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희 /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2025년 8월 23일 도쿄 한일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양국 관계 정상화와 미래지향적 협력을 강조했다.

경제·산업 분야에서 수소·AI 등 미래산업 협력 확대, 저출산·고령화 대응, 농업·지방 소멸 문제와 같은 사회적 과제 해결을 위한 협의체 구상, 청년 교류 확대와 워킹홀리데이 제도 개선, 다양한 문화·인적 교류는 분명 양국의 상호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안보와 외교에서 한일정상회담은 커다란 덫에 걸렸다.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기 보다 군사적 대결 구도를 심화시키고, 한국을 미·일 중심의 전략 질서에 더욱 깊이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역사 정의를 망각한 한일정상회담

이번 회담에서 일본군 성노예, 징용·징병 강제 동원과 같은 과거사 현안, 그리고 후쿠시마 핵 오염수 문제는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일제 식민 지배가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한국의 이른바 ‘국민주권 정부’마저 자국 대법원의 판결마저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문제를 처리하고 있다.

특히 후쿠시마 핵 오염수 문제는 국민 안전과 직결된 사안임에도 철저히 외면됐다. 일본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형식적 평가를 빌미로 2023년부터 해양 방류를 시작했다. 2025년 현재까지 누적 방류량은 10만 톤을 넘어섰다. 삼중수소를 비롯한 방사성 물질이 장기간 해양 생태계와 인체 건강에 미칠 영향은 과학적으로도 불확실성이 크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이 문제를 전혀 의제로 삼지 않았다. 이는 국민의 안전과 생존권 문제를 정치적 거래 속에 내던진 것이다.

‘미래지향’이라는 말은 회담에서 반복되었지만, 과거사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죄와 책임 없는 미래지향은 공허하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 범죄 문제를 회피한 채 ‘협력’만을 내세우는 정상회담은 결국 역사 정의를 외면하고 군사·안보 동맹 강화에 치중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는 일본 극우 정치세력에게 ‘역사 문제는 이미 봉합됐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분열과 피해자들의 상처를 더욱 깊게 만든다.

대북 압박 접근, 한미일 협력의 군사동맹화

이번 공동발표문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및 항구적 평화 구축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재확인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대화와 신뢰 구축보다는 압박과 제재 강화에 방점이 찍혀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대응, 안보리 제재 이행 강화, 불법 사이버 활동 차단, 러북 군사협력 대응 등은 모두 봉쇄와 억지에 기초한 접근이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이러한 접근법은 실패했다는 것이 수치로 증명된다.

미국 중심의 유엔은 2006년 첫 북 핵실험 이후 20차례 이상의 대북 제재 결의를 채택했지만, 북한은 오히려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과 전술핵 다종화를 가속화했다. 2017년까지 6차례 핵실험을 통해 수소탄급 무기 개발에 성공했고, 2022년 이후에는 ‘화성-17형’, ‘화성-18형’과 같은 초대형 ICBM 발사를 이어갔다.

이처럼 제재와 고립은 북한의 핵 능력을 막지 못했으며, 오히려 ‘정면돌파’ 노선을 강화시키는 결과만 가져왔다. 발표문에 담긴 ‘평화적 해결’이라는 표현은 그저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 실제 정책은 대화를 닫고 군사적 대결을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공동발표문은 또한 한미일 공조 강화를 강조했다. 표면적으로는 대북 위협 대응을 명분으로 삼지만, 실질적으로는 동북아시아에서 삼각 군사동맹을 제도화하는 흐름이다. 북한은 이를 군사적 포위망으로 간주하며, 핵·미사일 능력을 더욱 고도화할 것이다. 실제로 2023~2024년 한미일 군사연습이 집중되던 시기에 북한은 단거리·중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를 30여 차례 진행했다.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 남북 간, 북미 간 신뢰 회복의 기회는 더욱 멀어진다.

대중국 견제 전선 편입의 위험

이번 합의문에는 중국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내 및 글로벌 협력 강화’,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미일 협력 추진’이라는 표현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곧 중국 견제를 뒷받침하는 수사다. 미국은 이미 반도체 공급망,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 대만 해협 긴장에서 한국과 일본을 핵심 파트너로 활용하고 있다.

한국이 이런 구도에 깊숙이 편입될 경우, 대중 관계 악화는 불가피하다. 2024년 기준, 한국의 대중국 수출은 전체 수출의 19.5%에 달한다. 특히 반도체 수출에서 중국 비중은 33.3%, 홍콩을 합치면 51.7%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배터리, 화학소재, 철강 등 한국의 주력 산업 역시 중국 시장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 따라서 중국 견제 전선에 한국이 서게 되면, 안보적 종속을 넘어 경제적 불안정성까지 자초하게 된다.

누구를 위한 한일 관계와 한미일 공조의 선순환?

한일관계 발전이 한미일 공조 강화로도 이어지는 선순환을 계속 만들어 나가자? 한일 협력 자체가 미·일 전략 틀 속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선순환’이라는 표현은 한국이 스스로 선택하고 얻는 이익이 아니라, 외세가 설정한 게임판에 끌려가는 구조적 종속을 미화하는 수사에 불과하다.

이 선순환 논리는 결국 한국을 대북 압박과 대중국 견제라는 미·일 전략 목표의 보조자로 고정시키는 정당화 장치이다. 현실에서 한일관계가 개선될수록, 한국은 미·일 군사·경제 블록에 더 깊게 편입되고, 독자적 외교 여지는 축소된다. 즉, 표면적 ‘협력’ 뒤에는 한반도 긴장 고착과 전략적 종속이 구조적으로 내장되어 있다.

다시 말해, ‘선순환’이라는 표현은 외교적 자기기만이자,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을 팔아넘기는 겉보기 좋은 포장지에 불과하다. 한일관계 발전을 미·일 공조 강화와 동일시하는 시각 자체가 이미 한국 외교를 종속적 시나리오 속으로 끌어들이는 위험한 논리다.

이재명 정부, 미·일의 요구를 추인하는 태도에서 벗어나라

한반도 평화와 민생경제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제재와 압박의 연장이 아니다. 신뢰 구축, 북미·남북 관계 복원, 다자적 평화 협상이야말로 현실적 선택이다. 북핵 문제 역시 완전한 ‘선 비핵화’ 요구가 아니라, 이미 보유한 핵을 인정한 상태에서 국제 핵군축 틀 속에서 단계적 감축을 모색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또한 미국의 대중국 견제에 무조건 가담하는 길이 아니라, 자주적이고 균형 있는 외교로 노선을 전환해야 한다. 한국이 한미일 군사 공조에 매몰될수록 자율적 외교 공간은 줄어들고, 한반도는 장기적 긴장 관리 속에 군사적 충돌 위험에 더욱 노출된다.

무엇보다 이재명 정부는 과거사 문제를 회피한 채 미·일의 요구를 추인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본의 역사적 책임을 직시하고, 위안부·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외교 현장에서 당당히 반영해야 한다. 후쿠시마 오염수와 같은 국민 안전 현안도 국제 무대에서 분명하게 문제 제기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따르는 외교’가 아니라 ‘주도하는 외교’다. 한국이 미중 경쟁 구도에서 일방적으로 편향되지 않고, 한중일·러시아를 포괄하는 다자적 안보·경제 협력 틀을 모색할 때, 비로소 한반도 평화와 민생을 동시에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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