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황건 선생은 속에 바윗덩어리가 들었어요.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론도 정연합니다.”
28일 별세한 황건 전 사월혁명회 상임의장의 추도식에서 전덕용 전 사월혁명회 상임의장은 “황건 선생 말씀처럼 통일투쟁은 외세 양키와 맞닥뜨리는 판가리 싸움이다. 운동가로는 택도 없다”며 ‘투쟁가 황건’을 강조했다.
사월혁명회가 29일 오후 6시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주최한 ‘고(故) 황건 선생 사월혁명회장(葬)’은 사월혁명회 중심으로 조촐하게 진행됐다.
전덕용 전 상임의장은 “황건 선생은 사월 투사 중에서도 투쟁가였다. 투쟁가였다. 적극적이었다. 적극적이었다”고 강조하고 “우리는 이 정신을 받들어서 앞으로 미국 놈이 팔십 년 동안 지금 점령하고 있는데, 지금도 ‘평화 운동’ 아니고 이제 끝장 내야한다”고 ‘평화 운동’이 아닌 ‘통일 투쟁’에 방점을 찍었다.
박홍섭 사월혁명회 상임의장은 “사월혁명회의 황건 선생이야말로 정말 빼놓을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며 “가난과 고난을 정말로 밥 먹듯이 하면서도 세상에 올바른 길을 향해서 가려고 노력했던 그런 황건 선생의 뜻을 우리가 받들어서 지금도 더욱더 우리가 매진해야 되지 않느냐”고 기렸다.
사월혁명회의 전신인 사월혁명연구소의 하일민 전 소장은 “황건은 스물이 채 안 돼서 만나서 70년 가까이 그야말로 피를 나눈 형제, 12.3(계엄)으로 고난을 같이 해왔던 동지이자 친구”라며 4.19 이후 민족통일연맹을 결성해 북측 사로청(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을 상대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의 구호를 외치며 판문점으로 향하려고 했지만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로 무산된 경위 등을 회고했다.
하일민 소장은 “우리들 주변에서 무도한 독재 권력에 의해서 생목숨을 뺏긴 동지들이 50명에 가깝다”며 “사월혁명의 혁명 완수는 통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4.19 묘소에서 기념식을 하지 않는다. 사월동지들과 함께, 전사들과 함께 끝까지 우리가 원했던 통일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활동을 할 거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회를 맡은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은 “(고인의) 아들이 직접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전 의장에게 부고를 전했다”며 “그동안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을 못 맡은 데에 대한 그런 미안함, 사과 이런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말하고 “(고인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범민련 남측본부가 하는 반미 월례집회라든지 투쟁이라든지 여기에서 몸이 허락하는 대로 나왔다”고 전했다.
이규재 전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은 “황 선생한테 범민련 의장을 좀 맡아 주십사 하는 부탁도 간곡하게 해 봤고, 여의치 않았지만 같이 술도 가끔 마셨다”며 “올곧게 살려고 하는 그 황 선생의 의지나 그 폭넓은 그 포용력이나 이런 여러 가지에 비슷한 연배이면서도 자꾸 존경하고 하는 아주 그런 사이였다”고 회고하고 “참 마음 아프고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라고 추도했다.
고인의 큰아들 영진 씨는 부친이 “개인적인 삶은 유한하지만 사회적인 삶은 영원하다”는 말과 ‘인간 상호 간 사랑과 연대’, ‘사회적 악에 대한 분노’, ‘약자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강조했었다며 “개인적으로 아버지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으시고 주관이 확실하셨다”고 회고했다.
나아가 “커피, 차, 담배 혹은 기호 식품도 즐기셨는데 수개월 전 병세가 악화되어 거동을 못 하시게 되면서 입원한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호스피스 병원에 계실 때도 벨기에 출신 원장과 친구들과 다양한 토론을 즐기셨고 약 2주 전에 임종을 앞두시고 식사를 못 하시게 될 때까지 담배를 피는 끈기를 보여주셨다”며 “평소에 아버지께서 고집이 세시고 쓴소리를 잘 하셨기에 이로 인해 여기 계신 분 중에 혹시 마음에 상처를 입으신 분이 계시다면 아버지를 대신해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인사했다.
이정태 양심수후원회 부회장은 고인의 약력보고에서 “서울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는 법대 학생으로서 4.19 학생혁명을 주도하고 법민회, 사회법학회 활동을 했다”, “5.16 군사 쿠데타에 의해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사건과 이후 1964년 한일협정 반대의 배후, 소위 ‘1차 인민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됐다”고 밝혔다.
또한 “1988년부터는 4월 혁명 연구소를 창립하는 데 역할을 맡았고, 연구위원장을 맡았으며, 1994년부터 96년까지는 사월혁명연구소 4대 소장을 맡았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는 사월혁명회 8대, 9대 상임의장을 역임하고 2007년부터 2020년까지는 감사를 맡았다”고 주요 경력을 소개했다.
이날 추도식은 4월 혁명가 <4월에 바침> 합창으로 마무리됐으며, 노중선 전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 김영옥, 황금수, 오병철 등 원로, 노수희 전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 주재석 자주연합 상임대표, 김혜순 (사)양심수후원회 회장, 이계환 통일뉴스 대표 등이 참석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성모장례식장 13호실에 마련됐으며, 30일 오전 5시 발인해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희생자묘역에 안장된다. 유족으로는 아들 영진, 딸 영아, 선아, 정아 씨가 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