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무동(舞童)/종이에 먹과 옅은 채색/27cm×22.7cm/18세기 후반/보물 제527호/단원풍속도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심규섭]
김홍도/무동(舞童)/종이에 먹과 옅은 채색/27cm×22.7cm/18세기 후반/보물 제527호/단원풍속도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심규섭]

<단원풍속도첩>은 김홍도의 풍속도를 엮은 화첩이다.
1918년 조한준(趙漢俊)에게서 구입했다. 모두 27점이었으나 1957년 〈군선도〉 2점은 별도의 족자로 만들고 풍속도 25점만 새롭게 화첩으로 꾸몄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공식 견해이다.

이를 토대로 분석하면, 1918년이면 일제강점기로 조선총독부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이 조한준이라는 골동품상에게 매입하고 단원풍속화첩이라고 이름 붙였다.
1957년, 끝부분에 있던 <군선도,群仙圖>를 별도로 분리했다. 신선도는 풍속화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조한준은 김홍도의 화첩 크기의 다양한 그림을 가지고 있었고 풍속화첩이라는 명칭도 사용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가 <조선고적도보>에 김홍도의 풍속화 4점을 소개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김홍도가 풍속화 화가라는 형상이 고정되어 박히는 계기이기도 하다.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이나 여러 문인의 기록, 연구에 따르면, 김홍도의 주력 작품은 풍속화가 아니라 신선도이다.
대작(大作) 중심인 신선도와 손바닥만 한 풍속화첩의 간격은 아주 크다.
위대한 화가를 그저 그런 존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또한, 조선의 낡은 체제와 낙후된 백성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있다.

단원풍속도첩의 여러 작품은 위작 논란이 있다.
낙관은 있는데 친필 글씨가 없는 점, 종이의 재질이 후진 것, 손의 위치가 뒤바뀌는 따위의 표현상 오류가 많다는 것이 근거다.

“김홍도 풍속도첩은 국립박물관의 전신인 조선총독부박물관이 1918년 조한준이라는 골동품상한테서 샀는데, 세부적으로 단원 것이라고 딱 부러지게 입증되는 근거는 단원이라는 한자 호를 새긴 도장을 13폭의 그림들에 찍은 것이 유일하다. 도장의 문양, 도장을 찍은 위치나 지질 등을 분석해보면 후대에 조잡하게 찍은 것이란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거의 똑같은 구도로 그려졌으나 화가의 이름만 다른 모작본이 미국과 영국에 팔려 현전하고 있다는 사실도 의구심을 더하게 한다.
첩에 실린 그림들 가운데 <씨름>과 <무동>의 구경꾼과 악사의 왼손 오른손을 바꿔 그리거나 물감이 묻고 종이가 찢기고 밀리는 등의 훼손 흔적이 많은 것들도 진품이 아닌 후대 교본용 화보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강관식 한성대 교수의 2012년 논문)

<무동,舞童>은 단원풍속도첩을 대표하는 그림이다.
어쩌면, 김홍도가 그렸을 수많은 풍속화의 첫 장이나 마지막 대미를 장식했을 수도 있다.

“김홍도 풍속화의 으뜸으로 <씨름>이나 <서당>을 떠올리지 않는가? 이를 제치고 <무동>을 최고로 치는 이유가 뭔가?”

“안정적인 원형 구도, 역동적인 붓질도 다른 그림에 비해 탁월하긴 하네. 무엇보다 춤과 연주라는 소재는 대중인 취향을 저격했기 때문이지. 하지만 이건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닐세.”

“뭐가 더 있다는 말인가?”

“풍속화는 조선의 민본정치라는 통치 철학에 따라 창작한 정치, 어용미술(御用美術)이네.
풍속화의 제작은 단순히 백성의 삶을 애정 어린 눈으로 살펴본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백성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정치적 의지까지 투영되어 있지.
왕의 명령을 받은 김홍도 풍속화 제작단(규장각 관리, 도화서 별제, 김홍도를 주관으로 하는 도화서 화원)은 여러 차례 회의와 토론을 거쳐 기획안을 완성했네.
최종안은 ‘백성의 삶과 생활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되, 이상적인 삶과 꿈까지 함축한 대표작을 창작한다’이네.”

“<무동>이란 작품 속에 백성의 꿈이 담겨있단 말인가?”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할 작정일세.
가장 먼저, <무동,舞童>이란 작품의 제목이 잘못되었네.
애당초 그림에는 무동이라는 제목이 없네. 후대 사람이 임의로 붙인 것이지.

아무튼 화제(畫題)는 그림의 내용을 압축하여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장치일세. 이를 통해, 그림을 잘못 감상하거나 엉뚱하게 해석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도 하지.”

“춤추는 아이의 모습을 그렸으니, 한자로 <무동,舞童>이라 한 것이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무동이 주인공이라면 중앙에 배치해야 한다. 그런데 좌측 아래로 밀려나 있다. 공간을 차지하는 비율도 약 25%이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무동이 아니라 삼현육각 연주자이다. 엄밀히는 삼현육각이 연주하는 음악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무동이 주인공이라면 중앙에 배치해야 한다. 그런데 좌측 아래로 밀려나 있다. 공간을 차지하는 비율도 약 25%이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무동이 아니라 삼현육각 연주자이다. 엄밀히는 삼현육각이 연주하는 음악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원형 구도를 사용하고 있네.
만약 무동이 주인공이라면 당연히 중앙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야 하네.
하지만 중앙 공간을 비워놓고 무동은 왼쪽 아래에 배치했네. 전체 공간에서 25% 정도를 차지하고 있지.
나머지 70%는 악기를 연주하는 6명의 악사(樂士)로 채워졌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주인공은 무동이 아니라 악사로 보아야 하지 않겠나.
이건 미술 구도의 기본일세. 주인공을 구석에 놓고 작게 표현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지.”

“그림 제목을 <무동>이 아니라 <악사> 혹은 <음악>이라고 붙여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네. 무동과 악사는 큰 차이가 나네.
그림의 본질과 내용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일세.
무동이 주인공이면 어떤 형식의 춤인지, 내용은 뭔지, 왜 추는지, 누가 추는지가 중요하지.
하지만 악사가 주인공이면, 악단과 악기, 연주음악이 뭔지가 중요하네.

일단 악사들에 대해 알아보세.
이 악사들의 모임을 삼현육각(三絃六角)이라고 하네. 삼현육각은 국가 왕실의 연주양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네. 서울, 경기지방을 중심으로 전승된 수준 높은 전통음악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지.
소규모로 구성한 국가 공인 연주악단이지. 삼현육각이 연주하는 음악을 지칭하기도 하네.
간략하게는, 백성을 위한 알짜 음악 연주단일세. (위키백과, 서울무형문화제)”

동래 부사가 왜인을 초빙하고 잔치행사에 전립 모자를 쓴 삼현육각이 있다. 공식행사여서 세악수(細樂手)를 동원한 것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동래 부사가 왜인을 초빙하고 잔치행사에 전립 모자를 쓴 삼현육각이 있다. 공식행사여서 세악수(細樂手)를 동원한 것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보게.”

“이 그림에 나오는 삼현육각은 해금 1, 피리 2, 대금 1, 장구 1, 북 1로 편성되어 있네.
때때로 악기의 종류와 인원에 약간 차이가 있을 수 있지. 어떤 그림에는 북이 빠지고 5명의 악사로 표현되어 있네.
그림 속 삼현육각의 연주자는 군영(軍營)에 속한 세악수(細樂手)와 민간 악사들이 어울려 조직되어 있지.
전립을 쓴 악사는 세악수이고 갓을 쓴 연주자는 민간 악사일세,
북을 치는 사람은 전립을 쓰고 민간 악사 복장을 하고 있네. 군영에 속한 세악사지만 전립만 벗으면 민간 악사로 바뀌지. 군무원과 민간 신분을 오갔다는 말일세.
세악사 복장, 갓과 도포의 예복은 공연장의 수준과 차이에 따른 일종의 무대 의상이라고 할 수 있네.
관청에서 주최하는 공식 행사에는 세악사 복장, 민간 가례 잔치 때는 일반예복을 입었지.”

“삼현육각 악사들은 어떤 활동을 했는가?”

혜원 신윤복 그림 속의 삼현육각. 부르면 어디든 달려가는 삼현육각은 돈을 받고 활동하는 독립악단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혜원 신윤복 그림 속의 삼현육각. 부르면 어디든 달려가는 삼현육각은 돈을 받고 활동하는 독립악단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5~6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악단일세. 이들의 최고 장점은 기동성일세. 악기도 대부분 개인이 들고 다닐 수 있네.
따라서 음악이 필요한 어느 곳이든 빠르고 간편하게 갈 수 있었지.
관청의 손님맞이 잔치, 문중 제사, 혼례나 환갑잔치, 돌잔치, 과거급제 잔치, 진급 잔치, 꽃놀이 잔치처럼 음악이 필요한 곳이 삼현육각 연주단의 주요 활동지였네.
조선팔도에 수백 개의 전문 연주단이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하네.”

“삼현육각이 대중음악을 주도했군. 요즘에는 가수가 중심이지만, 예전에는 악단이 중심이 되어 가수나 무용수를 고용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네.
그림 속의 춤추는 아이도 악단에서 섭외했을 것이네. 전문 무용단과 협업했을 수도 있고.”

위 그림-군수부임 잔치에 동원된 삼현육각. 아래 그림-현대에 복원된 삼현육각. [사진 제공 – 심규섭]
위 그림-군수부임 잔치에 동원된 삼현육각. 아래 그림-현대에 복원된 삼현육각. [사진 제공 – 심규섭]
조선 말기(19세기 말) 기산 김준근이 그린 삼현육각이다. 그림에는 ‘오음육률’이라고 한글로 써 있다. 오음은 우리 음악의 기본 음계이고, 육률은 6개의 악기가 만들어내는 가락을 뜻하는데, 음악이나 삼현육각을 일컫는 다른 말이다.노래와 춤은 없고 오직 악기 연주만 그렸다.김준근은 조선의 풍습이나 문화를 담은 그림을 부산이나 원산 같은 개항지에서 외국인에게 팔았다. 당시에도 삼현육각은 일상적인 악단이었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조선 말기(19세기 말) 기산 김준근이 그린 삼현육각이다. 그림에는 ‘오음육률’이라고 한글로 써 있다. 오음은 우리 음악의 기본 음계이고, 육률은 6개의 악기가 만들어내는 가락을 뜻하는데, 음악이나 삼현육각을 일컫는 다른 말이다.노래와 춤은 없고 오직 악기 연주만 그렸다.김준근은 조선의 풍습이나 문화를 담은 그림을 부산이나 원산 같은 개항지에서 외국인에게 팔았다. 당시에도 삼현육각은 일상적인 악단이었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제대로 보았네.
노래든 춤이든 연주가 없으면 불가능하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삼현육각의 음악 뿌리가 왕실음악에 있다는 것일세.
이 말은 국가의 공식 음악과 백성의 대중음악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

무엇보다 조선은 음악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네. 이는 조선 성리학적 가치에 따른 것일세.
조선은 음악을 통해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고 음악으로 백성을 다스리고자 했지.
이를 예악(禮樂)이라고 하네.”

“예악은 예(禮)와 악(樂)으로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교화하여 인(仁)을 실현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유학의 핵심 사상이 아닌가?
김홍도는 이 작은 그림에 예악이라는 엄청난 내용을 담았다는 말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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