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명이다. 씨름을 금지하고 어기는 자는 장 100대를 쳐라.”
단원(檀園) 김홍도의 [씨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보물 제527호로 지정된 [단원풍속도첩] 속 그림이다.
큰 장터에서 씨름판이 열렸다.
힘껏 들어 넘어뜨리려는 사람과, 버티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 생생하다.
구경꾼들의 표정은 다양하고 재미있다.
놀라고, 진지하고 웃으면서 씨름에 몰입하고 있다.
곧 승부가 결정날 것 같은 순간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사에 열중하는 엿판 총각의 모습도 흥미롭다.
씨름이라는 단어는 ‘씨루다’라는 동사에서 왔으며 두 사람이 힘을 겨루는 것을 뜻하는 단어다.
팔씨름, 입씨름 등의 단어에도 쓰였다.
“씨름은 남성의 힘과 기술을 드러내어 경쟁하는 놀이였네. 힘 좀 쓰는 남자라면 모두가 씨름을 즐겼네. 매년 단오 때 씨름 놀이에 수천 명의 구경꾼이 몰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지.”
“허리에 매는 샅바가 보이질 않네. 옛날 씨름과 요즘 씨름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가장 큰 차이는 옷을 입었는가 벗었는가이지. 하지만 탈의 문제는 눈요기 오락용일 뿐 씨름 형식과는 관련이 없지.
그림 속 씨름은 옛 한양이나 경기도 일원에서 유행했던 ‘바씨름’이라고 하네. 현재는 전승되지 않고 사라졌네.
바씨름은 샅바를 상대방 왼쪽 허벅지에 매고 오른손으로 감아 당겨 잡는 방법으로 허리샅바는 없다네.
이런 씨름방식이 기술에 유리한지 힘쓰는 데 유리한지는 알지 못하네.
다만, 씨름판과 씨름은 정말 간편한 경기인 것은 확실하네.
사람이 넘어져 다치지 않은 정도의 모래를 깔면 씨름판이 뚝딱 생겨나지.
경기 규칙도 단순하네. 복잡한 점수제가 아니라 상대를 먼저 바닥에 눕히면 승부가 나지.
그림을 보면, 신발은 벗어놓고 겉옷만 벗은 일상복차림일세.
버선은 신은 채 씨름하고 있네. 샅바는 그냥 튼튼한 면천이 전부일세.
경기용 의상이나 특별한 장비가 없다는 말이지.
누구나 씨름판에 참가할 수 있다는 말이지. 어린이, 청년, 장년 정도의 체급 구분은 있었다고 하네.
신분에 따른 차이도 없었지.
씨름꾼이 벗어놓은 신발로 신분을 규정하여 양반과 노비의 대립으로 몰려는 사람도 있네.
하지만 그림 속의 신발은 가죽신과 미투리일세.(*) 모두 고급 신이지. 심지어는 자세히 그리지도 않았네. 신분 차이나 대립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네.”
“씨름판이 열린 장소는 어디인가?”
“가판을 든 엿장수가 있기에 장터라고 해석하네. 하지만 그것만으로 장소를 확인할 수 없네.
씨름판에 열리는 곳마다 장사꾼이 몰려들었으니깐.
씨름 경기의 특성상,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실외의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관청이나 유명 건물 마당, 큰 장터 마당이나 하객을 모아놓고 결혼식을 할 수 있는 정도의 마을 공유공간 중 한 곳일 것이네.”
“부채를 가진 사람이 4명이나 보이는데, 부채를 쓸 정도의 날씨라 단오로 보는 사람도 있던데?”
“당시 접부채는 점잖은 사람의 외출용 장신구일세. 부채로 특정 계절을 규정하긴 어렵다는 말이지.
야외에서 열리는 씨름판의 특성상 한겨울, 장마철을 제외한 따뜻한 계절에 열렸을 것이네.
생업에 바쁜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모으기는 어렵지.
단오, 추석 같은 명절이나 큰 장날이 제격이지.
아무래도 단오 씨름판이 유명했고 볼만했지.”
“씨름과 택견 모습이 그려져 있는 [대쾌도]가 있네. 백성들이 크게 즐거워하는 모습이라고 해석하지. 김홍도 풍속화 속 사람들의 표정도 밝고 행복해 보이네.”
“과연 그럴까?
씨름판 주변에는 많은 구경꾼이 몰려들었고 즉석 노점이 생겨났지. 노름이나 사행성 놀이도 성행했네.
씨름판이 커지면서 판돈이 걸리는 도박성 흐름도 나타났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승패 판정에 불만을 품고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허다했다네.
씨름판이 종종 싸움판으로 바뀌고 때로는 사람이 죽기까지 했으므로 조정에서는 자주 씨름을 금했네.”
‘형조에게 아뢰기를 중상총(重尙聰)이 양복산(梁卜山)과 씨름을 하다가 양복산이 죽었으니, 법에 따라 마땅히 교수형에 처하여야 하겠지만 형을 한 등급(等級) 감하고 장례비를 감당하게 명하였다.’(세종실록)
‘유생들을 욕하고 때리고 나서 거짓말로 호소하였다. 이에 왕은 이것이 무슨 풍속이란 말이냐며 개탄했다. 그 뒤 사헌부에서 명을 내려 씨름을 금하기까지 하였다.’(세종실록)
‘어느 집 종이 같은 동네에 사는 세현이라는 자와 씨름을 했는데, 패배를 분하게 여겨 그를 찔러 죽였다.’(현종실록)
‘이후로 시장에서 씨름하거나 아니면 싸움을 하는 것은, 살인 여부와 관계없이 해당 관청에서 장 100대를 엄하게 치도록 하라. 포도청은 서울에서 단오에 벌이는 씨름을 금지 시키고, 만약 하는 자가 있으면 엄중히 장을 치도록 하라.’(영조실록)
“충격적인 기록이군. 씨름은 살인과 폭력, 도박,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막장의 세계였단 말인가? 풍속화는 백성의 진솔하고 이상적인 삶을 그리는 국책사업인데, 어명으로 금지까지 한 씨름을 그린 이유가 궁금하네.”
[참고]
1) 미투리
삼, 비단, 면, 종이, 왕골 따위를 꼬아서 만든 6~8개 날줄에 50∼60개의 씨줄로 엮어 만든 정교하고 날씬한 신발이다.
미투리는 선비들이 맑은 날 나들이에 신었으며, 조선 말기에는 종이 미투리와 미혼남녀의 장식 신인 꽃미투리도 있었다. 미투리는 조선시대 상류층에서 많이 신었던 가죽신에 버금가는 신발이었다.
2) 평양 상원일의 석전을 엄히 다스릴 것 등을 하교하다.
임금이 기백(畿伯)이 아뢴 살옥(殺獄)에 대한 일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이후 저자거리에서 씨름하며 치고 때리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살인(殺人)의 여부를 논할 것 없이 그 관사(官司)에서 엄중히 장(杖) 1백 대를 때리도록 하라. 일찍이 듣건대 평양(平壤)에서는 상원일(上元日)에 석전(石戰)을 벌인다고 하니, 장(杖)으로 치는 것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더욱이 돌멩이겠는가? 관서에 분부해서 일체 엄중히 금지하게 하고, 경중(京中)에서 단오에 벌이는 씨름과 원일에 벌이는 석전을 포청에 분부해서 이를 범하는 자는 종중결곤(從重決棍)하게 하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영조실록 117권, 영조 47년 11월 18일 갑인 3번째 기사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