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21일간의 단식으로 하늘이 정한 목숨에 순응한 한 사람이 있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선 3.1만세운동이 벌어지기 3년 전 함경남도(당시) 원산에서 태어나 19살이 되던 1935년 빼앗긴 나라를 총으로 찾겠다는 결심으로 중국 상해로 건너가 반일 테러활동과 황포군관학교의 후신인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훈련하며 공산주의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공산당 가입 후 1941년 12월 12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분대 분대장으로 참전해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함께 한 태항산 기슭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 전투에서 총상을 당해 일본군의 포로가 된 후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 수감되어 3년 6개월만에 왼쪽 다리를 절단했다.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으로 자기 존재를 기록한 김학철이다.
"스무 살에 상해에서 반일 테러활동에 뛰어들어 맥아더사령부의 정치범 석방명령으로 일본 감옥에서 풀려나온 서른 살까지 나는 지겨운 줄도 모르고 또 한눈도 팔지 않고 오로지 한길을 걸어나왔다."
2001년 9월 25일 85살을 일기로 타계하기 7년전인 1994년에 그가 남긴 말이다.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중국 석가장 일본총영사관에서 3개월간 심문을 받다가 베이징에서 열차로 부산, 부산에서 배를 갈아타고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기간동안 전향서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상당한 다리를 치료받지 못하다가 3년 6개월만에 시시각각 생명을 좀먹어가는 다리를 절단하게 됐다.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 "사람의 정의는 인력거를 끄는 동물이 아니다. 다리 한 짝쯤 없어도 문제없다. 걱정마라!"라고 태연하게 위로한 사람이 김학철이다.
1945년 10월 출소 즉시 부산을 거쳐 서울로 올라와서는 총을 들 수 없는 손에 붓을 들고 창작활동을 하다 극심해진 좌익 탄압으로 월북해 [노동신문] 기자와 [인민군신문] 주필로 활동했다.
여차여차한 일로 1952년부터 연길에 정착했으나 41살이 되던 1957년 반동분자로 숙청되어 24년간 강제노동에 종사하는 기구한 인생의 행로에 접어들었고 문화대혁명기간인 1967년부터 1977년까지 10년은 감옥에 묶여 지냈다.
1980년 12월 복권되었으니 무려 24년만에 붓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으나 그의 나이 이미 65살이었다.
불굴의 투사인 그는 생전에 거주하던 연길시 아파트 1층 문에 '한가한 사람은 문을 두드리지 말라'(한인막고문, 閑人莫鼓門)는 팻말을 걸고 집필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렇게 세상의 서고에 조선의용대의 격정과 전우애를 그린 『항전별곡』, 『격정시대』가 나오게됐다.
김학철의 아들 김해양과 오랜 연구자인 김호웅 연변대 교수가 편저한 『김학철과 함께 격정의 시대로』는 『항전별곡』과 『격정시대』에 수놓아진 조선의용대의 역사적 현장, 김학철의 전우들에 대한 뒷 이야기들을 생생한 사진, 자료와 함께 묶어 낸 책이다.
특히 김학철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선의용대 창립사진위에 돋보기를 얹어 하나하나 살피며 122명의 대원들의 신상을 기록한 것이 인상적이다. 황포군관학교 13기(특별6반)의 조선인 학생명단도 꼼꼼히 기록했다.
본명과 훗날 지위, 서로의 인연 등을 세심하게 적어두어 연구자들에게도 참고가 될 듯 싶다. 두개의 명단에 모두 등장하는 황기봉과 최경수는 훗날 변절해 일제에 투항했다는 기록도 남겼다.
아들 김해양은 "진리와 자유를 위해서는 개인의 안위와 부모 형제마저 뒤로하고 나설 용기가 필요함을 아버지를 보며 깨닫곤 한다"고 했고, 추천사를 쓴 이종찬 광복회장은 '격정을 잃은 상태에서 살고 있는' 현실을 애통해 하며 김학철의 '격정'을 그리워했다.
마침 광복 80주년을 지나는 이 시대를 김학철의 '격정'은 어떻게 기록할까?
이재명 대통령의 '국익중심 실용외교' 노선은 이틀전에 이미 '흔들림없는 한일, 한미일 협력 추진' 약속으로 분명히 표현됐다. 26일 새벽이면 '한일관계 발전이 한미일 공조강화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합의한 한일정상회담에 만족한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 현대화'를 앞세워 국방비 증액, 주둔비 인상 등 약탈적인 청구서를 들이미는 모습을 보게 될 것 같다.
일본 총리와의 회담에서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여 한미일 공조를 바탕으로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가 충실히 이행되도록 국제사회와 협력을 지속'하겠다는 다짐과 '러북간 군사협력의 심화에 함께 대처'하겠다는 결의가 깃발처럼 나부꼈다. 또 일본의 사죄와 반성없는 과거사를 청산하고 역사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핵심적인 문제인식은 언급조차 없고, 양국간 '전략적 인식공유 강화'와 '미래산업 분야 협력 확대'를 우선시, 중시하는 기조만 펄럭였다.
역사정의에 기반한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의 평화, '힘에 의한 평화'가 아닌 '싸울 필요가 없는 평화상태'는 어디서 찾을 것이며, 이재명 대통령이 빛의광장에서 주권자 국민에게 입이 닳도록 말했던 '국민의 주권의지가 일상적으로 실현되는 정치'는 어디로 자취를 감췄나?
김학철 '격정'의 요체는 '부당한 개입에 맞서며 스스로 존엄을 지키려는 주체적 의지, 주권의지'라고 풀이해 보자. 약탈과 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상대에게 애원하면 굴복하는 의사로 받아들이고, 양보하면 욕망만 더 자극할 뿐이며, 설득하려는 시도는 공허하게 끝날 뿐이다.
무른 땅인줄 알고 막대기를 박아대지만 그 아래 넓고 단단한 너럭바위가 숨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게 해야 하지 않을까?
총을 들고 싸우고 붓으로 저항했던 김학철의 '격정'이 때로 그의 인생에 오욕을 남겼을지언정 여전히 귀감이 되는 것도 그래서 일 것이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