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 (식민역사문화청산회의 공동대표)

 

일제의 식민사관은 단군조선이나 삼국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각 문중의 씨족사(氏族史)와 문중의식(文中意識)도 난도질하였다. 삼국의 성립 연대를 늦추어 잡으니, 신라의 사로 6촌이나, 박혁거세와 김알지 석탈해 신화, 가야국의 김수로왕 신화, 제주의 삼성 신화 등등은 모두가 부정되었으니, 그들의 후손으로 자처하던 우리나라의 많은 토성들은 졸지에 근본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꼭 100년 전에 1925년에 출범한 조선사편수회는 그해 10월부터 조선사 편찬에 착수하여 16년의 작업 끝에 1938년 『조선사』 전질(35책) 간행을 완성한다. 그렇게 우리 민족의 역사적 맥락을 끊고 왜곡한 일제 총독 미나미(南次郞)는, 1939년 11월 10일자 제령(制令) 제19호로써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하였고, 다음 해인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모든 조선인이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창씨하여 호적계에 신고하도록 강요하였고, 창씨개명이 지지부진하자 최종 기한을 1941년 연말까지로 연장한다.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는 제주를 본향(本鄕)으로하고 있는 양씨나 고씨 부씨에게는 심각한 심리적인 타격을 준다. 그것은 탐라 역사의 주도 세력으로서 자신들의 모든 것을 부정당한 것이다.

1. 양을나(良乙那)의 후손 양씨(梁氏)

우리나라의 양씨(梁氏)는 모두가 탐라국 개국신화에 나오는 탐라국의 개국조 양을나(良乙那)를 단일 시조로 하는 동계혈족(同系血族)이다. 중시조 양탕(梁宕)은 탐라국광순사(耽羅國廣巡使)로서 신라 내물왕 28년(383) 신라에 입조하여 작록(爵祿)과 의관, 그리고 양성(梁姓)을 하사받았다. 이로써 시조 양을나 이래로 써 내려온 양성(良姓)을 양성(梁姓)으로 바꾸어 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후 양을나의 후손은 제주의 양씨(濟梁-濟州梁氏)와 육지의 양씨(陸梁-南原梁氏)로 크게 구분되는데, 남원양씨(南原梁氏)가 양씨(梁氏) 전체의 70%를 차지한다.

제주양씨를 비롯한 삼신인(三神人)과 관련된 유적은 제주 삼성혈(三姓穴, 사적 제134호), 벽랑국(碧浪國) 세 공주와 혼인한 혼인지(婚姻址, 제주도기념물 제17호), 삼사석(三射石, 제주도기념물 제4호)이 있다. 이들 세 성씨는 실재하는 실존 성씨이다. 각기의 을나는 전설적인 인물이 아니라 엄연히 실존 인물이다. 문화사학의 측면에서 보면 실존 인물에 신화적 요소가 들어가 만들어진 것이 삼신인(三神人) 신화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원초적인 신화를 후대에 각색하여 세계(世系)를 만들었다.

제주 삼성인 양씨 고씨 부씨의 시조인 삼신인은 맏이가 양을나(良乙那), 둘째가 고을나(高乙那), 셋째가 부을나(夫乙那)이다. 그중에서도 양대(兩大) 성이라 할 수 있는 양씨와 고씨 집안은 삼신인의 서열을 놓고 서로가 ‘맏집’이라고 주장을 해 왔다. 양씨의 연원에 대하여 [고려사(高麗史)], [동국통감(東國通鑑)], [해동역사(海東繹史)] 등에 나온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탐라국 개국신화에 의하면, 태고시대(太古時代)에는 제주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한라산 북쪽 기슭 땅속에서 삼신인이 솟아 나와 인간으로 화생(化生)하였다. 이곳을 삼성혈(三姓穴), 또는 모흥혈(毛興穴)이라 부른다. 삼신인 중 맏이가 양을나, 둘째가 고을나, 셋째가 부을나이다. 이때는 당요(唐堯9년)이라고 구보(舊譜)에 기록하고 있는데, 연대를 환산해 보면 단군창업(檀君創業) 이전이다.

삼신인은 짐승을 사냥하여 고기를 먹고 살았고, 짐승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 어느 날 동해에서 기이한 나무상자가 떠내려 와 가서 열어보니 무지갯빛 광채 속에서 벽랑국의 아리따운 세 처녀와 오곡의 씨앗과 가축의 종자가 들어 있었다. 삼신인은 세 처녀와 각각 결혼해서 살았으며 그 중의 맏이인 양을나가 탐라국을 개국하여 왕위에 즉위하였고 양을나의 후손이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양씨문중의 전설적인 인물 양탕(良宕)은 탐라왕 양을나의 후손으로 마한의 부족국가 신미국(침미다례)1)의 성주였다. 신미국이 백제 근초고왕에 의해 정복당하자 신라17대 내물왕 18년(374년)때 신라에 입조하였다. 내물왕은 환대하고 탐라 왕족을 진골로 대우하였고, 어질‘량(良)’을 대들보‘량(梁)’으로 사성하였다. 고려시대까지 ‘梁’과 ‘良’을 혼용하였다.

2. 양을나와 양씨를 다시 생각한다

이후 양을나의 원손(遠孫)인 양탕(梁宕)이 광순사(廣巡使)로 서기 373년 신라 내물왕18년에 성주왕자(星主王子)의 작호(爵號)를 받아 신라국에 입조하였고, 그때 개양성위양(改良姓爲梁) 즉, 良(양)을 梁(양)으로 사성(賜姓)하여 梁(양)씨를 쓰게 되었으며, 고려시대까지 ‘양(梁)’과 ‘양(良)’을 혼용하였다.

또한 양탕의 후예인 양자영(梁自瀛)이 신라 경덕왕 때에 신라 왕실에 공을 세워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지게 되었고, 757년(경덕왕16년)에 양우량(梁友諒)이 신라 왕실에 공을 세워 남원부백(南原府伯)에 봉해진 뒤 후손들이 남원양씨로 분적하였다. 남원양씨는 후대에 병부공파(兵部公派) 양능양(梁能讓)과 용성군파(龍城君派) 양주운(梁朱雲)으로 나뉘는데, 병부공파가 남원양씨의 약 80%를 차지한다.

한국의 양씨(梁氏) 인구는 460,600명(2015년)으로 인구 순위 24위이다. 제주양씨(142,211명)와 남원양씨(307,724명)가 대부분이다. 부계 유전자인 Y염색체 마커(Y-DNA) 분석을 통해 남원양씨가 제주양씨에서 분파된 혈통임이 유전적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기존 대종회와 종친회는 따로 분리되어 활동하였으나, 2025년 5월에 6개(제주, 남원, 충주) 지파 회장(유격공, 성주공, 병부공, 용성군, 대방군, 예성군) 6명과 종친회 회장 예하 임원진들과 상론하여 통합하기로 결론을 지었다고 한다.

양씨의 대종(大宗)인 제주양씨에서 남원양씨, 충주양씨, 나주양씨 등이 분관(分貫)되었으나, 일찍이 육지로 분적(分籍)한 남원양씨가 양씨의 다수(75%)를 차지한다. 이들 양씨 인구가 모두 460,600명(2015년)이다. 그런데 양씨는 본관이 분관되었는데, 다른 성씨와 문-무과 급제자 수를 세어 순위를 매길 때, 양씨는 분관된 상태에서의 각 본관의 급제자 수를 세고 각기 순위를 적으므로, 양씨는 다른 성씨보다 그 순위가 뒤처지게 된다.

필자는 이들 양씨는 동성이본동족이고 초간보부터 합보를 발행하는 전통이 있으므로, 네 본관의 양씨들을 모두 합산하여 통계에 넣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양씨 인구 46만 여명은 지난회에서 다룬 피평윤씨와 그 분파 인구 수 약 75만 여명보다도 30여만 명이나 적은 인구 수이다. 그러므로 네 개 본관의 양씨 전체를 하나의 본관으로 인정하고 그 급제자 통계를 내면 아래의 [표1]과 같다. 양씨는 조선시대에서만 문과에서 63장, 진사에서 74장, 생원에서 72장, 무과에서 172장, 잡과에서 12장의, 도합 393장의 급제자를 낸 것이다.2)

[표1] 양씨문중의 과거급제자 통계

본관

문과

진사

생원

무과

역과

의과

음양과

율관

합계

제주양씨

14

13

16

22

0

0

0

0

65

남원양씨

(고려 1)
46

(고려 1)
60

54

142

0

1

8

0

(고려 2)
311

충주양씨

2

1

1

1

0

0

0

0

5

나주양씨

1

0

1

7

3

0

0

0

12

합계

(고려 1)
63

(고려 1)
74

72

172

3

1

8

0

(고려 2)
393

제주양씨와 남원양씨의 인구 비례로 볼 때, 그 급제자 수는 흥미롭게도 엇비슷하다. 양씨는 시조의 탄신 신화가 깃들어 있는 제주도와, 제주에서 뱃길이 연결되는 호남에 많이 거주한다. 양씨문중에는 많은 인물3)이 있으나,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초기에 광정대부 판밀직사사 진현관 대제학을 역임한 양견(梁堅)과 려말선초에 조선의 개국을 반대하여 은둔한 양우(梁祐)4), 그리고 조선초의 세종조부터 세조조에 이르기까지 이조판서, 대사헌, 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지중추부사를 지낸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 1415~1482)를 우선하여 손꼽을 수 있다.

3. 양씨문중의 족보 편찬

양씨문중의 계보는 눌재 양성지(梁誠之, 1415~1482)가 초간보 편찬을 시작한다.5) 그의 [눌재집(訥齋集)] 권6에는 1481년(成化辛丑) 중구절(重九節, 음력 9월 9일)에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쓴 ‘남원군가승기(南原君家乘記)“와 1482년(成化十八年 壬寅) 맹하(孟夏, 음력 4월)에 이숙함(李淑瑊)이 쓴 ’남원양씨족보서(南原梁氏族譜序)‘가 수록되어 있다. 서거정이 1476년 [안동권씨세보] 병신보에 뒤이어 5년후에 1481년에 가승기(家乘記)를 썼고, 1482년에 간행하였다. 이것이 1482년 [남원양씨세보] 임인보이다.

1476년 [안동권씨세보]와 1482년 [남원양씨세보]의 연결점에는 서거정과 양성지가 있다. 안동권씨와 남원양씨는 인척으로도 연결된다. 즉, 서거정의 부친 서미성(徐彌性, 1383~1431)은 권근(權近, 1352~1409)의 사위이니, 서거정은 권근의 외손자로서, 1476년 병진보 중권25장에 이들 3대가 나온다. 또한 양성지의 부친 양구주(梁九疇)는 권담(權湛, ?~1423)의 사위이니, 양성지는 1476년 [안동권씨세보] 상권16면에 그 4대가 나온다. 양성지의 외할아버지 권담은 권근의 7촌 조카이다. 그리고 이는 양성지의 자녀와 서거정의 자녀가 결혼하는 등의 ‘사돈(査頓)’을 맺고 있었다.

이외에도 두 사람은 함께 학문과 문학 활동을 활발히 했다. 1481년에는 서거정, 강희맹, 성임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을 주도했고, 1482년에는 함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신증(新增)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함께 남겼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1482년 [남원양씨세보] 초간 임인보는 1476년 [안동권씨세보] 초간 병신보와 연결선상에서 편찬한 것이다.

현재까지 양씨 족보 판본(版本)에 관한 연구는 자료 수습이 미흡하여 아직 미진하다. 하지만 필자에 의하여 현재까지 조사된 양씨문중이 편찬한 조선시대의 족보는 대체로 [표2]와 같다.6) 이 목록의 족보 가운데, 1482년 [남원양씨세보(南原梁氏世譜)]는 실전하여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1587년 정해보는 필사본이 남아있다. 그러나 아직 정해보 실물은 확인하지 못하였다.

[표2] 양씨문중에서 편찬한 족보 목록

명칭

연도

서발

판종

권책

소장처

1

남원양씨세보
南原梁氏世譜

1482
임인보

徐居正(1481)-李淑瑊 서 (초간보)

미상

미상

실전

2

남원양씨세보
南原梁氏世譜

1587
정해보

金睟 서,
(1589년 기축보)

미상

3권1책(198장)

소장처 미상
(필사본 현전)

3

양씨대족보
梁氏大族譜

1686
병인보

梁禹萬 편

목판본

11권2책

필자(권1~2. 1책 영본), 국립중앙도서관, 계명대 동산도서관

4

남원대족보
南原大族譜

1755
을해보

梁學謙-梁遻孟 발

목판본

14권8책
14권4책

필자,
국립중앙도서관

5

남원양씨족보 - 병부공파보
南原梁氏族譜

1791
신해보

鄭赫臣 서(1781)

목판본

5권5책

필자(책2 결, 4책 영본),
국립중앙도서관

6

남원양씨외예보
南原梁氏外裔譜

1791
신해외예보

 

목판본

1책(11장), 양성지 외손보

필자, 국립중앙도서관 

7

제주양씨대족보
濟州梁氏大族譜

1803

 

목활자본

5

국립제주박물관

8

남원양씨세보
南原梁氏世譜

미상

미상

목활자본

11

필자(권23~26, 권27~30, 부록, 3책 영본), / 완질본 소장처 미상

9

제주양씨파보
濟州梁氏派譜

1875년(?)
을해보(?)

梁相輔(1875) 발,

목활자본

권1~3

필자 (2책 영본) / 완질본 소장처 미상

10

제주양씨족보
濟州梁氏族譜

1883
계미보

朴昌壽-梁相鼎 서(?), 梁相輔(1875) 발

목활자본

8권6책

국립중앙박물관

 

1686년 [양씨대족보] 병인보의 제1편에는 제주양씨의 중시조 양보숭(梁保崇)이 1세이지만, 제2편에는 남원양씨의 중시조 양능양(梁能讓)을 1세로 하고 있다.

(왼쪽) [양씨대족보] 제1편, 적 제주, 1686년, 목판본. (오른쪽)[양씨대족보] 제2편, 적 남원, 1686년, 목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왼쪽) [양씨대족보] 제1편, 적 제주, 1686년, 목판본. (오른쪽)[양씨대족보] 제2편, 적 남원, 1686년, 목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또한 1755년 [남원양씨대족보(南原梁氏大族譜)] 을해보는 남원양씨와 제주양씨를 함께 수록하고 있다. 조선중기에 제주양씨와 남원양씨의 합보로 만들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제주양씨와 남원양씨는 언제부터 합보를 만들었는가? 필자는 1482년 임인보때부터 그렇게 만든 것으로 본다. [표3]에서 보듯이 임인보 편찬 시기에 눌재 양성지의 셋째 아들 양찬(梁瓚, 1443~1496), 기축보 편찬시기에는 양성지의 고손자이자 양찬의 증손자 양사영(梁思瑩)이 각기 제주목사로 재임하였기 때문이다. 양찬이나 양사영은 제주목사로 있으면서, 제주양씨의 계보를 조사했을 것으로 보인다.7) 그러나 큰 성과는 없었던 것 같다.

한편, 양성지는 남원양씨 1대 양능양(梁能讓)의 13대이다. 남원양씨 1대 양능양은 좌복사(左伏射)를 지낸 고려 왕실의 왕림(王琳)의 사위이다. 고려왕실에는 왕림이라는 인물이 동명이인이 있으나, 좌복사를 지낸 왕림은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에 의하여 사사(賜死)된 효은태자(孝隱太子) 왕원(王垣, 왕건의 아들)의 아들이다. 이를 보면 왕림은 960년대 중반쯤 태어나 11세기초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며, 양능양은 11세기 전반기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즉 그는 1415년에 태어난 양성지보나 380~330년전에 생존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양능양의 13대가 양성지라는 양씨족보의 기록은 신뢰성이 높다.

이러한 관점에서 양씨문중에서는 언제부터 계보를 작성했는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떠 오른다. [눌재집(訥齋集)] 권6의 장32 앞면부터 장35 뒷면까지 있는 이숙함의 ‘남원양씨족보서’8)는 “南原訥齊梁先生一日謂余曰 吾家族氏舊有譜今欲為序而傳之子其勿辭余”로 시작하고 있다. 즉, “남원 눌재 양 선생께서 하루는 제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집안(家族氏)에는 예로부터 계보(舊有譜)가 있는데, 이제 서(序)를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하니 너는 이를 사양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언급이 있다. 즉 양성지는 이숙함이 서문을 쓰도록 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남원양씨문중은 늦어도 14세기 중반쯤에는 이미 계보를 확정해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한편, 1686년 병인보에는 양능양의 22대~23대까지 내려온 것을 보면, 양성지로부터는 1415년부터 1686년 [양씨대족보] 병인보가 편찬될 때까지 271년간 9~10대가 내려온 것이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대개의 족보가 각 장의 앞면에 천자문 장차를 한데 비하여, 1686년 병인보는 천자문 장차가 없이 오직 판심에 숫자로 장차를 매기고 있다. 그리고 상계대 아버지와 하계대 아들을 잇는 표시를 천자문으로 쓰고 있다. 이것은 선대와 후대를 연결하는 매우 특이한 편집이다.

[양씨대족보] 제1편, 양성지 부분. [사진 제공 – 이양재]
[양씨대족보] 제1편, 양성지 부분.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런데 제주양씨와 남원양씨의 족보 편찬 사실연구(史實硏究)에서 중요한 것은 “제주역사관의 확립한 후에 연구하여야 한다”라는 점이다. [양씨대족보]에는, 특히 1755년 을해보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1세가 있다. 양을나의 후손이고 관적도 남원이나 제주인데, 족보 편찬시 상계대를 맞출 수 없는 분들은 모두 기억하거나 기록에 남아있는 최고 연대의 선조를 각기의 1대로 정하여 수단하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족보 편성 과정에서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이다. 그렇게 하였다는 것은 조선중기와 후기에 족보를 편찬하면서 무리하게 계대를 맞추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조선시대 양씨가 세거하는 마을마다 나름대로의 작은 종가(宗家)가 있고, 그 계대가 계보로든 구전으로 든 있었을 것인데, 그것을 모아 수단한 것으로 보인다. 족보를 편찬할 경우 동족인 것은 분명한데, 촌수에 따른 계대를 맞추기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조선중기와 후기의 양씨문중은 그런 경우 이렇게 편성한 것이다. 집성촌 종가집의 선대 조상을 1대로 삼은 것이 분명하니, 이러한 [양씨대족보]는 같은 시대의 일반적인 다른 성씨 족보보다는 청보(淸譜)이다.

이상의 [표2]에서 언급한 여러 족보를 한 자리에서 비교 고찰할 수 있었으면 한다. 필자는 양씨의 족보를 고찰하면서 자료 확보의 부족함을 절감하였다. 필자가 소장하고있는 1791년 신해보는 낙질이며, 권3과 권5의 하편 부분이 낙장되이 있어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

양씨문중의 족보를 탐색하면서 ‘제주사와 현대 한국역사에서 보이는 제주 고대사와의 괴리감(乖離感)’은 상당히 크게 다가왔다. 그 괴리감을 역사적 실증주의 사학보다는 민속학과 신화학, 문화사학이나 문화인류학적인 검토로 충분히 메꿀수가 있다. 필자는 삼신인을 실재 인물로 보고 그 신화가 생성하고 발전한 과정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필자가 그렇게 정리한 것이 2025년 양씨종회보 [탐라국주] 제16호 pp.134~146에 기고한 ‘제주양씨(濟州梁氏)와 마한(馬韓)’이다. 이번 연재의 끝에 별첨하니 일독을 권한다.

4. 양씨 족보 편찬과 양씨 제주목사

1482년 임인보 편찬에, 그리고 1587년에 정해보(1589 기축보) 편찬과 당시의 제주목사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양씨로서 제주목사로 부임한 분은 모두 7명으로 [표3]과 같다.9)

[표3] 조선시대 제주목사로 부임한 양씨 7인

성  명

부임 시기

이임 시기

1

양찬(梁瓚, 1443~1496)

1478.10.

1581.07.

2

양사영(梁思瑩)

1586.11.

1589.10.

3

양집(梁諿)

1592.05.

1595.11.

4

양호(梁護, ?~1623)

1619.10.

1622.10.

5

양처대(梁處大, 1683~?)

1739.03.

1740.01.

6

양세현(梁世絢)

1771.01.

1773.03.

7

양헌수(梁憲洙, 1816~1888)

1864.03.

1866.08.

1482년 임인 초간보의 서문은 서거정이 1481년에 쓴 것을 보아 148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임인보 편성이 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 시기에 1478년 10월부터 1581년 7월까지 양찬(梁瓚, 1443~1496)이 제주목사였다. 양찬은 눌재 양성지의 셋째 아들이다. 즉 양찬이 제주목사였을 때 그의 부친 양성지가 1482년 임인보를 편찬한 것이다. 또한 1587년 정해 재간보가 편성되던 시기이던 1586년 11월부터 1589년 10월까지 양사영(梁思瑩)이 제주목사였다. 양찬은 물론이고, 양성지의 4대손(고손자)이자 양찬의 증손자 양사영도 제주목사로 있었다. 족보 편성에 어떠한 역할을 한 것인가?

한편, 1587년 정해보의 서문을 쓴 김수(金睟, 1547~1615)의 증모조가 양성지의 장손 양치(梁治, 1458~1520)의 딸이다. 조선전기 두 번에 걸친 [남원양씨세보]의 편찬에 양성지와 그의 후손들의 역할은 매우 컷다.

5. 맺음말

탐라를 씨족의 연원으로 두고 있는 양고부(良高夫) 삼성(三姓)은 모두 우리나라의 토성(土姓)이다. 그들은 지금 우리 민족의 중요한 구성원이다. 그들은 마한과 후기 신라, 고려, 조선, 독립항쟁의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탐라국 이전의 그들은 청동기시대에, 또는 철기시대에 북방에서 제주로 이주하여 제주를 평정한 선주민이다. 그리고 원삼국시대에 마한의 영역으로 진출하여 한때 부족국가 신미국과 그 주변의 여러 나라에 영향을 주며 마한 20국의 중심부를 장악을 하였다. 그러한 개연성(蓋然性)이 남원양씨와 제주양씨의 족보에서 읽힌다.

선대(先代)의 양씨(梁氏)들은 치열하게도 살았다. 태풍 속을 항해하듯 전투적인 투혼을 발휘하였다. 그러면서도 탐라 내부에서는 상생적 공존을 택하여 평화를 사랑하였던 것 같다.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기 이전에 제주는 여러 차에 걸쳐 역사와 문화가 지워지고 왜곡되었다. 그리고 제주 4.3으로 다시 역사와 문화가 지워졌고, 지금 다시 왜곡되고 있다.

제주를 바로 세우는데, 제주의 올바른 정체성을 되찾으려면, 1910년 이전에 제주에 살았던 사람들의 고문헌과 구비문학을 연구하여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 제주의 토성과 각 입도인들의 계보를 살펴보는 일도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족보 연구는 민족사관의 한 분야로 정리되어야 한다. 그런데 양씨문중에서는 언제부터 계보를 작성하였을까?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양능양으로부터 8~9대가 내려온 빠르면 13세기말이나 14세기초 쯤으로, 늦어도 14세기 중반에 계도(系圖)를 완성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별첨]
제주양씨(濟州梁氏)와 마한(馬韓)

 

주(註)

주1) 신미국(新彌國)은 마한에 속해있던 54국 중 하나이다. 침미다례(忱彌多禮), 신운신국(臣雲新國)으로도 기록되어 있으며, [진서(晉書)] ‘장화전(張華傳)’에는 서남해안 20여 소국을 거느리고 서진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미국은 전남 해남에 자리 잡고 있어 변한, 진한, 왜와의 교류에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이므로, 신미국은 3세기 후반 서남해안의 마한 20여 국의 맹주였고, 4세기 중반부터 서남해안의 교류 중심지가 나주와 영암으로 바뀌자 쇠퇴한다. 신미국은 탐라국과도 동일한 세력으로 연합하였을 것인데, 그 가능성을 남원양씨의 여러 구전과 족보 문헌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주2)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의 ‘문과 성관별 급제자수’ 통계(2019.05.29.)에는 남원양씨의 문과급제자가 54장으로 69위로, 진사시급제자는 69장으로 75위, 생원시급제자는 67장으로 75위, 무과급제자는 137장으로 30위로 나온다. 이 문과급제자 통계는 제주양씨 일부가 포함된 통계로 보이고, 또한 남원양씨 무과급제자 137장은 잘못된 통계로 보인다. 2025년 9월 현재 동(同) 시스템의 ‘성씨본관별 과거급제자’의 구분을 보면 [표1]과 같이 정리된다. 양씨 전체의 문과급제자는 63장으로 배출 순위는 61위이고, 진사시는 74장으로 71위, 생원시는 72장으로 68위, 무과급제자는 172장으로 25위이다.

주3) 청백리 양관(梁灌, 1437~1507)과 호남의 거유 양산보(梁山甫, 1503~1557), 중국에까지 문명을 떨쳤던 양희(梁喜, 1515~1580) 등도 조선초에서 중기 사이의 인물이다. 양씨 가문은 문인 못지않게 무인도 많이 배출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양대박(梁大樸, 1544~1592)이 있고, 임진왜란 때 진주산성에서 분전하다가 남강에 투신 순절한 양산숙(梁山璹, 1561~1593)과 동향의 5의사와 함께 왜적 수십 명을 죽이고 전사한 양응록(梁應祿), 정유재란시 전주성에서 싸웠던 양몽설(梁夢說)이 있고, 숙종 때 삼도수사(三道水使)를 지낸 양세현(梁世絢)의 집안은 5대에 걸쳐 18명의 병사와 수사를 배출했다. 신미양요때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로즈 제독의 프랑스 함대를 격파했던 양헌수(梁憲洙, 1816~1888)도 대표적 무인이다. 항일투쟁에도 선명한 업적을 남겼는데, 양상기(梁相基)는 1908년 80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과를 올리다 담양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양한규(梁漢奎)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 남원에서 의병 1천 명을 모아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며 북으로 진격하다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양기하(梁基瑕, 1878~1932)는 공주군수를 지내다 한일합병 후 만주로 망명 대한독립단 교통부장과 광복군 정보국장을 지냈으며 1922년 김구와 함께 노병회를 조직했고 1929년 조선혁명당의 정치부 책임자로 활약하다가 1932년 환인현桓仁縣에서 일경의 습격으로 순국한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에는 양전백(梁甸伯)과 양한묵(梁漢黙)이 있는데, 양한묵은 1906년 이준(李儁)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조직했고, 이듬해 손병희(孫秉熙) 등과 천도교 중앙총무를 결성, 친일파들에 맞섰다. 양기탁(梁基鐸)은 선각자로서 상해 임시정부 주석과 국무령 등을 지내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외롭게 산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다.

주4) 양우는 조선 개국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남원의 교룡산(蛟龍山)에 은거하여 충절을 지킨다. 태조가 양우를 집현전 대제학에 임명했으나 세 차례나 거절했다. 그는 이후 움막 속에서 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숨어 살다가 생을 마쳤다. 세인들은 그를 가리켜 동방의 백이숙제(伯夷叔齊)라고 하였다. 태조가 그를 벌하려 했을 때 중신들이 “양우를 벌하면 충신의 길이 막힌다.”고 간하여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양우가 91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사흘 동안 그의 움막 위에 무지개가 서고 교룡산에 천둥소리가 울려 사람들은 “충신의 높은 절개가 하늘과 땅에 통하였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주5) 양성지는 『고려사(高麗史)』를 개찬(改撰)하였고, 「연변방수도(沿邊防戍圖)」와 「팔도지리지」 작성하였다. 저서로는 「눌재집(訥齋集)」, 「논선서(論善書)」, 「시정기(時政記)」, 「삼강사략(三綱事略)」 등이 있다.

주6) 금년 7월 28일 자 필자의 기고 [1392~1600년; 서른여섯 문중의 옛 족보, 그리고 국가문화유산의 지정에 관하여]에서 부분 착오를 아래와 같이 정정한다. “8. [남원양씨세보(南原梁氏世譜)] 1482(임인보), 초간보, 실전. - 남원양씨문중에서 1587년 정해보 3권3책을 간행하였으나, 1482년 임인보는 실전하고 1587년 정해보는 필사본이 현전하는 것 같다. 1686년 [양씨대족보(梁氏大族譜)] 병인보 11권2책(목판본)과 1755년 [남원양씨족보(南原梁氏世譜)] 을해보 14권8책(목판본), 1791년 [남원양씨족보] 병부공파보 5권5책은 현전한다.”

주7) 따라서, 1482년 [양씨대족보] 초간보는 현전하지 않지만, 1686년 병인 삼간보에 수록된 제주양씨들의 계보를 탐색하였으나, 병인 삼간보의 제주양씨들은 거의 모두 조선초기 이후에 육지로 나가 흩어져 거주하던 제주양씨들다. 한편 1686년 병인 삼간보는 숙종조에 편찬된 조선중기의 족보이면서도 출생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주8) 양성지, [눌재집] 권6, 장32a~장36b. “南原梁氏族譜序 / 南原訥齋梁先生。一日謂余曰。吾家族氏。舊有譜。今欲爲序而傳之。子其勿辭。余謹按高麗史地理誌。南原。古帶方國也。土之姓有九。曰梁,鄭,晉,尹,楊,黃,李,林,宋也。而梁最爲望族。高麗時。有曰能讓。娶宗室左僕射王琳之女。任本府爲兵部郞中。是鄕職也。盖麗朝統三之初。特選州郡之望族。爲吏于鄕。世其官守云。能讓生得謙。得謙生得璜。得璜生卓英。卓英生堅。堅生利升。利升生忠立。忠立生唐就。皆爲本府戶長。唐就娶別將鄭瑞椿之女。生子曰俊。始登第起家。官至成均祭酒。娶將仕郞尹仲恭之女。生四子。曰東弼,東秀,祐,允儒。祐。奉翊版圖判書。贈通政大夫。戶曹參議。娶長沙監務朝宗李子虛之女。生子曰碩隆。通憲判衛尉寺事。贈嘉善兵曹參判。曰之碩。護軍。前室梁氏子友龍。繕工寺丞。參判娶別將驪興閔永宣之女。生三男三女。曰九疇,九膺,九陽。九疇。中訓禮賓寺尹。贈純忠補祚功臣。崇政議政府右贊成。南原君。女長適樂安郡事沈龜生。次適原州牧使趙良。次適張允濟。贊成初娶嘉善鐵原府使張原卿之女。生一男一女。曰敬之。承議三嘉縣監。女適司正李專命。後娶資憲全州府尹槐亭權湛之女。生二子。曰誠之。中世宗朝辛酉科進士,生員。連捷文科及第第二人。今爲純誠明亮佐理功臣。崇政南原君。兼知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參議,參判,贊成之追贈封君。皆以公之故也。曰信之。禦侮將軍,縣監。娶陟城君朴原鏡之孫。護軍准提之女。生一男二女。曰瑊。將仕郞。女長適內禁衛廉有恒。次適保功將軍趙玉生。大提學娶原川府院君邊安烈之孫。判官尙覲之女。生四子。曰瑗。禦侮 將軍,行大護軍。曰琇。通訓行旌善郡守。曰瓚。今通政承政院承旨。曰琥。通訓行稷山縣監。大護軍娶平山府使草溪鄭箴之女。生二男一女。曰治。司果。曰濟。承仕郞。女適弘文博士礪山宋軼。生一女。治娶宗室永善正利之女。生二男一女。皆幼。郡守娶禦侮將軍羅州朴秉中之女。生一男曰潤。承仕郞。承旨娶將仕郞鎭川宋常之女。生二男。曰泂。通仕郞。曰淑。從仕郞。縣監娶工曹佐郞晉州柳仁老之女。生二男二女。曰潔。承仕郞。曰活。從仕郞。女長適宗室楊麓副正粹。次幼。 上將娶光山君金若恒之子。判官處之女。生二男一女。曰璘。忠順衛司直。曰璹。內禁司猛。女適內禁衛李發。生一男一女。璘娶通禮門柳閶之女。生二男二女。璹娶從仕郞羅弘線之女。生一女。此皆譜之大略也。嗚呼。根深者末必茂。源遠者流益長。當麗朝統三之初。是光嶽氣全之日。人未澆訛。俗尙淳朴。凡鄕族之世爲吏者。忠厚寬重。積德不耀。故其子孫亦蒙陰報。立揚以顯。至今千有餘年。餘慶未艾者。如永嘉權氏,竹溪安氏,星山李氏,廣陵李氏與我南原梁氏。蔚然爲東方世閥之稱首。豈不偉歟。而間或有衰替不振者焉。惟梁氏。則自祖先。能以儒業起家。世濟其美。而先生又以華國文章大手。托誓山河。位躋一品。座逼三台。可謂掩前光而獨步矣。芝蘭玉樹之輝暎也。珪組簪纓之聯翩也。其世閥之慶。詎有涯也。先正尹會宗嘗有詩贈先生之先公云。一統三韓神聖王。外甥兵部永流光。盖實錄也。今世士大夫家。鮮有藏族譜以傳者。而先生抽舊藏索余序者。實欲以忠厚儒素之家業。爲子孫萬世之靑氊。以傳不朽。其用心亦勤矣。爲其子孫者觀此譜。則孝悌之心。油然而生。而思所以勿替。保之足矣。其敢忽諸。是爲序以歸之。時成化紀元之十八年。蒼龍壬寅孟夏有日。楊原後學李淑瑊次公。謹拜手書。”

[눌재집] 권6, 이숙함이 지은 남원양씨족보서 부분, 1791년, 정유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눌재집] 권6, 이숙함이 지은 남원양씨족보서 부분, 1791년, 정유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주9) [양씨종회보 – 탐라국주] 제16호 2005년, p.92., ‘조선시대 梁氏 제주목사’ 참조. 양씨종회총본부 발행. 기존의 [제주목사 일람표]와는 약간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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