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 (식민역사문화청산회의 공동대표)
지난 제126회 연재 「조선의 유민, 그리고 정씨문중의 족보」의 맺음말에서 “옛 조선의 유민이 남하하여 여섯 부족국가를 이룬 사로(斯盧) 육촌(六村), 사로 육촌이 주도하여 건국한 서라벌(徐羅伐), 서라벌이 발전한 신라(新羅). 그리고 신라가 내어놓은 사로 육촌의 부족 이름, 육촌의 부족 이름이 여섯 개의 성씨(姓氏)가 되고, 그 여섯 개의 성씨가 후일 사는 곳에 따라 본관(本貫)을 갖는다. 부족에서 씨족이 시작하고 문중이 형성된다.”라며 우리나라의 신라계 토성의 일부를, 그리고 제127회 연재에서는 백제 계열의 토성 가운데 한 벌족이라 할 수 있는 ‘잔양하씨’를 다루었다. 이번에는 경기도 북부의 대표적인 토성이라 할 수 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를 다루고자 한다.
1. 파평윤씨와 윤씨
윤(尹)씨는 2015년 한국의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020,547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8위이다. 윤씨의 본관은 20여 본(本)이 현존하는데, 이 중 약 3/4은 파평윤씨와 그 분파(남원윤씨, 함안윤씨, 야성윤씨, 덕산윤씨, 신녕윤씨 등)가 이에 속한다. 이 외에도 칠원윤씨, 해남윤씨, 해평윤씨, 무송윤씨 등이 있는데, 그들은 동성이본이족(同姓異本異族)이다.
파평윤씨(坡平尹氏)의 파평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을 말한다. 시조 윤신달(尹莘達, 893~973)은 고려 태조(太祖, 877~943)를 도와 벽상삼한익찬2등공신(壁上三韓翊贊二等功臣)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다. 파주 파평산(坡平山)에는 용연(龍淵)이 있는데, 옥함(玉函, 또는 金櫃)이 용연의 물 위에 떠오르면서 그 안에서 시조 윤신달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1)
이 전설은 문화인류학적인 견지에서 우리 민족의 여러 신화와 대비하여 볼 때 매우 중요한 분석 결과를 가져다준다. 퍄평윤씨의 시조가 윤씨인 것은 옥함을 발견하고, 옥함에서 나온 아이를 키운 할머니가 윤씨 할머니였기 때문에 파평윤씨의 시조가 윤씨 성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용연은 용이 있는 연못이라는 의미이므로, 거기서 나온 파평윤씨의 시조는 수신(水神)의 후손이라는 심리적 우월감을 후손들에게 준다. 이것은 고구려 주몽이 수신 하백의 외손자라는 의미와 통하는 문화심리학이나 문화인류학적 현상으로 고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즉, 파평윤씨는 고려 초의 여러 호족집단 중에서는 패서(浿西) 호족으로 분류되므로, 고구려 유민 계통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삼국시대의 오랫동안 파주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였다.
서기 943년에 고려 혜종(惠宗, 재위 943~945)이 즉위하자, 시조 윤신달은 동경대도독으로 부임하여 30년간 재임하다가, 81세에 임지에서 사망한다. 그의 묘는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구봉산 아래에 있다.
시조의 5세손인 윤관(尹瓘, 1040~1111)이 1074년(고려 문종(文宗) 28년)에 문과 급제하여 고려 선종(宣宗, 재위 1083~1094) 때 합문지후(閤門祗候)와 좌사낭중(左司郎中)을 지냈다. 1107년(예종 2) 여진 정벌의 원수가 되어 부원수인 오연총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면으로 출전하여 함주(咸州), 영주(英州) 등에 9성을 쌓아 여진을 평정하였다. 이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에 책록되고, 영평현(鈴平縣) 개국백(開國伯)에 봉해졌으며, 수태보 문하시중(守太保門下侍中) 겸(兼)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이르렀다.
즉, 파평윤씨는 시조 윤신달과 5세손 윤관이 이미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문벌로 성장하여, 고려 중기와 후기에도 여전히 관료를 배출하면서 그 지위를 누리고 있던 대표적인 가문이다. 파평윤씨 윤관에게서 남원윤씨(南原尹氏), 함안윤씨(咸安尹氏), 야성윤씨(野城尹氏), 덕산윤씨(德山尹氏), 신녕윤씨(新寧尹氏) 등이 분적(分籍)해 나간다.2)
2. 조선전기에 벌족(閥族)으로 일어난 파평윤씨
파평윤씨는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347명, 왕비 5명, 상신 11명을 배출하였다. 시조의 14세손 윤승례(尹承禮)가 고려 말기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윤승례의 아들인 윤번(尹璠, 1384~1448)의 딸이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가 되면서, 윤번의 맏아들인 윤사분(尹士昐)과 셋째 아들인 윤사흔(尹士昕)이 우의정에 올랐고, 차남인 윤사윤(尹士昀)은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윤사윤의 손자인 윤여필(尹汝弼)의 딸이 중종의 제1 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1515)이고, 그녀의 오빠가 윤임(尹任)이다. 장경왕후 사후 윤사흔의 증손인 윤지임(尹之任)의 딸이 제2계비로 책봉되어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가 되었다. 문정왕후의 아들이 제13대 왕 명종(明宗, 재위 1545~1567)이 되면서,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 1503~1565)은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윤승례의 형인 윤승순(尹承順)의 아들인 윤곤(尹坤)은 태종(太宗, 재위 1401~1418)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에 책록되고 우참찬을 지냈다. 윤곤의 손자인 윤호(尹濠)는 딸이 성종비 정현왕후(貞顯王后)가 되자 국구(國舅)로서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윤곤의 증손인 윤필상(尹弼商)은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때 영의정을 지냈다. 이러한 상황을 보았을 때 파평윤씨는 조선전기 족보의 창안(創案) 시대에 초간보를 1539년에 편찬 간행할 충분한 여력이 있었다.
3. 파평윤씨 세계를 통해서 본 한국족보의 시작점
파평윤씨 족보에 따르면 시조 윤신달(尹莘達, 893~973)부터 5세손 윤관(尹瓘, 1040~1111)까지 전부 독자(獨子)로 내려오고 있다. 즉 시조 “윤신달 → 윤선지 → 윤금강 → 윤집형 → 윤관” 순(順)이다.
족보에 의하면 윤관은 7형제를 낳아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3) 그런데 [윤언이 묘지명(尹彦頤墓誌銘)]4)은 [파평윤씨족보]와는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윤언이(尹彦頤, 1090~1149)5)의 묘지명(1150년)에 따르면 “윤신달 → 윤○○ → 윤선지(尹先之) → 윤집형(尹執衡) → 윤관” 순(順)이다. 파평윤씨의 족보는 후대에 와서 자료의 근거에 의하여 편찬한 책이다. 반면에 [윤언이 묘지명]은 1150년 당대의 기록이므로, 후대의 기록보다도 신뢰성이 앞선다.
본 논고의 아래에서 다루고 있지만, 족보 편찬 간격(Interval)이 짧은 파평윤씨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계보의 형성은 12세기 중반 이후에 나오기 때문이다. 11세기 중반, 즉 1150년의 [윤언이 묘지명]은 비록 5대를 기록하고 있지만 파평윤씨 최고의 계보 기록이다. 1150년 묘지명은 고려 의종(毅宗, 재위 1146~1170)때 김관의의 [왕대종록(王代宗錄)] 편찬 연대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전하는 파평윤씨의 최고본 족보 1613년 계축보에는 “윤신달 → 윤선지 → 윤금강 → 윤집형 → 윤관” 순인 것을 보아, 1539년 기해 초간보에도 “윤신달 → 윤선지 → 윤금강 → 윤집형 → 윤관” 순이었을 것이다. 파평윤씨가문에서 1539년에 초간보를 내었다고 해도, 이 초간보 간행 이전에 고려말(14세기)부터 필사 전승된 가보(家譜)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1150년 묘지명에서부터 1539년 기해 초간보까지는 389년의 시차가 있고, 조선 개국 1392년까지는 242년 시차가 있다. 1150년 묘지명과 1539년 초간보의 상계대가 일부 다른 것은 1150년으로부터 상당 기간, 거의 2세기(200년) 동안 계보가 기록보다는 구전(口傳)으로 전승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구전은 혼동을 수반한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어느 계대가 맞다 틀리다 하는 논쟁은 별 의미가 없다. 1150년 [윤언이 묘지명]이 당대의 기록이므로 최우선이지만, 족보의 형성 과정을 볼 때 1539년 [파평윤씨동성보(坡平尹氏同姓譜)] 기해 초간보를 위시한 이후의 [파평윤씨성보(坡平尹氏姓譜)]들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1613년 계축보에 들어있는 1539년 기해 초간보의 서와 발문에 따르면, 파평윤씨는 천순연간(天順年間, 1457~1464)에 이미 족보를 작성하였고, 가정(嘉靖) 초기인 1520년대에도 계수(繼修)된 바 있으나, 이 모두 간행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 서문조차 전하지 않는다. 당시에 작성한 족보는 필사본으로 가계도(家系圖)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150년의 [윤언이 묘지명]을 미루어 보면, 천순연간과 1520년대에 편성한 족보는 상당한 수준의 선보였을 것이다. 그 형식과 수준이 1613년 계축보에 그대로 나타난다.
4. 파평윤씨가 편찬한 조선시대의 족보
고려와 조선의 명문 파평윤씨 문중에서는 1539년에 [파평윤씨동성보(坡平尹氏同姓譜)] 초간 기해보를 간행한다. 윤개(尹漑, 1494~1566)가 편찬하고,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이 서문을 섰으나 현전하지 않는다. 이후 1585년에도 [파평윤씨성보(坡平尹氏姓譜)] 을유보를 윤인함(尹仁涵, 1531~1597)이 편찬하고 윤면(尹勉)이 발문을 썼으나 현전하지 않는다.
파평윤씨 문중에서는 1634년 [파평윤씨성보] 갑술보 6편1책(목판본)이 파평윤씨족보로는 현전하는 최고본 족보라고 주장하지만, 1613년 [파평윤씨성보] 계축보 3권1책(목판본)이 현전하고 있다. 파평윤씨문중에서는 1613년 계축보의 간행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파평윤씨문중에서 조선시대에 편찬한 족보는 아래와 같이 8종이다.
[표1] 파평윤씨문중의 족보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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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
명칭 |
연도 |
서발 |
판종 |
권책 |
소장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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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坡平尹氏同姓譜 |
1539년 |
尹漑 찬, 蘇世讓 서 |
목판본 |
1책 |
실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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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坡平尹氏姓譜 |
1585년 |
尹仁涵 찬, 尹勉 발 |
목판본 |
1책 |
실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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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坡平尹氏姓譜 |
1613년 |
權盼 발 |
목판본 |
3권1책 |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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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坡平尹氏姓譜 |
1634년 |
尹煌 발 |
목판본 |
6편1책 |
필자, 한국유교문화진흥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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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坡平尹氏族譜 |
1682년 |
尹趾善 찬, 尹拯-尹尙元 발 |
목판본 |
9권7책 |
필자, 국립중앙도서관, 한국유교문화진흥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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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坡平尹氏續譜 |
1726년 |
尹惠敎 찬 |
목활자본 |
23권12책 |
한국유교문화진흥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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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增修坡平尹氏族譜 |
1770년 |
尹光紹 발(계미 1763, 경인 1770 추지). 계미보라고도 한다. |
목판본 |
34권20책 |
국립중앙도서관, 한국유교문화진흥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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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坡平尹氏世譜 |
1832년 |
尹行直 찬, 尹聲大 서, 경인보라고도 한다. |
校書館印書 |
42권43책 |
국립중앙도서관, 한국유교문화진흥원 |
1536년 기해보를 초간보로 본다면 1634년 갑술보는 사간보(四刊譜)에 해당한다. 16세기와 18세기의 파평윤씨문중은 다른 문중들에 비하여 족보 편찬의 간격(Interval)이 짧다. ①기해보(1539년) -(46년) → ②을유보(1585년) -(28년) → ③계축보(1613년) -(21년) → ④갑술보(1634년) -(48년) → ⑤임술보(1682년) -(44년) → ⑥병오보(1726년) -(44년) → ⑦경인보(1770년). 그리고 경인보로부터 62년후에 ⑧임진보(1832년)가 나온다.
조선시대에 이렇게 족보 편찬 간격이 짧은 문중은 파평윤씨 문중이 거의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대성(大姓)인 경우 순조조부터는 대체로 파보 편찬의 시대이니, 족보 편찬은 상당히 증가한다. 이런 대성의 경우에는 영조조와 정조조에 이르면 벌써 일부 족보가 흐려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편찬된 파평윤씨문중의 옛 족보만으로도 족보 편찬의 변화 과정을 읽어 낼 수 있다.
5. [파평윤씨성보(坡平尹氏姓譜)]
1634년 [파평윤씨성보] 갑술보에 실린 서문과 발문을 참고하면, 1539년에 윤개(尹漑, 1494~1566)가 주관하여 초간보인 기해보(1539년)를 간행하였고, 1585년에는 윤인함(尹仁涵, 1531~1597)과 윤면(尹勉) 등이 중심이 되어 중간보인 을유보를 간행하였다. 그러나 1539년 기해보와 1585년 을유보는 확인된 현전본이 없다. 파평윤씨대종회에서는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파평윤씨성보]는 1634년에 목판본으로 발행한 갑술보(甲戌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1634년 갑술보에서 21년 앞선 1613년에 [파평윤씨성보] 계축보 목판본 1책을 간행하였는데, 이 계축보가 현전한다.
- 삼간 계축보 : [파평윤씨성보(坡平尹氏姓譜)] 1613년(癸丑譜), 3편1책, 삼간보(三刊譜), 목판본, 반곽(半廓)은 가로 23.2cm, 세로 30.5cm이며, 책 크기는 세로가 37.6cm이고, 가로가 26.0cm이다. 표제는 [파평윤씨족보(坡平尹氏族譜)]라고 목판 인쇄한 제첨을 붙이고 있지만, 족보의 본문에는 [파평윤씨성보]라 쓰고 있다. 1613년 계축보의 앞에는 1539년(중종 34)에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이 지은 기해보(己亥譜)의 서문 ‘파평윤씨동성보서’가 실려있고, 그다음에는 ‘파평윤씨성보목록’이 있으며, 그 위에 ‘파평윤씨성보’의 족보가 상중하(上中下)로 편성되어 실려있다. 상편은 3장이고, 중편은 16장이며, 하편은 36장이다. 이 족보가 끝난 후에는 1585년(선조 18) 윤면(尹勉)의 을유보(乙酉譜) 발문이 있고, 그 뒤에는 1613년(광해군 5) 권반(權盼) 계축보(癸丑譜)의 발문이 있다. 그리고 맨 마지막 면에는 ‘중간유사진주거유학윤흥선(重刊有司晉州居幼學尹興善)이라고 중간자(重刊者)를 밝히고 있다. 이 계축보가 파평윤씨 가문의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옛 족보이다. 특이한 점은 1476년 [안동권씨세보] 병신보에서 처럼 횡칸이 없고, 선을 그어 세대를 연결하고 있다.
- 사간 갑술보 : [파평윤씨성보(坡平尹氏姓譜)] 1634년(甲戌譜), 4편1책, 사간보(四刊譜), 전주에서 목판본으로 간행. 반곽(半廓)은 가로 21.2cm, 세로 28.8cm이며, 유계(有界), 주쌍행(註雙行). 체제는 서문(序文), 목록(目錄), 보도(譜圖: 元·亨·利·貞), 발문(跋文)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록은 각 편(원·형·이·정)의 장수(張數)와 수록 대수, 그리고 상대(上代)의 계통도를 간략하게 도식한 것이다. 발문은 모두 3종인데, 맨 처음은 1613년(광해군 5) 권반(權盼) 계축보(癸丑譜)의 발문이고, 그 다음은 1634년 윤황의 갑술보의 발문이며, 마지막은 1585년(선조 18) 윤면(尹勉)의 을유보(乙酉譜) 발문이다.
이 갑술보는 ‘파평윤씨성보’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저히 본파(本派)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타성(他姓)이 전혀 수록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위 당대에 그치고 있어 외손을 수록하는 이 시기 다른 족보와는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원편(元篇)·형편(亨篇)·이편(利篇)·정편(貞篇)의 4편 체제를 중심으로 별록(別錄)과 추록(追錄)이 첨부된 구성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갑술보가 1613년 계축보의 편찬 예를 따르고 있음을 학인시켜 준다.
원편은 3장(張) 분량으로 1세 시조 윤신달(尹莘達)에서 12세까지를 수록하였고, 형편은 16장 분량으로 13세에서 18까지를 수록하였다. 이편은 4편 중 가장 많은 83장 분량으로 19세에서 24세까지를 수록하였으며, 정편은 10장 분량으로 25세에서 27세까지를 수록하였다. 별록에는 세계(世系)가 이어지지 않는 20여 가계가 수록하였고, 추록에는 간행이 종료된 이후에 단자를 제출한 가계를 수록하였다.
보도는 6층 횡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매 장마다 천자문에 따라 장차가 매겨져 있다. 보도의 맨 하단에 해당 계파의 거주지가 군현명으로 표기하고 있다. 인명은 대부분 이름만 표기하고 있고, 관직이 있으면 이름 아래에 관직을 표기하였다. 과거 합격자의 경우 문과를 거쳐 참판을 지냈으면 문참판(文參判), 무과를 거쳐 현감을 지냈으면 무현감(武縣監)이라 표기했고, 생원·진사는 생원 또는 진사로 주기를 달았다. 이러한 점은 조선전기에 편찬된 족보의 특징을 보여준다. 다만 자녀는 선남후녀의 방식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조선후기 족보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 오간보 : 1682년 [파평윤씨족보] 임술보는 이전의 족보에서 한 단계 뛰어넘는 학장된 편찬력을 보여주고 있는 매우 중요한 족보이다. 목판본 9권7책이다. 편찬자 윤지선(尹趾善, 1627-1704)은 1682년(숙종8)에 함경도관찰사로 재직하면서 파평윤씨족보(임술보)를 간행하였다. 윤지선은 종인 윤숙(尹璹)이 몇 년에 걸쳐 증수한 내용을 바탕으로 9권 7책의 목판본을 제작하였으며, 기존 갑술보보다 더욱 확장된 형태로 후록과 별록을 추가하였다.
임술보에서는 갑술보에서 볼 수 없었던 천자문 순서의 장차(張次)와 색인표를 도입하여 가독성을 높였으며, 선남후녀의 원칙으로 자손을 기록하는 방식과 외손 기록의 확대, 서자와 적자의 명확한 구분6) 등 족보의 체계를 더 명확하게 하였다.
6. 맺음말
파평윤씨의 시조 윤신달은 고구려 유민 계통의 후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는 고구려의 재건을 표방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편에 섰고, 삼국시대의 가장 오랫동안 파주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파평윤씨는 1539년 기해 초간보를 [파평윤씨동성보]로 하였고, 1585년 을유보와 1613년 계축보, 1634년 갑술보를 [파평윤씨성보]라고 하였다. 1682년 임술보부터 ‘족보’라는 명칭을 쓴다.
1613년 계축보의 표제(標題)에 목판으로 찍은 ‘파평윤씨족보(坡平尹氏族譜)’라는 제호를 붙이기는 했지만, 본문에서는 족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계보서에 ‘족보(族譜)’라는 명칭을 사용한 가장 오래전 족보는 현재로는 1545년 [청송심씨족보] 을사보로 확인된다. 안동권씨나 문화류씨는 ‘세보(世譜)’라는 명칭을 파평윤씨는 ‘동성보(同姓譜)’나 ‘성보(姓譜)’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1539년 기해 초간보부터 동성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파평윤씨가 당시에 윤씨성의 대종을 차지한다는 이유인 것 같다.
한편, 파평윤씨에서 분적해 나간 남원윤씨는 아래와 같이 초간보를 발행한다.
[표2] 남원윤씨문중의 족보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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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
명칭 |
연도 |
서발 |
판종 |
권책 |
소장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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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南原尹氏族譜 |
1706년 |
미상 |
미상 |
미상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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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南原尹氏姓譜 |
1805년 |
尹行恁 서(1794). |
목활자본 |
9책 (재간보) |
필자. 국립중앙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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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南原尹氏姓譜 |
1899년 |
尹秉綬 서, |
목활자본 |
15책 (삼간보) |
국립중앙도서관 |
2025년 8월 현재 필자가 확인한 이들 일부 문중의 초간보 편찬 사실은 아래와 같다. 필자가 아직 확인을 못하여 아래 명단에서 빠진 일부 문중은 추후에라도 확인할 수 있도록 협력하기를 바란다. 예로부터 족보는 한정부 출판이었기에 간행된 옛 족보 모두를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제라도 각 문중이 나서서 자(自) 문중의 옛 족보를 중요시하고 수집 보존하기를 바란다.
[표3] 해남윤씨문중의 족보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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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
명칭 |
연도 |
서발 |
판종 |
권책 |
소장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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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海南尹氏族譜 |
1702년 |
尹南美 편, |
목판본 |
4권3책 |
국립중앙도서관 |
[표4] 칠원윤씨문중의 족보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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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
명칭 |
연도 |
서발 |
판종 |
권책 |
소장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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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漆原尹氏姓譜 |
1741년 |
미상 |
미상 |
미상 |
미상 |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문중이 족보나 세보를 편찬할 때, 각 집안에 전해져 내려온 가승이나 세고(世考)를 취합한다. 그러므로 각 가정에 현전하는 계보 자료들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 중요성을 모르는 세대들에 의하여 여러 상황에서 버려졌다. 새마을운동으로 특히 많이 소멸하였고, 돌아가신 선대의 유품을 불에 태우며 소멸하기도 하였다. 지방을 다니는 골동품 수집상들에게 궤짝 채 팔아버리고, 그 궤짝은 도시로 들어와 아파트 거실에 소품으로 들어갔지만, 그 안에 든 문건은 찢겨져 목기 뒤에 발라지거나 세검정(?) 인근의 종이 재생 공장으로 팔려 들어갔다. 그러한 연유로 하여 많은 필사본 족보가 없어졌다.
그러나 필자는 필사본 족보의 복수(複數) 제작도 족보 간행이라는 관점에서 이를 유심히 보았고, 체계를 갖춘 필사본 옛 족보도 상당수 수집하였다. 수집한 필사본 옛 족보 중에는 초간보 이전의 초찬보도 상당수 있다. 지금도 시중 어딘가에는 필사 간행한 옛 족보가 있을 것이고, 출간된 옛 족보를 베낀 필사본 족보도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대를 이어서 족보를 발행하여 후대의 족보에 옛 족보의 내용이 다 들어가 있다고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옛 족보가 없으면, 지금 족보의 정확성이나 가치를 증명할 수 없다. 옛 족보를 중시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새로 족보를 편찬하면서 옛 족보의 생명이 끝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다.
필자 한 사람이 시중에 돌아다니는 족보 관련 자료를 모두 살펴보거나 수집하기란 시간과 경제력 여건상 불가능하다. 지난 50년간 그런 행동으로는 생계를 제대로 이어갈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런 활동으로 인생을 허비했고, 지금 파산에 직면해 있다. 힘과 의지가 있는 사람들, 특히 건전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함께 나서야 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각지의 고서점이나 고미술상에서 족보가 보이면 사진을 찍어 필자에게 메일로 보내 주기를 바란다.
주(註)
주1) 파평 용연(龍淵)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말 진성여왕 7년(893) 8월 15일 한가위에 이 용연 일대 하늘에 난데없이 구름이 뒤덮이고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게 끼더니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때 마침 ‘윤’씨 ‘할머니’가 문득 못 가운데를 보니 안개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주위를 뒤덮고 있었는데 별안간 못에서 빛이 솟으면서 금궤 하나가 물위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윤 노파는 기이하게 여기면서도 두려움과 호기심이 엇갈리는 가운데 마음을 다잡아먹고 그 상자를 건져 열어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너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상자를 열어본 윤 노파는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찬란한 금궤 속에는 오색의 아름다운 깃털에 싸인 옥동자가 들어있었다. 이 옥동자를 살펴보니 좌우 어깨 위에는 일월을 상징하는 붉은 점이 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비늘이 나 있었으며, 또한 발에는 북두칠성처럼 일곱 개의 흑점이 있어 황홀한 광채를 내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손바닥에는 윤(尹)자 무늬가 있었다고 한다. 윤씨 할머니는 이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 잘 거두어 길렀다. 이 아기는 잘생긴 얼굴에 자랄수록 영특하고 인물이 수려했다. 아이는 장성하여 큰 벼슬을 지냈는데 그가 바로 파평윤씨의 시조가 되었다. 파평윤씨대종회에서 펴낸 시조 윤신달의 현손인 [윤관 장군 일대기]에 의하면, 윤관이 함흥 선덕진광포에서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렀을 때 잉어 떼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했는데, 적병이 뒤쫓아 왔을 때는 잉어 떼가 이미 흩어져 버렸다는 고사가 있다. 윤씨들은 이 고사에 따라 ‘시조에 대한 활명지은(活命之恩)’이 있다고 하여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파평윤씨 시조인 윤신달이 용연에서 떠올랐을 때 겨드랑이에 잉어의 비늘이 있었기 때문에 잉어를 먹지 않는다는 속설 또한 이 파평의 용연 전설에 기인한 것이다.” (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파평용연) 이러한 문화 현상은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의 고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주2) 이러한 고려시대의 벌족 가문으로는 慶州金氏 定安任氏 慶源李氏 坡平尹氏 海州崔氏 鐵原崔氏 淸州李氏 黃驪(驪興)閔氏 孔巖(陽川)許氏 등이 있다.
주3) 그런데 족보와는 달리 [고려사], [윤언이 묘지명], [하원군 묘지명], [동인지문사륙]의 자료를 종합하면 윤관의 아들은 최소 9명으로 확인된다. 두 명은 불교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주4) [윤언이 묘지명(尹彦頤墓誌銘)], 1150년(의종4년), 김자의(金子儀) 찬, 해서(楷書), 세로 43cm, 가로 105cm, 글자크기 1.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주5) 윤언이는 윤관의 다섯 번째 아들로, 정당문학, 판상서형부사를 지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주6) 1634년 갑술보는 ‘적자-첩자-적녀-첩녀’순의 남성자손 우선의 기록방식이었으며, 1682년 임술보는 ‘적자녀-서자녀’의 순으로 이전에 비해 적서의 구별을 명확하게 한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