장은 일본 강점기 항일유격대 여전사의 복장이다. ⓒ박도
2005년 7월 백두산 밀영지에서 북한 안내원들과(가운데 남정현, 오른쪽 김영현, 왼쪽 박도). 북한 안내원 복장은 일본 강점기 항일유격대 여전사의 복장이다. ⓒ박도

이렇게 힘으로 정의를 억누르는 미국이 주인인 세상을 남정현은 ‘가짜 세상’이라 했고, 외세로부터 독립을 이룬 ‘진짜 세상’을 갈망했다. 그는 “언젠가는 오고야 말 ‘진짜 세상’을 염원하는 것이 문학의 발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1993년 11월 사월혁명회 월례발표회)했다. 남정현 작가가 볼 때 가짜 세상은 곧 미국 세상, 미국 시대였다.

1945년 8.15 이후 한국민에게 가짜 세상을 강요해온 미국의 실상은 어떠한가? 지난 9월 4일 미국 조지아주의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합작공장 건설 현장에서 한국인 노동자 3백여 명이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에 의해 체포, 구금됐다가 8일 만에 대한항공 전세기 편으로 귀국했다. 이 과정에서 손목과 발목이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가는 한국인 노동자의 모습이 방송에 나왔다.

그 장면은 마치도 전쟁포로나 죄수, 아프리카 흑인노예를 연상시켰고 온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미국의 본래 모습이며, 한미동맹이라 불리는 노예동맹의 실상이었다. 이 괴이한 장면 역시 “현실에 참패한 픽션, 픽션을 제압한 현실”을 떠올리게 했다. <분지>가 발표된 지 60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이 소설을 자주독립 염원한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처럼 우리가 가슴에 품고 지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1967년 《분지》 필화사건 공판을 마치고 법원에서. 왼쪽부터 안수길, 이항녕, 한승헌, 남정현.
1967년 《분지》 필화사건 공판을 마치고 법원에서. 왼쪽부터 안수길, 이항녕, 한승헌, 남정현.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