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금니화 화가로 유명한 인민예술가인 황병호씨를 재일 [조선신보]가 19일 다음과 같이 자세히 소개했다.
신문에 따르면, 금니화(金泥畫)란 순금박막(금 100%)을 화면 전반에 붙이고 황금색을 살리면서 카드미움 접착안료로 다양하게 형상하는 새롭고 독특한 회화형식.
광선에 따라 특이한 화면효과를 나타내며 종이, 천, 금속, 콘크리트 벽체에 이르기까지 영구보존할 수 있는 재질에 마음대로 창작할 수 있는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금니화가 일제의 식민지통치시기 민족문화말살책동으로 하여 사라져버렸다는 것.
황병호씨는 처음부터 금니화 화가가 된 것은 아니지만, 1968년 평양미술대학을 졸업하면서 조선화 ‘기통수’를 창작하여 내놓았다.
이에 신문은 “조국해방전쟁(6.25한국전쟁) 시기 최고사령부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하여 끊어진 다리 위로 말을 타고 용감무쌍하게 내달리는 인민군 기통수를 생동하게 형상한 작품은 조선화의 기본인 몰골법과 선묘법, 우림법을 잘 배합한 것으로 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 후 제11차 국가미술전람회에서 상을 받고 국가소장품으로 등록되었다”고 소개했다.
그때부터 조선화 화가로서의 황병호씨의 생이 시작된 것.
황병호씨는 미술창작기지인 만수대창작사에서 창작가로 활동하면서 ‘백두산의 아침’, ‘박연폭포’, ‘구름우의 금강산’ 등 국보적 가치가 있는 조선화 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였으며, 그 과정에 그는 개성이 뚜렷하고 독특하면서도 생동하고 진실한 묘사력을 소유한 화가로 이름 날리게 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 중엽 어느 날 조선미술박물관을 참관할 때 조선시대(1392년-1910년)의 화가 이징이 그린 금니화 ‘공작’이 그의 눈길을 끌었고, 크지 않은 자그마한 그림이 5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퇴색되지 않고 은근한 빛을 발산하며 내뿜는 모습은 그로 하여금 금니화의 세계에 빠져들게 하였다고 한다.
박물관 강사는 “박물관을 참관하는 사람들이 꼭 한참이나 지켜 서서 보고 가는 그림인데 현재까지 조선(북한)에서 이런 회화형식이 출현하지 않고 있다”는 알렸다.
황병호는 일제의 식민지통치시기 민족문화말살책동으로 하여 사라져버렸던 금니화를 자기가 꼭 개척하리라 마음먹고 재료연구와 학술연구에 달라붙었고, 10여년 간의 고심어린 탐구 끝에 자취를 감추었던 금니화를 발굴하였으며 그 전통적 기법들을 시대적 미감에 맞게 발전 완성시켜 세상에 내놓았다고 한다.
그 첫 작품은 금니화 ‘백두산의 학’(1998년 창작, 2,500×1,000㎜).
그의 금니화 작품들은 국가적인 미술전람회는 물론 일본, 중국, 독일,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서 진행된 미술전람회들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세계미술계에서는 금니화가 오직 북한에만 있는 작품, 독특하고 새로운 회화형식, 영원히 변치 않는 그림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학계에서는 금니화 형상이론을 내놓은 황병호씨에게 예술학박사 칭호를 수여하였다.
2014년에 황병호, 원영선 2인 미술전람회가 진행되었는데 그때 황병호씨가 출품한 ‘소백수의 아침’, ‘달밤의 기러기’, ‘밀림의 호랑이’, ‘룡과 선녀’, ‘현무’ 등 60점의 금니화가 참관자들의 깊은 감동을 자아냈다고 한다.
올해 4월에 진행된 김일성 주석 탄생 113돌 경축 노화가들의 미술전람회에도 그는 금니화 ‘만경봉의 소나무와 학’과 ‘2월의 소백수’를 출품하였다.
신문은 “그가 지금까지 창작한 조선화와 금니화 작품은 모두 1,000여건에 달한다”면서 “그중 수십 점이 국보작품으로 등록되었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