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상임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9시가 되기 직전에 대회 추진위 공동대표들이 무대 위에 올라서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민주노총위원장, 전국농민회의장 등 민중단체 대표, YMCA 사무총장 등 시민단체 대표, 전국비상시국회의 상임대표 등이 올라왔다. 이 대회의 가장 핵심 주최자라고 할 수 있는 자주평화통일연대 상임대표의장은 대회사를 해서 그런지 올라오지 않았다. 대회 마지막에 각 부문 대표들이 나와서 선언문을 읽는 것은 거의 매해 8.15대회 때마다 하는 형식인 듯하다.

선언문은 광복 80주년의 8.15가 탄핵광장의 승리 속에 맞이하는 것이며, 12.3 계엄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극복한 우리는 항일독립운동 정신의 진정한 계승자이며 승리자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한 80년 전,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 해방을 맞았으나, 진정한 해방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였고, 내란·외환세력과 분단·냉전체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했다. 독재세력, 내란세력이 바로 일본제국주의의 연장이라는 것도 밝혔다.

이어서 선언문은 광복 80년, 분단 냉전을 넘어 자주와 평화의 새 시대를 열자는 다짐을 하였다. 그것은 내란·외환 범죄를 완전히 청산하고 평화 주권과 역사정의를 바로 세우고, 미국의 강압과 동맹수탈에 맞서 주권과 평화를 이뤄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을 위해 한반도 전쟁위기를 조장하는 적대 행동에 반대하며 평화를 위해 싸우자고 하였다. 작금의 미국의 행태에 단호히 맞서자는 결의였다.

일본에 대해서도 식민지배와 전쟁범죄의 책임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모든 역사수정주의에 반대하며 진실에 따른 사죄와 배상을 촉구한다고 하였다. 선언문은 결국 주권과 평화를 이뤄낼 힘은 주권자인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믿음으로 중단 없이 행동해 나가자고 호소하였다. 선언문의 내용이 상당히 강했다. 현재 상황이 그만큼 위태로운 점도 있지만, 탄핵정국을 거치면서 그만큼 강해진 민족민주운동의 저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였다.

행진이 시작되었다. 대형 스크린에 행진 차량과 그 뒤에 갈 각 단체들을 안내하였다. 민주노총이 제일 뒤에 있는 3호차를 따라 가고, 추진위 참가 단체들은 1호차 뒤에 가도록 하였다. 선언문 낭독 때부터 일어나 있던 사람들이 차량 뒤로 대열을 정비하면서 시간이 꽤 들어갔다. 숭례문 옆으로 해서 한국은행 앞을 지나 명동입구를 거치고 청계천, 종로 쪽으로 나간다고 하였다. 최종 목적지는 안국동 송현광장이었다.

한때 행진 자체가 없다는 말도 돌았다, 원래 계획은 일본대사관 앞을 지나 미국대사관 쪽으로 가서 광화문에서 하는 정부 행사에 합류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대사관 앞으로 가는 것을 경찰이 허용할 수 없다고 하였고, 결국 송현광장으로 최종 목적지가 정해졌는데 그 때문에 와전된 것이었다. 뭔가 내란정권을 종식시킨 승리자라고 말하는 것이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행진이 시작되면서도 찜찜한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숭례문 옆을 돌아 명동 입구 방향으로 가는데 갑자기 행진이 멈추었다. 남대문시장 입구 부근이었다. 그러려니 했다. 행진을 하다 보면 그런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었다. 행진 대열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알기 어려워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면서 대열을 이탈해서 인도를 통해 앞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신돌석씨도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왜 그런지 보무도 당당하게 광화문을 향해서 가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다시 행진이 시작되었다. 그러다 갑자기 뛰어야 했다. 앞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나갔기 때문이었다. 사람들 통해 전달된 이야기가 경찰차 두 대가 행진대열을 막았다고 하였다. 이 행진은 분명히 신고된 것인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옆에 있는 어떤 사람이 시간이 너무 늦어서 야간 행진이라 제동을 거는 것이라고 했다. 그 동안 관행적으로 허용했지만 원래 법적으로는 제재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그 사람 말에 어이가 없었다.

정확하게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박근혜 정부 당시에 야간 시위 금지를 위헌심판제청을 통해 무력화시킨 것을 신돌석씨는 알고 있었다. 그때 첫 야간 시위를 4.19기념집회를 하고 청계천에서 종로 쪽으로 했었다. 그것이 되었기 때문에 박근혜 탄핵 시위 때 청와대를 향한 야간 시위가 가능했고, 경찰의 금지에 대해 가처분 신청으로 맞대응해서 바로 앞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당시에 엄청난 희생이 있었을 것이다.

다시 조금 더 나아갔다. 한국은행 사거리에 이르렀을 때 또 다시 행진이 멈추었다. 이번에는 너무 궁금해서 오른쪽 인도로 나가서 앞으로 나가보았다. 저 앞쪽에서 경찰들이 행진대열을 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참 지체되면서 대열이 인도까지 조금씩 폭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대열은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선도 차량에서 이끄는 이가 ‘합법 시위 막지 마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행진하는 사람들이 따라 외쳤다.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김민호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시민들에게 지금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해야지 합법 시위 보장을 말하면 시민들이 관심이 있겠냐는 이야기였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됐지만 뭔가 시위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점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국민주권정부가 들어서고 첫 8.15집회에 신고된 행진이 막히다니 이건 뭔가 이상했다.

조금 있다 행진이 다시 이동했다. 작은 경찰차 두 대가 길 한 가운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으로 막고 경력을 동원해서 막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정도로 하려고 했다면 애초에 막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을지로 입구 네거리쯤에서 행진이 다시 멈추었다. 이제는 신돌석씨 일행이 매우 앞쪽에 있어서 선두가 잘 보였다. 선두 차량 앞으로 경찰차와 경찰경력이 막아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차량 위의 인도자가 ‘행진 방해 규탄한다’ ‘합법 시위 막지마라’ 등의 구호를 계속 외쳤다. 경찰차에서 무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집행위원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이 행진은 신고된 합법 행진이니 경찰은 빨리 비키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경찰과 대화하지 않겠고, 그럴 때 일어나는 불상사는 모두 경찰의 책임이라고 강조하였다. 하지만 경찰은 요지부동이었다. 뭐라고 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 일부 사람들이 인도 쪽으로 나갔다. 신돌석씨는 인도로 해서 가라는 집행부의 지침인 줄 알고 따라가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차 시간 때문에 빠지는 것이었다. 차량에서 우리 쪽은 우리 쪽대로 말하고, 경찰차에서는 뭐라고 말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행진을 중단하라는 소리를 하는 것 같은데 신고된 합법 행진을 무슨 권한으로 막고 그만하라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이크로 공방이 오가는 사이에 차가 다니던 왼쪽 편 차로로 일부 사람들이 넘어갔다. 그리고 뒤에 따라오던 사람들이 몰려갔다. 양쪽 차로를 차단하는 봉을 무너뜨려 버리기도 하였다. 이제 행진은 길이로는 줄었어도 폭으로는 꽤 넓어졌다. 남대문서 경비과장이라고 밝힌 사람이 행진을 보장할 테니까 신고된 방향으로만 행진하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마이크 소리가 꽤 또렷이 들렸다. 자기들이 막아 놓고 마치 우리 책임인 양 말하니 어이가 없었다.

집행위원장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는 신고된 대로만 행진했다. 경찰이 막았기 때문에 옆으로 나간 것이다. 경찰이 봉쇄를 풀면 다시 돌아와서 행진할 것이다. 자신이 윤석열 정권에서도 집회 시위 집행 책임을 맡아 왔지만 합법적인 행진을 막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국민주권정부냐, 경찰주권정부냐. 이게 무슨 짓이냐.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행진을 무엇이 두려워서 막는 것인가? 남대문서 판단이냐? 경찰청 판단이냐? 아니면 그보다 윗선이냐?

민변 회장이라고 밝힌 사람이 마이크로 말했다. 이건 합법적인 행진이다. 그것을 막는 것은 현행법 위반이다. 남대문서 경비과장은 그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오늘 이 사태는 반드시 법적으로 책임을 묻겠다고 하였다. 합법적인 행진을 막아 놓고는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옆으로 간 사람들 때문에 막는다는 해괴한 논리로 말하고 있는데 빨리 막고 있는 경찰이 물러서라고 하였다. 하지만 남대문서 경비과장이란 자는 같은 말만 되풀이하였다.

사람들이 옆으로 이동해서 신돌석씨와 김민호 등은 거의 앞부분에 위치하게 되었다. 조금 있다 광교 쪽으로 인도와 지하도를 통해 갔다 온 사람이 저 앞에 경찰버스로 차벽이 쳐져 있다고 하였다.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왜 신고된 합법 행진에 차벽을 쳐서 막는다는 말인가? 지금 행진대열 앞에 있는 경력은 사실 밀어버릴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멀리 보이는 종각 쪽은 아예 경찰버스로 길을 완전히 막고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경찰의 과잉충성인 듯하다. 광화문에서 열리는 행사에 조금이라도 누가 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맞받아서 말했다. 도발을 해서 혼란을 야기시키고 경찰의 존재감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거기 말려들면 안 된다.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경찰이 그런 판단을 스스로 할 리가 없다. 대통령실이나 정부 고위층들이 막으라고 한 것이다. 다들 근거는 부족한데 자기 나름대로 상황 판단을 하였다.

추진위 상임대표 중 한 사람이 마이크를 잡았다. 남대문 경비과장은 똑똑히 들어라. 이건 집회 시위 방해이고, 현행범이다. 현행범에 대해서는 자력구제를 할 수 있고, 그것은 정당방위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실력행사로 경찰의 현행법 위반을 막을 수 있고, 그래도 된다는 것이었다. 상임대표는 그것을 몇 번씩 강조하였다. 경찰을 힘으로 밀어버리겠다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었다. 경찰이 그것을 바란다는 견해도 있었는데 아무튼 대표는 자력구제를 강조하였다.

경찰들에게도 말했다. 위법한 명령은 따르지 않아도 된다. 지금 경비과장은 현행범이다. 그의 명령에 따른다면 똑같은 현행범이 되는 것이다. 빨리 길을 비켜라. 12.3 계엄 상황에서 어떻게 됐는지 보지 않았는가. 군인들도 부당한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소극적으로만 대응했다. 이제 경비과장과 경찰들은 하루 빨리 범법 행위를 중단하고 합법행진을 보장해야 할 것이다. 경찰들은 반박하지 않았다. 물론 비켜서지도 않았다.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다가 시간이 좀 흐르면 해산하는 수밖에 없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우리가 모두 잡혀가는 한이 있어도 그건 안 될 말이라고 반박하였다. 이렇게 막무가내식 행진 방해를 묵인하면 앞으로 집회 시위의 자유는 엄청나게 위축된다는 이야기였다. 신돌석씨 생각에도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여러 가지 준비가 안 되어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단톡방에서 카톡 소리가 들렸다. 열어 보니 광화문 행사장에 참가한 지역 시민단체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느낀 감동을 말하고 있었다. 너무나 극명한 대조였다. 거기서는 지금 이 곳의 상황을 알기나 할까? 선언문에서 말한 우리가 승리자라는 것은 민주당이 승리자라는 말밖에 안 되는 것 같았다. 처참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진보진영을 멀리하려는 고도의 술수에서 취해진 것일까? 아니면 그저 경찰의 과잉충성일까?

신돌석씨는 무엇보다도 민주진보진영의 분열로 이어질까봐 그 점이 우려되었다. 여러 논의를 거치면서 신돌석씨와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에서 극우수구세력의 내란이 일단 진압되었지만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하게 제압하고, 그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려면 연합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어느 한쪽만의 힘으로 이 상황을 헤쳐 나가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연합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은 민주당과 소수정당이 연합정치를 해야 한다는 좁은 의미가 아니다. 정권에 진보인사를 포함시킨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민주진보진영의 내용을 인정하고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민주진보진영 역시 민주당 정권을 인정하고 협조하고 나아가야 한다. 다른 점이 있을 때는 서로 토론하고 양보하면서 가야 한다. 언제든 이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진보세력을 절멸시키겠다는 자들이 있는데 우리가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

개혁입법이나 내란청산 입법, 특검 등에서는 그런대로 연합정치가 이루어져 가는 듯했다. 그런데 오늘 같은 경우를 보면 정말 어이가 없다. 이 사태에 대해서는 철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하고,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현 정부의 핵심들이 그러한 생각을 가질까,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강제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회의적이다. 신돌석씨는 그런 점을 생각하자 갑자기 우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집회의 내용이나 분위기를 생각할 때 앞으로 미국 문제, 일본 문제 등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대해 많은 이견들이 나올 것이다.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런데 아주 최소한의 집회 시위 자유조차 이렇게 짓밟으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이 난제를 풀어갈 수 있을까? 신돌석씨는 정부 여당에 아는 사람도 제대로 없고, 그런 의견을 간접적으로라도 제기할 통로도 거의 없다.

정부 여당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은 한 자리 얻을까 하는 생각에 운신의 폭이 좁아져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얼마나 사실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이제 정말 내란정권을 종식시키고 내란세력 완전 청산을 해야 하는 마당에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집행부가 특별한 지침을 내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우회해서 앞으로 전진했고, 경찰은 굳이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대열은 최종 종착지로 예정된 송현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무리 집회를 하였다. 경찰의 무도한 집회방해에 대한 규탄이 주를 이루었다. 단톡방에서는 정부 행사에 대한 소식이 계속 올라왔다. 거기 간 사람들 상당수도 함께 내란청산 사회대개혁을 광장에서 외쳤었다. 오늘 사태는 민족민주운동에 대해 현 정부 혹은 제도권 정치가 극도의 불신을 보여준 것이었다. 장차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신돌석씨는 머리가 복잡해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