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 (식민역사문화청산회의 공동대표)

 

조선의 유민, 그리고 정씨문중의 족보영일정씨 [대종보(大宗譜)]를 중심으로

1. 옛 조선(단군조선)의 유민이 신라를 개국하고 성씨를 갖다

우리나라 정씨(鄭氏)의 기원은 고조선 유민이 남하하여 세운 부족국가 사로(斯盧) 육촌(六村)의 하나인 취산(嘴山) 진지촌(珍支村)의 촌장 지백호(智伯虎, B.C.128~B.C.50)1)로부터 시작한다. BC 69년 3월 1일(음), ①지백호는 ②알평 ③소벌도리 ④구례마 ⑤지타 ⑥호진 등 육촌장(六村長)과 함께 각각의 자제들을 이끌고 알천(閼川) 기슭에 모여 덕이 있는 사람을 군왕으로 삼아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할 것을 의논한다.

이때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 현재의 경주시 탑동 기슭에 있는 우물) 곁에서 나는 말 울음소리를 듣고 가니 표주박 같은 알이 있어 깨트려 한 아이를 얻었고, 그 아이가 장성하여 혁거세(赫居世, 재위 BC.57~AD.4)가 되었으며, BC.57년에 혁거세를 거서간으로 추대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는 것이다.2) 즉 혁거세는 옛 조선의 유민이 주축이 되어 이룩한 여섯 부족 연맹체에 들어간 신흥 세력으로 서라벌을 건국한 것이다.

신라 제3대 유리왕(儒理尼師今, 재위 AD.24~AD.57)은 서기 32년(유리왕9)에 사로 육촌을 육부(六部)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진지부(珍支部)를 본피부(本彼部)로 승격(昇格) 개칭(改稱)하고, 촌장이 낙랑후(樂浪侯)에 봉(封)해지면서 정씨(鄭氏)라는 성(姓)을 하사(下賜) 받았다”라는 것인데, “진지부를 본피부로 승격 개칭하고, 낙랑후에 봉해”졌다는 것과 “정씨라는 성을 하사 받았다”라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진 일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지백호에 관한 설화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여러 시대에 걸쳐 발전 각색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문중보학에서는 한 시기로 뭉뚱그려 이해하고 있고, 식민사학에서는 전설적인 신화(神話)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인류학의 입장에서는, “신라의 금석문에 보이는 처음으로 성을 쓴 사람은 신라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이므로, 사로 육촌의 부족이 성(姓)을 갖게 된 것은, 신라초가 아니라 훨씬 후로 보아야 하며, 신라초기에 사로 육촌에 성을 하사하였다는 것은 성(姓)이라기 보다는, 부족명(部族名)을 하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부족명이 후일 성으로 고착된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여기 육촌의 부족은 고조선의 유민이며 이 여섯 성은 우리나라 전래의 토착성씨로 발전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여섯 부족의 영역이 경주(慶州) 한 곳이 아니라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에 퍼져 있었다’라는 점이고, 이 ‘여섯 성을 비롯한 신라의 국성 ‘김(金)’이 모두 경주(慶州)를 본관으로 정하고 있다’라는 점이다.

[삼국사기] 권제1, 신라본기 제1, 육촌 부분, 1512년 정덕본, 목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삼국사기] 권제1, 신라본기 제1, 육촌 부분, 1512년 정덕본, 목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신라의 왕성(王姓) ‘김(金) 박(朴) 석(昔)’과 육촌의 ‘이(李) 최(崔) 정(鄭) 손(孫) 배(裵) 설(薛)’씨 등을 모두 -누구를 시조로 삼고 있든지 간에- 북방에서 옛 조선이 망하자, 남방으로 내려온 조선의 유민으로 적고 있다. 이것은 삼한(三韓)의 백성이 고조선의 유민임을 분명히 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역사관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역사관이 민족사관의 발아점(發芽点)이다.

[표1] 사로 육촌과 촌성(村姓)

사로 6

閼川 楊山村

突山 高墟村

嘴山 珍支村

茂山 大樹村

金山 加利村

明活山 高耶村

촌장

알평 謁平

소벌도리 蘇伐都利

지백호 智伯虎

구례마 俱禮馬

지타 祗沱

호진 虎珍

삼국사기

삼국유사

 


2. 취산 진지촌은 어디인가?

영일현은 지금의 포항 지역을 고려 건국 직후인 940년에 명명한 지명이다. 위에서 언급한 사로 육촌이 실재하였던 지역은 [표2]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학자마다 제각각 다르다. 거의 모두 현재의 경주 일대로 잡고 있으나, 김철준(金哲埈, 1923~1989)과 천관우(千寬宇, 1925~1991)는 지금의 경상북도 일대로 폭 넓게 잡고 있다. 이 가운데 천관우는 취산 진지촌을 경북 포항과 울진 지역으로 잡았는데, 연일은 현재의 포항시에 속하고 있다.

[표2] 사로 육촌의 위치에 관한 여러 학자의 관점

학자/학설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취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

김철준 (1975)

경주 하동군 북촌

충북 옥천
경북 상주

경북 성주

충북 제천
경북 예천

경북 김천
경북 고령

경주
경북 영천

이병도 (1976)

남천 남

남천 북
북촌 남

효현동

인왕동
(황룡사 남)

소금강산
(백률사)

보문동

김정배 (1986)

남천 남

효 현리
창림사지

낭산

모량리

소금강산

보문동

김원룡 (1987)

남산 서북
월성

서악동

낭산

모량리
금척리

소금강산

보문동

천관우 (1989)

경주

옥천
상주

경북 포항
경북 울진

경북 의성
경북 예천

개령-성주

경북 경산
경북 영천

다수 학설

남산 서북-남천-황남동 일대

남산 서북-서악동 또는 오릉 일대

인왕동-낭산-조양동 일대

건천읍-모량리-서면 일대

황성동-소금강산 일대

보문동-명활산 또는 천북면 일대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정씨는 육촌의 취산 진지촌의 지백호에 연원을 둔다. 경주정씨는 제일 먼저 경주정씨가 성을 가지면서 지백호를 도시조로 옹립했고, 그 뒤에 영일, 동래, 온양 등의 본관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즉 처음에는 모두 취산 진지촌과 그 인근에 살면서 그 지역 촌장인 지백호를 시조로 삼으며 살다가, 시간이 흐르며 지역을 옮겨 다른 곳에 살게 되면서 각자 자기 지역을 본관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즉 다른 정씨들은 모두 경주정씨에서 분파되었다고 주장한다.

3. 여러 정씨의 초간보에 관하여

그런데 문제는 표3에서 보듯이 경주정씨는 다른 몇 정씨에 비하여 족보 편찬이 상대적으로 늦다는 점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1598년에서 140년이 지난 1738년에야 초간 무오보를 내었다.

[표3] 각 정씨의 초찬-초간보 편찬 통계 (연대순-문중별)

족보 명칭

년도

편찬자

권책

판종

소장처

1

大宗譜, 迎日鄭氏 감무공파

1540~1544

 

1

초고본

개인

2

迎日鄭氏世譜 1, 지주사공파

1553, 계축보

鄭世弼

2

 

실전

迎日鄭氏世譜 2, 지주사공파

1575, 을해보

 

1

 

실전

烏川鄭氏世系 3, 지주사공파

1649, 기축보

鄭好仁

21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

3

東萊鄭氏族譜 1

1585

鄭惟吉

1(?)

 

실전

東萊鄭氏族譜 2

1655, 을미보

李敏求 , 鄭良弼

22

재찬 초고

개인

4

淸州鄭氏家乘

1595, 을미보

 

1(?)

抄譜

실전

5

海州鄭氏族譜

1694, 갑술보

 

42

목판본

개인

6

草溪鄭氏族譜

1703

 

44

목판본

개인, 계명대 동산도서관

7

麟山鄭氏世譜

1733

 

1

목판본

개인(1 영본)

8

光州鄭氏世譜

1736

 

2

필사본

개인

9

慶州鄭氏族譜

1738, 무오보

鄭斗一 (1732),
鄭泰龜 (1723)

33

松沙活字
목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
계명대 동산도서관

10

晉州鄭氏族譜

1767, 정해보

宋明欽 , 趙台祥

103

목활자본

정헌식, 국립중앙도서관,
계명대 동산도서관

11

箕城鄭氏譜牒

1780

丁德輖

1

원고본

개인

12

河東鄭氏族譜

1803, 계해보

鄭錫煥

22

목활자본

개인

13

溫陽鄭氏族譜

1858, 무오보

鄭性秀 鄭晩敎 鄭獻敎 , 鄭慕敎

55

정리자체철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

 

경주정씨의 초간보 무오보에는 1718년 정지화(鄭之華)의 서문과 1727년 정유수(鄭惟壽)의 서문, 1732년 정두일(鄭斗一)의 서문이 들어있고, 1723년 정태구(鄭泰龜)의 발문이 들어가 있으나, 무오(1738년) 5월에 ‘송사활자인출(松沙活字印出)’하였다는 목활자본 간기가 있다. 즉 첫 서문을 쓰고 편성을 시작하여 20년 후인 1738년에 간행하였다는 의미이다.

[표4]에서 보듯이 모든 정씨족보 가운데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①1540년부터 1544년 사이에 편찬된 영일정씨 감무공파의 [대종보] 초찬 원고본이다. 그 다음이 ②1649년에 정호인이 서문을 쓴 [烏川鄭氏世譜] 기축보 2권1책 목판본이며, 세 번째로 오래된 정씨족보는 ③1655년 이민구(李敏求)의 서문과 정양필(鄭良弼)의 발문이 있는 [동래정씨족보] 을미보 2권2책본이다. 그리고 ④1694년 [해주정씨족보] 갑술보 4권2책 목판본 등이 있다.

이 네 종의 옛 족보는 16~17세기에 편찬된 족보이다. 즉, 경주정씨가 1738년에 초간보를 내기 이전에 이미 ‘영일정씨의 두 개 파와 동래정씨, 청주정씨’ 등 4개 정씨가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에 초간보 및 초찬보, 재간보를 내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도 해주정씨가, 18세기 초에는 ‘초계정씨 인산정씨 광주정씨’가 초간보를 내었다. 경주정씨 이전에 이미 8개 이상의 정씨가 초간보 및 재간 보, 또는 삼간보를 내었으며, 경주정씨보다 초간보를 늦게 간행한 문중은 ‘진주정씨 기성정씨 하동정씨 온양정씨’ 등이 확인된다.

이러한 면을 보면 문중의 형성과 족보의 편성이 늦은 경주정씨가 우리나라 모든 정씨의 도시조 지백호를 계승한 종주가(宗主家)라는 주장은 쉽게 인정하기가 어려운 무리한 주장이다. 오히려 영일정씨나 동래정씨가 정씨의 종주가라는 주장을 한다면 경주정씨와는 다른 문제이다. 육촌의 취산 진지촌을 경주로 단정하고, 관향을 경주로 쓴다는 단순한 이유로, 물론 1738년 경주정씨 초간 무오보에서 지백호의 원손(遠孫)임을 적시하고는 있지만,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으로 정씨의 종주가임을 주장하는 것은, 민족사학과 대치되는 문중보학의 공허한 난센스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본관은 성씨와 함께 생겨난 것이 아니다. 특히 토성(土姓)인 경우에는 성씨가 생기고 난 한참 후에 본관이 생겼다. 경주정씨가 경주라는 본관을 쓰기 시작한 연대는 중시조 정진후(鄭珍厚)가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진 훨씬 후이다. 그러므로 경주정씨가 여러 정씨가의 종주가는 분명히 아니다.

‘사로 육촌이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라고 보는 것은 우리 민족사학의 관점이다. 천관우의 ‘취산 진지촌이 포항과 울진지역에 있었다’라는 주장은 영일정씨의 세 개파와 연이어 생각해 보면 새로운 가설을 성립하게 한다. “촌수를 계대하기 어려운 동성동본은 사실상으로는 이족이라 말할 수 있다. 세 개파가 연일이란 한 지역에서 세거하였다는 것은, 경주가 아니라 연일 지역에 여러 정씨의 종주가가 있었을 수도 있다”라는 가설을 성립하게 한다.

4. 영일정씨의 세파(三派)

영일정씨(迎日鄭氏)는 연일현을 본향으로하는 토착씨족이다. 영일정씨는 연일정씨(延日鄭氏), 또는 오천정씨(烏川鄭氏)라고도 한다. 연일-영일-오천은 모두 같은 지역을 말한다. 영일정씨에는 동성동본동족으로 보이면서도 시조를 달리하는 세 문중의 영일정씨가 있는데, 이들 문중의 시조가 각기의 사유로 인하여 영일현에 들어 온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처음부터 영일현에 세거했던 성씨로 볼 수 없게 하는 대목이다. 이들 세 문중은 각 시조간의 소목(昭穆)을 맞출 수가 없어 각기 초간보를 내었다.

하나는 ①고려 의종 때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정습명(鄭襲明, ?~1151)을 1세 조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이고, - 정몽주(鄭夢周) 정문예(鄭文裔) 계가 여기에 속한다. 이 지주사공파는 1553년에 계축보를, 1575년에는 을해보를 편찬하였고, 1553년 계축보는 정세필(鄭世弼)이 편찬한 것으로 주장하지만 현전하지 않는다. 1649년에 정호인(鄭好仁, 1597~?)이 서문을 쓴 [오천정씨세보(烏川鄭氏世譜)] 기축보 목판본 2권1책이 국립중앙도서관에 현전하는데, 이 기축보는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의 소장인이 들어가 있다.

[표4] 영일정씨 세 파의 초찬-초간보 편찬 통계

族譜 名稱 -

初纂 初刊 年度

編纂者

卷冊

版種

所藏處

大宗譜 -
監務公派

1540~1544, 초찬

미상

1(36)

초찬 원고본

개인 소장

迎日鄭氏世譜 -
監務公派

1759, 기묘 초간보

鄭益河 (1752, 임신)
鄭壽延 (1759, 기묘)

55

목활자본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迎日鄭氏世譜 -
知奏事公派

1553, 계축보

鄭世弼

미상

목판본(?)

실전

1575, 을해보

鄭世弼, 鄭膺善

미상

목판본(?)

실전

烏川源派錄 -
知奏事公派

迎日鄭氏世譜 -
知奏事公派

1649, 기축보

鄭好仁 (1649)

21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 (정제두 구장본)

미상

미상

미상

미상

미상

 

다른 하나는 ②고려 때 감무(監務)를 지낸 정극유(鄭克儒)를 1세 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이며, - 정사도(鄭思道) 정철(鄭澈) 계가 여기에 속한다. 감무공파는 1759년에 [영일정씨세보(迎日鄭氏世譜)] 기묘보 목활자본 5권5책을 간행한 바 있다. 정익하(鄭益河, 1688~?)가 1752년에 쓴 서문과 정수연(鄭壽延)이 1759년에 쓴 발문이 들어가 있는 초판본이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감무공파는 1540년부터 1544년 사이에 편찬한 초찬 원고본이 현전한다.

또한 ③고려 때 정자피(鄭子皮)를 1세 조로 하는 양숙공파(良肅公派)도 있다. 양숙공파의 족보 간행 사실은 자료가 부족하여, 이번 탐색에서 확인하지 못하였다. 영일정씨 문중의 옛 족보는 그 전래본이 매우 희소하다. 조선시대 말에 작성된 파보를 제외하고 [표4]와 [표6]의 족보 이외로는 더 탐색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 추가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5. 영일정씨 지주사공파의 족보 편찬에 관하여

위에서 ‘영일정씨의 세파(三派)’를 탐색하면서 언급하였듯이, 영일정씨에는 동성동본동족으로 보이면서도 시조를 달리하는 세 문중의 영일정씨가 있는데, 이들 세 문중은 각 시조간의 소목(昭穆)을 맞출 수가 없어 각기 초간보를 내었다. 동성동본이지만 어쩌면 사실적으로는 이족(異族)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한 문중에서 족보를 편찬하기 위해서는 혈족 의식이 있어야 하고, 문벌(門閥)이 형성되어 있어야 하며, 현달한 외예(外裔, 외손 후예)가 있어야 한다. [표3]은 여러 정씨문중 가운데 열 세 문중을 임의로 골라 통계를 낸 것이다. 정씨문중 가운데서 가장 많은 문과급제자를 배출한 문중은 동래정씨문중으로 199장의 문과급제자를 내었다. 그 다음이 영일정씨 지주사공파 문중인데 조선시대에 112장의 문과급제자를 내었다. 반면에 영일정씨 감무공파에서는 조선시대에 9장의 문과급제자를 내었는데, 그 수는 적어도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과 같은 명인이 나왔고, 현달한 외예가 많다. 영일정씨는 지주사공파이든 감무공파이든 임진왜란 이전에 족보를 편찬할 수 있는 충분한 사회적 기반(인프라)과 인적요소가 있었다.3)4)

[표5] 정씨에서 조선조 과거급제자 통계 (문과급제자 다수순)

본 관

문 과

진 사

생 원

++

무 과

역 과

의 과

음양과

율과

통계

東萊鄭氏

199

276

251

726

108

11

5

5

6

861

迎日鄭氏 (지주)

112

204

201

517

176

0

1

2

1

697

河東鄭氏

65

84

64

213

113

44

21

8

9

408

海州鄭氏

62

87

84

233

73

1

0

0

0

287

晉陽鄭氏

62

81

77

220

57

0

0

1

0

278

草溪鄭氏

60

115

104

279

59

0

0

1

0

339

溫陽鄭氏

44

65

44

153

57

31

39

3

13

296

光州鄭氏

34

42

36

112

13

0

1

0

0

126

慶州鄭氏

26

30

29

85

109

19

42

2

1

258

淸州鄭氏

20

13

36

69

6

0

1

0

0

76

迎日鄭氏 (감무)

9

6

2

17

0

0

0

0

0

17

 

연일정씨 지주사공파는 고려 인종(仁宗, 재위 1123~1146) 때에 지주사(知奏事) 직을 지낸 정습명(鄭襲明, 1094-1150)을 중시조로 하며, 현조는 포은 정몽주와 그 손자 세종 대의 설곡 정보(鄭保)이다. 오천정씨를 쓰는 분들도 대체로 지주사공파 후손들이다. 지주사공파는 1894년 이전에 6차에 걸쳐 족보를 편찬하였다.

[표6] 영일정씨 지주사공파에서 조선조에 편찬한 중요 족보 (연도순)

보명

간행 년도

편찬자

권책수

판종

소장처

1

迎日鄭氏世譜

1553, 계축보

鄭世弼

2

초고본(?)

실전, 서문 있음

2

迎日鄭氏世譜

1575, 을해보

鄭世弼, 鄭膺善

1

목판본(?)

실전

3

烏川源派錄

1649, 기축보

鄭克後, 鄭好仁 (1649), 鄭木益.

2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 (정제두 구장본)

 

迎日鄭氏世譜

1720, 경자보

鄭齊斗, 鄭纘輝

95

미간행

 

4

迎日鄭氏世譜

1774, 갑오보

鄭順濟, 鄭志翼

237

 

 

 

迎日鄭氏續譜

1848, 무신보

鄭文升, 鄭龜休

 

미배포

 

5

迎日鄭氏世譜

1865, 을축보

鄭文升, 鄭信在,
鄭元弼

14

 

 

6

迎日鄭氏 -圃隱公派譜

1880, 五修譜

鄭煥翼 , 鄭箕錫

25

목판본

 

 

- ①1553년 계축보 ; 영일정씨 지주사공파에서 편찬한 1553년 [영일정씨세보] 계축보 2책은 포은 정몽주의 5대손인 임헌(林軒) 정세필(鄭世弼)이 경상좌병영(慶尙左兵營)에서 자비를 들여 편성한 지주사공파의 초찬보이다. 이 계축보는 서문만이 전하고 있으므로, 실제로는 출간하지는 않은 초찬보(初纂譜)로 여겨진다. 이 계축보가 출간되지 않은 것은 1880년 『영일정씨세보(迎日鄭氏世譜, 淸洞譜)』를 오수보(五修譜)라고 칭하는 데서도 잘 알 수가 있다.

- ②1575년 을해보 ; 지주사공파의 1575년 [영일정씨세보] 을해보는 정세필과 정응선(鄭膺善)이 편찬된 지주사공파의 재찬보이다. 문중에서는 1575년 을해보를 재간보라고 하지만, 이후에 간행된 지주사공파 족보의 표준이 된다. 그러나 을해보 역시 현전하지 않는다. 또한, 문중에서는 을해보는 경상좌병사 정세필과 정응선(鄭膺善)이 1575년(을해)에 경상도 좌병영(울산)에서 간행하였다고 하지만, 을해보가 출간된 1575년은 정세필이 사망한 1566년 11월 24일로부터 9년 후이다. 미완의 계축보를 수정하여 1575년에 을해보를 편찬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하나를 각기 출간한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 ③1649년 『오천정씨족보(烏川鄭氏族譜)』 기축보 ; 영일정씨 지주사공파의 삼간보는 1649년 [오천원파록(烏川源派錄)](기축보)이다. 이 족보는 쌍봉(雙峰) 정극후와 양계(暘溪) 정호인(鄭好仁)에 의해서 진주에서 편찬되었으며, 정극후가 서문을 짓고, 진주목사 정호인이 발문을 썼다. [오천원파록]은 [오천세보(烏川世譜)]라고도 불리는데 처음으로 영일정씨를 여덟 파로 나누고 있어 원파록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장차를 천자문 순으로 표시하고, 판심은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에 『오천정씨원파록(烏川鄭氏源派錄)』과 『오천정씨족보(烏川鄭氏族譜)』, 장차(張次)가 있다. 책의 크기는 25.5㎝×36㎝이다.

[오천원파록], 지주사공파 기축보, 1649년, 1권2책, 목판본, 정제두 구장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오천원파록], 지주사공파 기축보, 1649년, 1권2책, 목판본, 정제두 구장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시조 정습명(鄭襲明, ?~1151)으로부터 20대까지 수록하였으며, 오천정씨 세계도(世系圖)는 기축(己丑) 정월 17대손 전대군사부(前大君師傅) 정극후(鄭克後) 근찬(謹撰)으로 되어 있다. 「문충공행록(행장략)(文忠公行錄(行狀略)」은 1410년(太宗10년, 庚寅) 3월 문인(門人) 함부림(咸傅霖)이 찬(撰)하였다. 발문(跋文)은 1649년(己丑) 2월 하한(下澣) 18대 진주목사(晋州牧使) 정호인(鄭好仁) 근지(謹識)로 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1권2책으로 하곡 정제두의 소장인이 찍혀 있는 것을 보아 그의 구장본으로 확인된다.

- ④1774년 『영일정씨세보(迎日鄭氏世譜)』 갑오보 ; 1720년 [영일정씨세보] 경자보를 양명학자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와 정찬휘(鄭纘輝, 1652~1723)가 9편5책으로 편찬하였으나 미처 간행하지를 못하였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760년부터 정응선의 후손인 정순제(鄭順濟)와 하곡의 종손(從孫)인 정지익(鄭志翼) 두 사람이 주축이 되어 경자보 편찬을 마무리한다. 6단으로 단을 나누어 시조로부터 26대까지 수록하였고, 삼수발문(三修跋文)은 정순제(鄭順濟)가 추지(追識)하여, 영천의 환구서사(環丘書社)에서 개간(開刊)하였다. 1720년 경자보로부터 무려 54년 후인 1774년 갑오년에 완성하여, 23편7책으로 간행하였다.

- ⑤1865년 『영일정씨속보(迎日鄭氏續譜』, 을축이정보(乙丑釐正譜) ; 1848년 [영일정씨속보(迎日鄭氏續譜)]는 무신속보(戊申續譜)는 정문승(鄭文升, 1788~1875)이 주간을 맡고 정구휴(鄭龜休)가 보조 역할을 하여 완성한다. 1848년 무신속보에는 정구휴가 서문을, 정문승이 발문을 썼다. 하지만 1848년 무신속보는 1차로 1849년 가을에 완성하여 인쇄를 끝냈으나 간행하여 배포하지 못했다. 우여곡절을 겪은 뒤 15년 만인 1864년에 영천군수로 부임한 정원필(鄭元弼)이 정문승에게 다시 족보를 수보하자고 부탁하면서 2차 마무리 작업이 시작되어 갑자년(1864)에 완성된다.

하지만 여러 번의 편성을 거쳐 다시 시작한 이 족보 역시 이전의 잘못된 문제를 그대로 답습한다. 결국 인쇄에 넘겼으나 간행 배포되지는 못했다. 1848년 무신속보의 편찬 문제를 종친들이 여러번 큰 회의를 열어 마침내 을축년(1865) 5월에 새로 족보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틀린 곳을 바로잡은 이정보(釐正譜)를 편찬한다. 이 을축이정보가 지주사공파의 조선시대 마지막 대동보가 된다.

- ⑥1880년 『영일정씨세보(迎日鄭氏世譜)』, 청동보(淸洞譜), 오수보(五修譜) ; 정동정사(精洞精舍)에서 1880년에 시작하여 1882년에 간행을 끝낸 지주사공파의 포은공파 파보이다. 오수(五修) 서문(序文)은 문충공 정몽주의 15대 정환익(鄭煥翼)이 썼고, 발문(跋文)은 16대 정기석(鄭箕錫)이 썼다. 이전의 족보는 시조 이하로 내려온 모든 후손을 한 보첩에 싣는 대동보(大同譜)를 표방하였는데, 1880년에 이르러서는 시조 이후의 세대가 너무 멀어지고 많이 퍼져나간 자손을 다 기록할 수가 없다는 것을 내세워 처음으로 포은공파 파보를 발행한다. 이 파보의 자손록(子孫錄)은 시조로부터 31대까지 수록하고 있다.

*19세기 지주사공파의 1865년 을축이정보와 곧이어 1880년에 발간한 오수보(五修譜)의 편찬 과정을 보면, 신분제가 무너진 1894년 갑오경장 이전, 조선후기 사회에서의 족보 편찬에 관한 소동을 보는 것 같다.

6. 영일정씨 감무공파의 [대종보]에 관하여

감무공파는 고려 의종(毅宗, 재위 1146~1170) 때 감무직을 지낸 정극유(鄭克儒)를 중시조로 한다. 그 후손으로 현조(顯祖)는 정사도(鄭思道), 정연(鄭淵), 송강 정철(鄭澈) 등이 있다. 감무공파의 족보 편찬은 지주사공파처럼 활발하지는 않았다. 현재 알려진 것으로는 1752년 임신보가 초간보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544년 이전에 편찬된 [대종보(大宗譜)] 원고본이 현전하고 있다.

[표7] 조선시대에 편찬한 영일정씨 감무공파 족보 목록

보명

년도

편찬자

권책수

판종

소장처

1

大宗譜

1544년경

 

1

초찬보 원고

필자 소장

2

迎日鄭氏世譜

1752, 임신보

鄭益河

미상

미상, 초간보

미상

3

迎日鄭氏世譜

1874, 갑술보

鄭海濟

44

목활자본, 재간보

국립중앙도서관

 

- ①1544년 이전 『대종보(大宗譜)』 ; 1책(36장), 초고본. 책의 크기는 세로가 33.8, 가로가 23cm이다. 『대종보』의 원고본은 현전한다. 서문이나 발문은 없고, 후대의 족보에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출간되지는 않은 초고(草稿)로 판단된다. 1544년 이전에 편찬한 감무공파의 『대종보』는 미공개본으로 감무공파 파보일지언정 영일정씨문중의 최고본 족보이다. 1553년(계축보)에 정세필(鄭世弼, 1494~1566)이 편찬한 [영일정씨세보(迎日鄭氏世譜)] 지주사공파 초간보보다 먼저 나온 감무공파의 초찬보이다.

책의 내면지에 [대종보]라고 묵서되어 있지만, 정극유(鄭克儒)를 시조로 하는 영일정씨(迎日鄭氏) - 감무공파의 족보이다. 책 표지는 고려 불경을 파책하여 배접지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조선전기 성리학이 고착되면서 억불숭유의 영향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 책을 1981년에 청계천8가 황학동 벼룩시장의 뒷골목에 있는 고가구 복원 및 수리 전문점 ‘사랑방’(사장 이공윤)의 폐지 더미에서, 즉 멸실의 위기에서 찾아내었다.

[대종보] 표지(오른쪽)와 첫면(왼쪽), 초고본, 1540~1544년, [사진 제공 – 이양재]
[대종보] 표지(오른쪽)와 첫면(왼쪽), 초고본, 1540~1544년, [사진 제공 – 이양재]

[대종보]에 그려진 계보도는 1545년 [청송심씨족보] 을사보의 모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또한 사주에 광곽이 없는 점도 동일하다. [대종보]에도 세대수(世代數)의 표시가 없으며, 출생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영일정씨 감무공파에서는 초간보를 1752년(임신보)에 간행하였다. 즉 이 [대종보]는 초간보를 간행하기 이전에 편찬한 초찬보로 1752년 임신보를 편찬할 때는 발견되지 않은 것 같다. 이 족보가 1540~4년경에 편찬되었다는 점은 그 시기에 생존하였던 사람들을 최하대(最下代)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늦게 잡아도 1544년 이전에 편찬한 감무공파의 계보이다.

[대종보]의 송강 정철 가족 부분(오른쪽 면), 초고본, 1540~1544년, [사진 제공-이양재]
[대종보]의 송강 정철 가족 부분(오른쪽 면), 초고본, 1540~1544년, [사진 제공-이양재]

특히 주목되는 점은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부친 정유침(鄭惟沈, 1493~1570)의 가족에 관한 기록이다. 이 [대종보]에는 사온서 령(令) 정유침의 장자는 정랑(正郎) 정자(鄭滋, 1515~1547)이고. 2자는 진사 정소(鄭沼, 1518~1572)이며, 3자로 정황(鄭滉, 1528년~?)이, 4자로는 정발(鄭潑)이 있고, 정랑 최홍도(崔弘渡)가 사위로 나온다.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은 정유침의 4자이므로 여기서의 정발은 1536년에 태어난 정철의 아명으로 보인다.

2자 정소가 진사에 급제한 해는 1540년(중종 35년)이다. 같은 해에 장남 정자는 문과시에 급제하였지만, 장남 정자는 [대종보] 편찬 당시 재직중인 관직명을 기록하고 문과급제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 인종(仁宗, 재위 1544~1545)의 후궁이 된 귀인정씨(貴人鄭氏, 1520~1566)는 정유침의 장녀인데, [대종보]의 정유침 가족의 기록에는 귀인정씨가 없고, 둘째 딸의 남편 정랑 최홍도(崔弘渡, 1539 별시문과) 만 나온다. 1520년생인 귀인정씨는 14세가 되던 1533년에 당시 세자였던 인종의 후궁으로 뽑혀 들어갔고, 인종은 1544년 11월 20일(음력) 즉위한다. 이러한 면을 보았을 때 이 [대종보]는 1540년에, 늦어도 인종 즉위(1544년) 직전에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1752년 초간 임신보보다 무려 200년 전에 편찬한 초고본이다.

- ②1752년 [영일정씨세보] 임신보 ; 1752년(영조 임신)에 처음으로 간행하여 초간보로 보인다. 1874년 갑술보에 1752년 정익하(鄭益河, 1688~1758)가 65세에 쓴 그 서문이 전한다. 정익하의 최종 관직은 1755년에 형조판서를 역임한 것이다. 아직 1752년 임신보의 소장처가 확인되지 않았으나 곧 소장처가 확인되고, [대종보]와 비교 연구할 수 있었으면 한다.

- ③1874년 [영일정씨세보] 갑술보 ; 정해제(鄭海濟)가 발문을 썼다. 목활자본 4권4책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廓) 25.6×17.3cm, 유계(有界), 세별(世別) 6단, 10행23자, 주쌍행(註雙行), 내향이엽화문어미(內向二葉花紋魚尾), 책 크기 34.0×22.0cm. 이 1874년 갑술보도 현전 인본이 희소하다.

7. 양숙공파의 고문헌을 찾자

양숙공파(良肅公派)는 고려 현종(顯宗, 재위 1010~1031) 때의 인물 양숙(良肅) 정자피(鄭子皮)를 1세 조로 한다. 파조 정자피(鄭子皮)의 벼슬이 동비원부사(東悲院副使)였다고 하여 ‘동비원부사공파(東悲院副使公派)’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 편찬한 족보나 가승 등 고문헌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인데, 사가(私家)에 비장(秘藏)된 탓인지 아직은 확인한 자료가 없다.

정자피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도 나오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의 [성종실록]에 정자피가 나오는데, 그 기록은 남송(南宋) 희종(淳熙, 1174~1189) 대의 관리이자 학자인 장충(章沖)이 찬한 춘추좌전사류시말(春秋左傳事類始末)]에 나오는 고사를 말하는 기록이다. 고려 현종 때의 정자피와는 시기와 국가가 전혀 다른 동명이인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상에는 실존 인물이 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경우가 간혹있다. 그 한 예로 수양제(隋煬帝)가 고구려를 침략하였던 644~645년에 안시성에서 이를 막은 안시성주(安市城主)의 이름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삼국사절요]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우리 역사상의 위대한 인물 한 분이 정작 사서(史書)에서는 지워진 것이다. 요즘 우리가 통속적으로 알고 있는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이란 이름은 16세기 명나라의 소설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에서 지어낸 이름이다.

영일정씨 양숙공파의 시조 정자피(鄭子皮)는 고려 현종(顯宗, 재위 1010~1031) 때의 인물이다. 지주사공파의 시조 정습명(鄭襲明, 1094~1150)은 고려 인종(仁宗, 재위 1123~1146) 때에 인물이고, 감무공피의 시조 정극유(鄭克儒)는 고려 의종(毅宗, 재위 1146~1170) 때의 인물이다. 양숙공파의 시조 정자피는 영일정씨의 세 개파의 시조 가운데 생존 연대가 가장 위로 올라가는 인물이다. 정자피의 이름은 남아 있지만, 정작 그가 역사상에 한 일은 기록에 없다. 그가 활동하였다는 고려 현종 때는 거란(契丹)의 침략이 있었다. 그 전란에서 양숙 정자피는 어떤 활동을 하였을까? 분명하게 양숙공파는 인적 실체가 있는 씨족이므로 정자피는 고려초에 실존했던 인물이다.

영일정씨 보학자 일각에서는 정자피의 7세손 정천봉(鄭川鳳)의 아들 정덕성(鄭德成)과 정효성(鄭孝成)를 파조로하는 덕성공파(德成公派)와 효성공파(孝成公派)가 있는 것으로 주장한다. 근래에 편성한 족보라도 실견하여 양숙공파에 관한 궁금증을 조금이라도 풀었으면 한다.

8. 맺음말

옛 조선의 유민이 남하하여 여섯 부족국가를 이룬 사로 육촌, 사로 육촌이 주도하여 건국한 서라벌, 서라벌이 발전한 신라. 그리고 신라가 내어놓은 사로 육촌의 부족 이름, 육촌의 부족 이름이 여섯 개의 성씨(姓氏)가 되고, 그 여섯 개의 성씨가 후일 사는 곳에 따라 본관(本貫)을 갖는다. 부족에서 씨족이 시작하고 문중이 형성된다.

신라를 지배한 왕성(王姓)인 박씨(밀양박씨 등)와 석씨(경주 석씨), 김씨(경주김씨 등). 그리고 사로의 여섯 명칭 ‘이(李, 경주이씨 등) 최(崔, 경주최씨 등) 정(鄭, 모든 정씨) 손(孫, 경주손씨) 배(裵, 경주배씨) 설(薛, 경주설씨)’씨.,. 안동권씨도 경주김씨에서 분적했으니, 이들은 모두 후기 고조선 유민(遺民)이다. 곧 이 열 개의 성씨는 모두 신라의 성씨이자 옛 조선 유민의 성씨이다.

이러한 씨족의 자주적 각성(覺醒)은, 일제가 강요한 창씨개명(創氏改名)에 이르러 순창설씨 설진영(薛鎭永, 1869~1940)을 자결하게 한다. 이러한 씨족의 혈통에 관한 자각은 근대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나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1859~1925) 같은 민족주의자들의 주체사관(主體史觀)으로까지 발전한다.5)

이러한 진한(辰韓)의 토착성씨 정씨가(鄭氏家)의, 그것도 영일정씨가(迎日鄭氏家) 감무공파의 [대종보]는 현전하는 우리나라 정씨가 족보 가운데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선본(善本)이다. 정서(正書)한 초찬 원고본이기는 하지만 조선전기의 전형적인 세보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대종보]를 비롯하여 그 이후에 나온 지주사공파의 1649년 『오천정씨족보(烏川鄭氏族譜)』 기축보와 1774년 『영일정씨세보(迎日鄭氏世譜)』 갑오보, 그리고 감무공파의 1752년 [영일정씨세보] 임신보도 모두 귀중본이라 할 수 있다.

주(註)

주1) 지백호(智伯虎, BC.128~BC.50), 자는 인세(仁世), 시호는 문화(文和), 휘는 낙랑후(樂浪侯) 지백호(智伯虎), 추봉(追封) 문왕(甘文王). 지백호는 삼한시대 진한(辰韓) 사로(斯盧) 육촌장(六村長)의 하나인 진지부촌장(珍支部村長)으로 혁거세(赫居世)를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AD.32년(유리왕9)에 진지부(珍支部)가 본피부(本彼部)로 승격(昇格) 개칭(改稱)하고, 낙랑후(樂浪侯)에 봉해지면서 정씨(鄭氏)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516년(법흥왕3)에 문화(文和)로 시호되었고, 658년(무열왕3)에 감문왕(甘文王)에 추봉(追封)되었다.

주2) [삼국사기] 권제1, 신라본기 제1, > 시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 “시조의 성은 박(朴)이고,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B.C.57) 갑자년(甲子年) 4월 병진일(丙辰日) (일설에는 정월 15일이라고도 한다.)에 즉위하여 호칭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하니, 이때 나이가 13세였다. 나라 이름은 서나벌(徐那伐)이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육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으로,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의 6부이다. 고허촌의 우두머리인 소벌공(蘇伐公)이 양산의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 숲속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래서 가서 살펴보니 홀연히 말은 보이지 않고, 단지 큰 알이 있었다. 알을 깨뜨리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이에 거두어서 길렀는데, 나이 십여 세가 되자 쑥쑥 커서 남들보다 일찍 성인의 모습을 갖추었다. 6부의 사람들이 그 탄생이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하여 떠받들었는데, 이때 이르러 임금으로 세운 것이다. 진한 사람들이 표주박[瓠]을 일컬어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에 큰 알이 표주박처럼 생겼으므로, 이로 인해 ‘박’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혹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

주3) 지주사공파는 고려시대에 2장의 문과급제자와 3장의 사마시 급제자를 배출한다. 문과급제자는 지주사공파의 시조 정습명(鄭襲明, ?~1151)과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이고, 사마시급제자는 정몽주와 정여해(鄭汝諧, 1377), 정도(鄭蹈, 1377)이다. 반면에 감무공파는 고려시대에 2장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한다. 감무공파 정사도(鄭思道, 1318~1379)와 그의 아들 정홍(鄭洪, ?~1420)이다.

주4) 파를 따지지 않고 영일정씨의 대표적인 인물을 말한다면 고려의 포은 정몽주와 조선중기의 송강 정철이다. 지주사공파는 고려의 충신 포은 정몽주를 배출하였고, 감무공파는 조선시대 시가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을 배출하였다. 그 하나만으로도 이 두 문중은 우리나라의 명문이라 할 수가 있다. 영일정씨 가문에서는 상신 5명과 대제학 3명을 배출하였는데, 정유성(鄭維成: 현종, 우의정)을 비롯한 3인은 정몽주의 후손이고 정홍명(鄭弘溟: 인조, 대제학)과 정호(鄭澔: 영조, 영의정) 정우량(鄭羽良: 영조, 우의정) 등은 정철의 후손이다.

주5) 흥미로운 사실은 제1기 민족사학자들은 거의 모두 우리나라의 토착(土着) 성씨(姓氏)에 속하였다는 점이다. 투철한 씨족의식이 단합하는 민족의식으로 발전해 나간 것임을 유출할 수 있는 현상이다.

[표8] 근대 민족사학자들의 본관

성명

본관

시조

원류

종교

박은식 朴殷植,
1859~1925

밀양

()혁거세

신라의 초대 왕

대종교

김교헌 金敎獻,
1868~1923

경주

()알지

신라의 추존 왕

대종교

이시영 李始榮,
1869~1953

경주

()알평

신라 사로 육촌 - 알천 양산촌

대종교

신채호 申采浩,
1880~1936

고령

신성용

고령은 대가야 지역

대종교

권덕규 權悳奎,
1890~1950

안동

()알지

신라, 경주김씨에서 분적

대종교

안재홍 安在鴻,
1891~1965

순흥

안자미

북방 고구려계로 추정

대종교

정인보 鄭寅普,
1892~?

동래

정회문

신라, 취산 진지촌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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