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상임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갑진년을 보내고 을사년에도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야말로 다사다난하던 갑진년이 드디어 막을 내렸습니다.
계묘년에 시작된 반전은 갑진년을 발음 그대로 일단 값진 년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아니 내란 세력은 집요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지금의 정세는, 새것은 시작되었으나 미약하고 분화되어 있고, 옛것이 물러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형국입니다.
그리고 그 옛것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강하게 버티려 할 것입니다.
이제 다가오는 을사년은 을사늑약 120년, 광복 80년, 한일협정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특히 을사늑약과 한일협정이 있던 해는 을사년으로 치욕스런 해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심어 놓은 말뚝이 박정희의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거쳐 윤석열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제 그 말뚝을 뿌리째 뽑아서 을사년을 새로운 해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그 일에 한 사람의 시민으로, 노동자로 참여할 것입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2025. 1
신돌석씨는 다시 부스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새로운 기자회견이 준비되고 있었다. 6시30분이 다 되어서 기수단이 입장하고 본 대회가 7시부터 시작될 테니 아마도 마지막 기자회견일 것 같았다. 사전대회에서 흘러나오던 음악도 멈추었다. 기자회견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 듯하였다. 그리고 펼쳐 있는 현수막의 글귀가 관심을 갖게 하였다. 윤석열 정권의 안보실세라고 불리던 자의 대학 복귀를 반대하는 어느 민주동문회의 기자회견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신돌석씨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친일 친미의 사고를 신념으로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들었다. 그리고 이명박 때부터 청와대에서 근무했는데 그 뒤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가 윤석열 정부에서 대통령실에 근무하였고, 안보 관련해서는 상당히 힘이 센 실세라고들 하였다. 안보실 1차장이었는데 안보실장과 갈등이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하다고 하였다.
그런 그가 이제 윤석열이 파면되고 대선을 통해 정권이 바뀌자 다시 학교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그 학교 동문들과 학생들이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기자회견인 셈이었다. 교수와 정치인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돌석씨야 대학을 다닌 적이 없으므로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이 자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대학 교수로 돌아간다는 것에 대해서는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공감이 갔다.
사회자가 자기를 소개했다. 정치외교학과 21학번이라고 하였다. 아마 재학생인 모양이었다.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2021년에 대학에 들어간 사람이라면 21세기에 태어난 사람일 텐데 이런 자리에서 사회를 보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정치외교학과라면 그 자가 복직되면 바로 배워야 할 처지가 될지도 모르는데 요즘도 이렇게 용기 있는 행동을 하는 젊은이들이 있기는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신돌석씨는 왠지 흐뭇해졌다.
첫 발언자는 이 대학 민주동문회 회장이었다. 자신을 1981년에 대학에 입학한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사회자와 무려 40년이 차이가 나는 셈이었다. 그는 이 기자회견의 기본 취지를 이야기하였다. 그 자는 원칙적으로 모교의 강단에 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하는 것이라면서, 무엇보다 그 자는 윤석열의 최측근으로 내란 정권에 부역한 공범이므로 그 죗값을 치러야지 교수로 돌아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그 자의 죄를 보면 새삼 분노가 느껴지는 내용들이었다. 그 자는 자위대 한반도 개입론을 주창했고, 징용 배상에 대한 3자 대위 변제론을 칭송하였고, 미국의 도청을 문제없다고 했다고 한다. 신돌석씨는 이러한 내용들에 대해 자세히는 몰라도 대체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일본과 미국의 이익이 되는 생각만 하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하는지 뇌 구조가 이상한 인간 같았다.
이어서 발언에 나선 사람은 여학생이었다. 24학번이라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그 학생이 스스로를 소개하자마자 감탄사가 나왔다. 24학번이면 이제 2학년이다. 만 스무 살이 될 텐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을 고쳤다. 신돌석씨가 처음 노동운동을 시작했을 때 이 나이에 노동현장에 들어온 대학생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그때 자신을 대단한 혁명가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발언자는 그 자가 채상병 순직 사건 피의자임을 이야기하고, 그런 자가 교수로 돌아온다는 것은 도저히 학생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한 청년의 죽음이 어떻게 정치와 조직의 이해관계 속에 훼손되는지를 목격하며 그 사건의 책임 의혹이 제기된 인물이 우리학교 강단에 서는 것은 20대 청년들에 대한 모욕이라며 재학생의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나쁜 짓은 골고루 한 자인 것 같았다.
이어서 연대발언이 있었다. 전국민주동문회협의회 고문이기도 하고, 시민사회단체의 대표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늘이 광복 80주년이라고 말을 떼면서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라는 광복절 노래를 인용하였다. 그만큼 우리 민족 구성원들에게 기쁜 날이 광복의 날인데, 사실 우리 민족 모두가 기뻐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그날이 오는 것을 두려워한 자들도 있었고, 몸을 숨기고 도망간 자들도 있었다.
그는 그런 자들이 바로 친일파라고 하면서, 해방 이후 그들이 몸을 숨겼다가 이승만이 들어서자 다시 권력을 차지한 뒤 자신들을 위장한 대표적인 곳이 바로 학교 종교단체들이었다고 하였다. 그들은 마치 교육사업과 종교활동에 매진하는 사람처럼 하면서 사실은 친일행각을 계속해서 벌여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내란이 진압되자 내란 잔당들이 학교로 교회로 숨어들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지금 학교 복귀를 반대하는 이 자는 친일파인데, 단순히 일본과 친한 정도가 아니라 친일사상을 체화한 자로 그가 학교로 숨어들려고 하는 것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광복 79주년인 작년 광복절에 인터뷰를 하면서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라고 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본 위주로 생각하는 자, 그런 자들이 왜 독재정권에서 활개를 칠 수 있는지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면서 발언을 마무리했다.
졸업생인 회장과 재학생의 발언, 연대사가 끝나자 마지막으로 기자회견문 낭독이 있었다. 교수와 재학생이 함께 성명서를 낭독하였는데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학문과 교육에 열중해야 할 교수직보다는 실패한 정권의 안보실세로서 권력을 휘두르는 데 더 몰두하며 각종 의혹에 연루되어 온 자가 학생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가 라고 물었다. 나아가서 이 자의 행태가 학생들의 수업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학교법인을 향해 공평무사해야 할 인사·행정에도 일대 해악이었음을 엄중히 지적하였다. 또한 그에게 조속히 교수직을 자진 사퇴하고 학교를 떠나라고 강력히 촉구하였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특검 수사를 받고 처벌을 받으면서 속죄하는 것이지, 학교에 돌아와서 더러운 입을 놀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고 하였다. 이어서 참가한 성원들이 함께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기자회견을 마무리했다.
기자회견이 끝나는 것과 기수단이 입장하는 것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신돌석씨는 대회 대열 옆 인도에 섰다. 기수들이 들어와서 양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김민호가 오른쪽 인도의 삼분의 일쯤 되는 곳에 섰다.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는 노동자회’라는 깃발이 뚜렷하게 보였다. 이따금씩 바람이 불기는 했지만 여전히 꽤 더웠다. 오늘도 열대야가 될 것이 틀림없을 듯하였다. 신돌석씨는 김민호가 서 있는 곳 옆으로 가서 섰다.
대회 시작이 선언되었다. 탄핵정국 때 비상집회 단골 사회자였던 젊은 여성이 시작을 알렸다. 신돌석씨는 그 사람과 안면이 있다. 그냥 연대 회의 등에서 보는 정도였는데, 어느 날 보니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6월 집회 때는 기회가 되어서 사진 찍자고 했다. 찍은 뒤 아내, 힘찬이, 아름이에게 자랑 삼아 보냈다. 갑자기 아이돌 팬이 된 느낌이었다. 이렇게 광장에서 스타가 나오는 것은 좋은 일일 것 같았다.
비상행동이 주도하는 탄핵 집회가 젊은 응원봉 부대의 호응을 얻은 데는 이 사회자의 기여가 컸다고들 한다. 여의도에서 한 탄핵 집회에서부터 시작된, 대중가요를 집회 구호와 연결시키는 묘수를 이 사람이 창안해 냈다고 한다.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로제의 아파트’를 따라 불렀고, 젊은 응원봉 부대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자연스럽게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 호흡이 남태령이나 한남동 철야 집회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이번 대회의 기조는 ‘광복 80주년, 항일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분단 냉전을 넘어 자주와 평화의 새 시대를 열자’ 였다. 대회 명칭도 ‘광복 80년, 평화·주권·역사정의 실현 8·15 범시민대회’이다.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정세의 영향 탓인지 ‘통일’이라는 구호를 보기가 힘들었고, 부쩍 미국에 대한 규탄이 늘었다. 트럼프가 재집권하면서 관세 압박, 안보 위협 등이 거세지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다.
김민호는 역시 사회대개혁은 실종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대회 발언자들이 거의 대부분 반미에 치중한다는 것이다. 김민호의 성향을 보여주는 말이기는 하지만, 신돌석씨도 어느 정도는 신경이 쓰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반미라는 말이 거칠게 들린다고 하면 대미 자주화는 우리 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제는 이러한 점에 대해서 부정하는 운동진영 사람은 없다고 봐도 된다. 그런 사람은 변절했거나 아니면 이탈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이나 과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일치되지 않는 점들이 있다. 과거 노선 때문만은 아니다. 당장 신돌석씨가 사는 지역의 운동에서도 이러한 점에 대한 이견이 구체적 현안에 맞닥뜨리면 나오곤 한다. 사실 대미 자주화의 문제는 처음 나온 것이 아니다. 미군이 이 땅에 들어온 해방정국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그 이후 한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그것이 이 사회 모순의 커다란 부분인데 사라질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공식적 대중적 운동에서는 사라졌다. 골방에서 하는 세미나나 돌출행동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된다. 4.19혁명이나 6.3항쟁에서도 미국 문제가 거론될 수는 없었다. 1970년대 그 치열했던 민주화투쟁의 과정에서도 대중은 물론이려니와 대다수 활동가들도 미국은 여전히 독재정권에 압박을 가해줄 수 있는 나라라고 여겼다. 여기에서 극적인 변화를 불러온 것이 바로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이었다.
몇 년 전 5.18광주민중항쟁 기념 서울집회에서 어느 발언자가 광주민중항쟁의 의의를 정리하면서 폭압에 대해서는 무장을 해서라도 항거한다는 정신, 미국은 민주화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독재를 지원하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운 대미 자주화 정신, 계엄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수만 명이 투쟁을 하면서도 한 건의 범죄도 없는 평화의 정신, 주먹밥을 나누고 헌혈을 하면서 서로 함께 하는 대동 상생의 정신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5.18광주민중항쟁을 대미자주화에 연결하는 것을 처음 들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종종 따로 생각하며 놓치는 것이라서 새겨들을 만했다. 5.18 이후 미국 문화원 방화, 점거농성 등이 있었고, 시위 때마다 미국 문제가 거론되었는데, 사실 갈지자를 걸으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반미운동 하면 운동은 망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반미자주 없이 민주는 허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둘 다 틀린 말이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대미 자주화는 우리가 놓아서는 안 되는 전략적 침로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은 지난하다. 계기를 잘 잡아서 대중이 움직이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생전에 조철구는 이 점을 늘 강조했다. 결국 미국으로부터 자주적일 수 있는 힘은 대중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었다. 활동가들의 자기만족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미 자주화라는 전략적 침로는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강조하였다.
요즘 와서 부쩍 미국이 이제 예전의 미국이 아니라는 말을 듣는다. 심지어 미국이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반대 견해도 만만치 않다. 부자 망해도 3대는 간다고 여전히 미국은 가장 강한 나라이다. 지금의 현상이 미국의 약화를 막아 보려는 몸부림이라고 해도 미국의 위세에 반기를 들 나라는 현재 없다는 것이다. 신돌석씨는 누가 옳은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대중의 변화와 그 한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미국이 우리의 은인이고 훌륭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극소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장에서 성조기를 흔들어대는 사람들을 보고 질리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이들이 갑자기 불어난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그런 사고, 그런 정서 속에서 살았다. 우리가 미국의 식민지이냐 아니냐 가지고 논쟁도 아닌 논란을 단톡방에서 벌이는 이들이 있는데, 정신적으로 우리가 미국에 예속된 채 오랜 세월을 지났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후 사람들은 미국도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나라이고,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주려고 하는 나라는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88올림픽 때 관중들이 미국보다 소련과 중국을 더 응원하는 것을 보고 보수언론은 기겁을 했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러시아나 중국을 미국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 대한 반감이랄까 그런 정도였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한다.
지금은 매우 엄중한 시기이다. 트럼프가 재등장하면서 미국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표방하면서 다른 나라를 협박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이제 그 나라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다. 이럴 때 우리나라에 민주정부가 들어선 것은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와 이 사회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친미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이 시기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질서가 커다랗게 변하는 때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런데 정해진 것은 없다. 역관계에 따라, 각국의 하는 바에 따라 세계 질서는 재편될 것이다. 가장 우려할 것은 대중과 괴리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적 설득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중적 설득력이 있으려면 연대의 정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점들의 대강은 조철구가 신돌석씨에게 남겨준 것이다. 이 시점에서는 신돌석씨와 남은 이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사회자가 9시부터 행진을 하겠다고 하였다. 지금 시간은 8시반이다. 아직도 30분 더 있어야 한다. 무대에서는 발언도 하고 공연도 했지만 그다지 몰입되는 분위기는 아니다. 발언하는 사람마다 거의 비슷한 내용이다. 조금 안타깝다. 그리고 수도권 이외 지역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단톡방에 보면 일찍부터 부근 술집으로도 빠져나갔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행진을 시작하는 것일까?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