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 (한국족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
한국의 족보는 순기능이 있고 역기능이 있지만 긍정적인 순기능이 크다. 많은 사람들이 씨족의 계파와 종파, 그리고 정치에서의 계파와 종파를 구분하지 못한다. 씨족에서의 계파는 자손들의 갈래를 의미하며 “혈연 공동체로서의 공동이익을 추구”한다. 반면에 정치에서의 계파는 “정당이나 집단의 내부에서 출신 연고 특수한 이권 등에 따라 결합된 배타적인 모임”을 의미한다. 한 씨족 내에서는 정치적 견해라든가 재산이나 교육 수준, 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차별되어서는 안 된다.
모두 한 혈통으로서 일가(一家) 의식이 있어야 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보학(譜學)은 재래식 보학이 아닌 문화사학, 또는 문화인류학에서의 현대 보학이다. 현대 보학은 족보의 긍정적 순기능과 부정적 역기능을 모두 탐색하여 순기능은 살리고 역기능은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 『청송심씨족보』 1545년 을사 초간보
1545년에 『청송심씨족보』 초간보 을사보가 편찬되어 목판본으로 발행되었다. 금년으로부터 꼭 48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육십갑자가 여덟 번이나 지났으니, 팔주갑년(八週甲年)이다. 480년전 을사년 음력 6월 1일에 청송심씨문중의 만취당(晩翠堂) 심통원(沈通源, 1499~1572)이 서문을 썼으니. 금년으로는 6월 25일(수)로 환산된다.
1545년이면 현전하는 두 번째 오래된 족보라는 1565년 문화류씨 을축보 보다도 20년 앞선 시기이니, 1545년 『청송심씨족보』 초간보 을사보가 확인된다면, 이것은 우리나라의 서지학에서 역사 기록을 바꾸어야 하는 중대한 일이다.
청송심문에서 1545년 초간보를 찾기 시작한 것은 1649년 기축보를 만들기 시작하던 때부터이나, 최근까지 임란전에 편찬한 족보를 찾을 수가 없어, 임란 시 소실된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2023년에 필자가 『광주이씨대종회 회보』에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옛 족보이야기」를 연재하면서1) 기축보를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청송심문에서 무려 374년 이상을 찾아온 것을 논한 것이다.
청송심문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문가로서 조선시대에 7차에 걸쳐 중요한 족보를 편찬하였다. 이중 세 번은 임란전에 족보를 편찬한 것이다. 이를 정리한 [표1]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청송심문에서 초간보를 간행한 연대는 1545년(을사년)이다. 순흥 부석사(浮石寺)에서 발행한 1713년 계사보(癸巳譜)에는 심통원(沈通源, 1499~1572)이 을사년(1545년) 음력 6월 1일 자에 전라도 순천 승평관(昇平館)에서 지은 초간보 서문이 실려 있고, 또한 1713년 계사보에 실려 있는 심전(沈銓, 1496~1589)의 임술보(壬戌譜, 1562년) 서문에는 초간보(을사보)를 목판본으로 발행하였음을 언급하였다.
이것으로써 현전하는 두 번째 오래된 족보가 1565년 문화류씨 을축보라는 서지학계의 기존 논리는 수정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현전하는 두 번째 오래된 족보는 1545년애 발행한 『청송심씨족보』 을사보이다. 1476년 『안동권씨세보』 병신보와 1565년 『문화류씨세보』 을축보는 모두 세보(世譜)라고 칭하고 있다. 현재로서 1545년 청송심씨 을사보는 ‘족보(族譜)’라고 명칭을 부친 최고본(最古本) 족보이다.
[표1] 청송심씨 문중의 족보 편찬 내역
2. 『청송심씨족보』 을사년 초간보의 편찬에 관하여
청송심문에서는 근래에 이르기까지 모두 11차에 걸쳐 족보를 편찬하였다. 그 가운데 일곱 번이 신분 제도가 무너진 갑오경장(1894년) 이전에 편찬한 것이다. 현전하는 을사 초간보의 앞부분에는 서문이 없다, 유실한 것이다. 그러나 1649년 을축보에는 순천(順天) 승평관에서 심통원 선생이 을사년 6월 1일에 쓴 서문을 두 면에 걸쳐 수록하고 있어, 이 초간보의 편찬 연도가 1545년 을사년이라는 사실이 고증된다.
1545년은 조선 인종 원년(元年)이고, 명 가정(嘉靖) 24년이다. 청송심문에서는 이 을사보를 ‘가정보’라 하지 않고 ‘을사보’라고 칭한다. 성화보나 가정보라는 명칭이 사대적인 명칭이니, 청송심문에서 이 초간보를 ‘을사보’라 부르는 것은 상당히 민족 주체적인 호칭이다.
1545년에 청송심문에서 편찬한 을사 초간보 판목은 순천부에 보관하여 오다가, 1562년에 임술보를 발행하기 위하여 전주부로 옮겨와서 을사보 판목을 증보 수정하여 발행한 목판본이다. 이후 전주부에 보관 중이던 을사보 증보 판목을 진원(현재의 장성군)으로 옮겨와 증보 및 수정하여 삼간 무인보를 발행한다.
즉, 청송심문의 임란전 족보는 초간보 판목을 이용하여 1562년 재간보(임술보)를 만들었고, 다시 초간보와 재간보 판목을 이용하여 1578년 삼간보(무인보)를 만들었다. 재간보와 삼간보의 현전하는 인본이 없다. 심통원이 지은 1545년 을사보의 서문은 아래와 같다.
(원문) “族之有譜古也周之宗法漢之世表是已惟我靑松沈氏實三韓大姓也自 文林郞至于 靑城伯以下仍休儕美其流風遺澤奕世彌昌公侯接踵貂蟬聯芳如木之根厚而枝茂如水之源深而流長豈特王謝之於晉崔盧之於唐而止哉况如五出 國母爲世妊姒載誕 聖明繼繼承承金枝毓慶玉葉敷祥不啻若瓜 之綿綿則此固曠古之所未嘗聞也竊思夫有父子有兄弟爲叔姪爲堂從始親而終踈自近而漸遠同異姓於是乎分焉此雖理勢之使然而其於隆殺之間不能無憾焉者也如欲其指點分明攷余派於一瞭之中則莫若圖譜之爲切也今方伯沈公光彦氏巡臨弊府招通源若曰吾門闌世閥不爲不盛而其於撰述家業盖闕如也吾先君有志未就而手草遺存思欲繼述焉慨念于懷久矣幸今吾與子適會此道僚佐柳君泗亦爲沈氏之表孫天其或者盖亦有待於今日乎子其勉之遂以草譜與之於是詳究本支補闕證訛同姓則雖孽而不遺異姓則計世代而略節似無餘蘊而然於 祖先之生某甲娶某氏歷仕高下享壽長短慮或泯沒而難尋故幷附行狀碑銘於譜後以寓夫羹墻之思焉遂鳩工繡梓期永其傳嗚呼同是譜者咸知一本之萬殊千梢之一脉推源反本以擴親親之道則疇敢以服窮情盡而忽視如塗人也哉庶見人篤孝順之心士尙敦睦之行自身而家自家而國周禮大司徒賓興六行之敎將復行於當世矣是亦裨補風化之一資云爾
嘉靖乙巳季夏初吉後裔通訓大夫行順天都護府使順天鎭兵馬僉節制使兼監牧通源書于昇平館”
(번역문) “씨족의 족보가 있은 지는 오랜 옛부터이니 주나라의 종법(宗法)과 한(漢)나라의 세표(世表)가 이것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청송심씨는 진실로 우리나라의 삼한대성(三韓大姓)이다. 문림랑(文林郞)으로부터 청성백(靑城伯)과 그 이하에 이르도록 자손의 재능이 뛰어나고 행의(行誼)가 아름다워 그 조상이 남기신 빛나는 풍도와 은택(恩澤)이 대대로 더욱 창성하여 공경(公卿)이 끊이지 않고 계속하여 배출하고 높은 벼슬(貂蟬 : 초선)의 아름다운 명성이 길게 이어짐은 나무의 뿌리가 튼튼하고 두터우면 가지가 무성한 것과 같고 물의 근원이 깊고 멀면 마르지 않고 언제나 흐르는 것과 같으니 어찌 특별히 진(晉)나라의 왕씨와 사씨(王謝) 당(唐)나라의 최씨와 노씨(崔盧)에게 그치겠는가. 더구나 소헌성모(昭憲聖母)가 나시어 세상의 왕후(妊姒 : 태임과 태사)가 되시고 바로 성군을 탄생하시어 대대로 이어받으시고 왕실의 경사로운 복을 받고 왕손의 상서(祥瑞)를 널리 펴시었고 뿐만이 아니라 후손(瓜瓞 : 과질)이 오래 계속되어 끊이지 않음과 같은 것은 진실로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부자(父子)가 있으면 형제가 있어 아저씨와 조카가 되고 당숙과 종질(從姪)이 되어 처음에는 친근하였다가 종국에는 소원하여지며 가까움으로부터 점점 멀어지어 타성과 같이 되고 이에 나누어지니 이는 비록 사리와 형세가 그렇게 되었더라도 그 융성하고 쇠퇴하는 사이에 유감이 없을 수 없다. 그 하고자 하는 점을 분명히 가리키고 내 파(派)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하려고 할 것 같으면 족보를 하고자 하는 것보다 간절함이 없다. 이제 감사 심공 광언(沈光彦, 1490~1568)씨께서 도내를 순시하시다가 순천부에 찾아오시어 통원(通源)께 말씀하시기를 『우리 집안 문벌이 성(盛)하지 않음이 아니거늘 그 집안에 전하여 오는 가업(家業)을 저술한 것이 없어서 나의 선친께서 여기에 뜻을 두시었다가 이루지 못하시고 손수 초안하신 원고만이 남아 있어 선친의 뜻을 계승하여 저술하려고 생각하며 마음속에 품고 개탄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제 나와 부사께서 마침, 이 전라도에서 만났으며 보좌관 유군 사(柳君 泗)도 또한 심씨의 외손이니 하늘의 뜻인가. 또한 우리에게 오늘을 있게 하였음이니 부사께서는 힘써 주십시요』 하시고는 마침내 초안한 보첩(譜牒)을 주었다. 이에 본 파와 지파를 자세히 연구하고 빠진 것은 보충하고 잘못된 것은 고증하여 동성(同姓)이면 비록 서자라도 빠뜨리지 않고 외손은 세대를 계산하여 간략하게 조절하니 남아 있는 흠절이 없는 듯 하나 그러나 선조의 생졸(生卒)과 배위(配位)와 벼슬이 없어져서 혹 찾기 어려움을 염려하였다. 그러므로 행장(行狀)과 비명(碑銘)을 족보의 후면에 모두 붙이어 선조의 덕행을 사모하는 생각을 가지고 마침내 재(梓, 가래) 나무판에 새겨서 영구히 그를 전하기로 하였다.
아! 이 족보를 같이한 사람은 모두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로 갈라지고 천 가지의 끝이 한 줄기이니 근본을 알아서 친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누가 감히 먼 일가라고 하여 길 가는 사람과 같이 가볍게 보겠는가.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돈독히 하고 선비는 서로 숭상하고 돈목하며 자신으로부터 가정을, 가정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리어 주례(周禮)의 대사도(大司徒)의 외교와 빈흥(賓興)과 육행(六行)의 가르침이 장차 다시 이 세상에 행하여질 것이니 또한 풍교(風敎)를 돕는 데 일조가 되리로다.
가정 을사(인종 원년, 1545) 계하초길(季夏初吉, 6월 1)일에 후손 통훈대부행순천도호부사 순천진병마첨절제사 겸 감목 통원(沈通源, 1499~1572)은 승평관에서 쓴다”
3. 『청송심씨족보』 을사 초간보 판본 해제
을사 초간보는 족보의 핵심인 계보 32장과 행장 및 비문 5장이 계보 뒤에 붙어 있어, 모두 37장 73면이다. 을사보의 장1 앞면 서두(書頭)의 내제(內題)는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라고 되어 있다. 임진왜란(1592년) 이전에 발행한 족보는 대체로 세보(世譜)라고 하였는데, 청송심씨는 ‘족보(族譜)’라고 하였다. 따라서 청송심문의 을사보는 계보(系譜)에 ‘족보’라는 명칭을 붙인, 가장 오래된 족보이다.
청송심문 을사보의 판하서(板下書)를 쓴 서체는 매우 우수하고 아름답다. 서체로 보았을 때 사자관(寫字官)이 썼을 가능성이 높다. 책의 크기는 세로가 36cm, 가로가 27cm이고, 계보 부분은 첫 장 앞면과 장 32의 끝에만 좌우변(左右邊)이 있다. 나머지는 상하쌍변(上下變邊)으로 좌우변이 없다. 상하변(上下邊)의 길이는 약 31.5cm이다.
책 끝의 문헌 부분은 사주쌍변(四周雙邊)으로, 한 면이 18행 21자이고, 계선(界線)은 있으나 판심(版心)이 없다. 이러한 책판의 형태는 고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고려대장경 판각의 영향이다. 서체나 판각이 1476년 『안동권씨세보』 보다도 우수하다.
그리고 청송심문에서 1713년에 편찬한 계사보는 영주 부석사(浮石寺)에서 발행한 판본인데 이러한 사실을 보면, 청송심문의 이 초간보도 사찰판본(寺刹板本)일 가능성이 높다. 고려와 조선 전기의 사찰은 책을 출판하기 위한 기반(인프라)을 갖추고 있었다.
을사보의 계보를 다룬 장의 장차(張次)는 ‘천자문’ 순으로 매겼다. 그리고 다른 가문의 족보와는 달리 이름을 올리면서 청송심씨는 반드시 성과 이름을 함께 기록하였다. 이것은 이 청송심문의 을사 초간보만의 큰 특징이다. 계대수(系代數)는 표시하지 않았으며, 문과나 사마시 급제자였으면 그 표시를 하고 최종 관직이나 을사보 편찬할 때 재직 중인 관직을 적었다. 또한 거의 모두 아들 먼저 표기하고, 이어서 사위를 표기하였으나, 두 인물의 경우 자녀 계대에서는 출생 순으로 기록하고 있다.2) 그 두 인물은 자녀(子女)를 똑같이 대하고 차별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다음에 서자 아들은 첩자(妾子)로 표기하여 적서를 엄격하게 구별하였다.
이 을사보를 상세히 살펴보면, 심온(沈溫, 1375~1419)의 큰아들 심준(沈濬)의 후손 부분에 1545년 이후에 태어난 분 일부를 보사(補寫)해 넣고 있다. 이것은 이 초간본 을사보가 심준의 후손들이 소장했던 책이므로, 족보의 새로운 편찬이 지체되자 후일 태어난 자손의 일부를 적어 넣은 것이다.
현전하는 을사보의 구성은 아래와 같다. (서문 2면은 缺張)
1. 계대(系代) 32장 61면.
제1장 앞면 ; 始祖 沈洪孚 → 子 沈淵 → 子 沈龍 → 子 沈德符
제1장 뒷면 ; 沈德符 → 子 沈仁鳳, 子 沈義龜, 子 沈繼年, 子 沈澄, 子 沈溫, 子 沈淙, 子 沈泟
제2장 앞면 ; 一子 沈仁鳳 → 子 沈灝 → 子 沈淑,(손자까지) 子 沈源(증손까지)
제2장 뒷면 ; (沈灝의 사위와 외손 / 沈仁鳳의 사위와 외손), 二子 심의구(沈義龜)
제3장 앞면 ; (沈義龜의 외손) / 三子 沈繼年 → 子 沈涓 → (외손) / 沈宗夏
제3장 뒷면 ; (沈宗夏의 고손까지)
제4장 앞면 ; (沈宗夏의 고손까지)
제4장 뒷면 ; (沈宗夏의 고손까지)
제5장 앞면 ; (沈宗夏의 고손까지)
제5장 뒷면 ; (沈宗夏의 고손까지) / (沈繼年 증손자까지) / (沈德符 四子 沈澄 아들까지)
제6장 앞면~제8장 앞면 ; (沈德符 四子 沈澄 7대손까지)
제8장 앞면 ; 五子 沈溫
제8장 뒷면~제27장 뒷면 ; 沈溫 자손 / 昭憲王后 / (子 沈濬)
제27장 뒷면~제30장 뒷면 ; 六子 沈淙 (외손)
제30장 뒷면~제32장 앞면 ; 七子 沈泟 (자손)
2. 문헌 5장.
①特進輔國崇祿大夫靑城伯沈公行狀 (沈德符 行狀) / 朝奉大夫漢城少尹 姜碩德 狀
②恭肅公神道碑銘並書 (沈澮 神道碑) / 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魚世謙 撰
③有明朝鮮國 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 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書院正沈公墓碣銘 並書 (沈順門 墓碣銘) / 資憲大夫前議政府右參贊 兼 知經筵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 金安國 撰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청송심씨족보』 초간보는 청송심문의 4세조 심덕부 후손을 중심으로 편찬한 족보이다. 1476년 『안동권씨세보』나 1565년 『문화유씨세보』의 예와 같이 이 초간보에도 외손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청송심씨문중의 시조 심홍부(沈洪孚) 선생은 고려 제25대 충렬왕(忠烈王, 1236~1308) 시대의 인물이다. 그러니만큼 청송심문은 16세기에 안동권씨나 문화류씨처럼 후손들이 많지 않았으므로 『안동권씨세보』 초간보(1476년)나 『문화유씨세보』 재간보(1565년)처럼 방대하지는 않다.
그러나 1545년 을사년에 편찬한 청송심문의 을사 초간보는 『안동권씨세보』(1476년)에 이어 나온 현전하는 두 번째로 오래된 고 족보로서, 『문화유씨세보』(1565년)보다 20년이나 먼저 목판본으로 출간되었다.
4. 『청송심씨족보』 을사보의 특이 기록
청송심문의 을사 초간보를 보면 특이한 한 가족의 성명 기록이 있다. 을사 초간보 12장(昃) 앞면을 보면 심순도(沈順道, 沈澮의 손자, 8세)의 사위로 연산수(連山守)와 그 다섯 아들 송산수(松山守) 학림수(鶴林守) 봉릉수(鳳陵守) 운암수(運巖守) 운봉수(雲峯守)와 사위 송응생(宋應生)이 나온다. 심회(沈澮, 1418~1493, 6세)의 생존 연대로 보아 이들은 150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생존했던 인물이다.
이들 부자(父子)의 이름을 분석해 보면, 그 이름의 공통성은 끝 자가 모두 지킬‘수(守)’자라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수(守)’자는 전주이씨 중 왕손에게 주는 작호로 정4품에 해당하며 ‘부수(副守)’는 종4품의 작호이다.
작호명은 그 왕손이 사는 지역명을 토대로 지어지는데, 예를 들면 봉산에 사는 왕손이면 품계에 따라 봉산수, 봉산부수 등으로 전해진다. 조선전기 청송심씨는 공주, 대군과의 혼인뿐만 아니라 왕손과의 혼인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3)
그리고 4장 앞면을 보면 안효공(安孝公, 휘 온)의 후손으로 ‘소헌왕후’가 나오는데, 왕과 왕후의 경우 기축보(己丑譜, 1649) 이후에는 ‘〇〇〇〇’으로 표기되는데 을사 초간보에서는 세종비의 시호를 직접 명시(明示)하였다. 다만 국왕은 ‘〇〇〇〇’으로 피휘로 표기하였다.
『청송심씨족보』 초간보, 소현왕후 부분. [사진 제공 – 이양재]
5. 맺음말 ; 『청송심씨족보』 을사 초간보의 가치
한국의 족보 편찬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독보적인 제도이다. 족보가 중국에서 시작하였지만, 고려 말과 조선에서 크게 발전하였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만드는 것은 지난 7백여 년간 지켜온 세기적인 문화제도이자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필자가 확인한 바는 임진왜란(1592년) 이전, 조선 전기에 족보를 편찬한 문중은 30여 문중이고, 그 가운데 아홉 문중의 족보가 현전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현전하는 9종 가운데 7종은 목판본이고, 2종은 초고본(草稿本)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현전하는 고(古) 족보를 연대적으로 정리하면 [표2]와 같다. 이 [표2]를 보면 현전하는 우리나라의 옛 족보 가운데 『청송심씨족보』 을사 초간보는 두 번째로 오래된 목판본 족보이다.4) 그리고 이상의 고 족보 목록을 보면, 현재로는 “족보(族譜)”라는 단어를 청송심문에서 처음으로 서명(書名)에 넣어 사용하였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족보”라는 단어는 청송심문에서 보편적 세보(世譜)의 고유 명칭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표2] 현전하는 임란전 옛 족보 목록
[표2]를 보면, 1476년 『안동권씨세보』와 1565년 『문화류씨세보』 재간보 사이에 편찬한 족보가 『청송심씨족보』(1545년)와 『대종보(연일정씨)』(1545년), 『의성김씨족보』(1553년) 등 3점이 확인되고 있다. 『강릉김씨족보』(1565년)는 같은 해에 나왔다.
청송심문의 을사 초간보를 위시한 [표2]에서 언급한 고 족보 9종은 모두 국가문화유산(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 최고(最高) 최선(最善)의 수준이므로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특히 청송심문의 초간 을사보(1545)와 기축보(1649) 계사보(1713) 등, 현전하는 세 종은 우리나라의 옛 족보로 그 문화사적 가치가 크다.
『청송심씨족보』 을사 초간보를 임란 전에 편찬 및 간행한 다른 문중의 족보와 비교하여 보았을 때, 판형의 체제와 편집이 매우 독특하다. 특히, 을사보에는 청송심씨도 모두 성명(姓名)을 함께 표기하고있다. 자(自) 문중의 족보를 편찬하면서 성명을 함께 표기한 예는 이 청송심문의 을사 초간보가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청송심씨족보』 을사 초간보는 조선 전기에 혈통 상에서의 인척(姻戚), 즉 외손(外孫)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면은 1476년 『안동권씨세보』와 1565년 『문화류씨세보』의 예와 같다. 을사 초간보의 각 면에 등장하는 청송심씨 본손(本孫)과 외척(外戚)들의 놀라운 기록과 그 통계에 관한 상세한 연구는 청송심문의 관심있는 후손들이나 보학자들에게 맡겨 둔다.
청송심문의 소장자는 을사 초간보 편찬 480년 만에 이를 복원 및 복간을 준비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서지학계(書誌學界)와 계보학계의 경사(慶事)이자 청송심문의 홍복(弘福)이라 할 만 하다.
- 공 지 -
‘고령신씨연구소’ 소장 신경식 선생의 주창(主唱)으로 정호성과 김성환, 필자 등등에 의하여 ‘한국족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추진위는 서울 여의도 소재의 국회의원회관 2층 소강당에서 7월 21일(월) 오전10시에 출범식을 갖는 것으로 준비하고 있다. 여러 문중과 고족보 소장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란다.
주(註)
주1) 이양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옛 족보이야기」, 『광주이씨대종회보』 2023년 2월호에 게재. 이후 2024년에 을사보의 현전 소식이 청송심문에도 전해지게 되었다.
주2) 심덕부의 삼자(三子) 심계년의 큰 아들 심연(沈涓)은 큰 사위 조백선(趙伯善)과 그 외손들을 먼저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출생 순을 의미한다.
주3) 1649년 기축보와 1713년 계사보에서는 그들의 작호가 아니라 이름(名)을 기록하고 있다.
주4) 충주박씨(忠州朴氏) 문중에서는 성종 5년(1514)에 초간보를 편찬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그 실물을 현전하지 않고, 후대의 족보에 박원창(朴原昌)이 지었다고 전하는 ‘충주박씨세계서(忠州朴氏世系序)’ 만이 현전하고 있다. 충주박씨 ‘성보서(姓譜序)’나 ‘세보서(世寶序)’라고 하지 않고 ‘세계서’라 한 것을 보면, 간략한 세계를 다룬 필사본의 서문으로 추정된다.
또한 1524년에 한양조씨(漢陽趙氏) 문중에서 갑신보를 편찬하였다고 하지만, 이 족보 역시 현전하지 않고, 다만 그 서·발문이 후대에 간행된 한양조씨 족보에 실려 있다. 조원기(趙元紀, 1457~1533)의 서문과 조세정(趙世楨)의 발문에 의하면, 갑술보는 1책 분량으로 민세정(閔世貞, 1471~?)이 임지인 함창(咸昌)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고 주장한다. 현재 원본이 전하지 않으므로 체제와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대강(大綱)을 만들고 요항(要項)을 기입하였다”라는 언급을 미루어보면 체제는 갖추고 있음이 추정된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