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 (한국족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

 

우리나라의 서지학(書誌學)에서 고본(古本)은 일단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구분된다. 임란 이전과 이후는 종이의 특성도 다르고 책의 판심(版心) 및 어미(魚尾)에서 상당한 변화를 보인다. 임진왜란 이전의 삼대(三大) 고보(古譜)는 분량 면에서 볼 때 1476년 [안동권씨세보]와 1565년 [문화류씨세보], 1578년 [고령신씨세보]라 할 수가 있다.

계보는 서양에도 있으나, 서양에서는 단순한 가계도를 적은 것에 불과하다. 아시아에서 계보서는 중국에서 처음 시작되었지만, 고려 의종(毅宗, 재위 1146~1170)시 김관의(金寬毅)가 저술한 [왕대종록(王代宗錄)]은 왕의 계보로 보인다. 왕실 이외의 계보는 고려말에 이르러 출현하기 시작하였으나, 조선시대에 크게 발달하였다.

요즘 족보(族譜)라는 단어는 계보(系譜)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한다면 족보란 씨족계보(氏族系譜)의 줄임말로서 대동보적(大同譜的)인 성격의 명칭이다. 그러므로 족보라는 말은 세보(世譜)라는 단어보다는 후에 사용된 단어로 보인다.

족도(族圖)라는 명칭은 세보나 족보보다도 훨씬 이후에 만들어진 명칭으로 보인다. 안동권씨나 문화류씨가 이미 1476년과 1565년에 각기 족보를 내었음에도 그들은 [안동권씨세보] 또는 [문화류씨세보]라 하였다. 아마도 족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계보서(系譜書)는 [청송심씨족보] 을사보(1545년)이다.

1. 해주오씨의 분파

해주오씨는 동성동본(同姓同本)에 시조를 달리하는 두 씨족이 있다. 그러나 동성동본이족(同姓同本異族)이라고 보다는 동성동본동족(同姓同本同族)으로 인식되고 있다.

오씨는 신라와 고려 때 각기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 성씨로 주장한다. ①하나는 경파(京派)로서 고려 성종(成宗, 재위 981~997) 때 중국 송(宋)나라에서 귀화한 학자 오인유(吳仁裕)를 시조로 삼는다. ②다른 하나는 향파(鄕派)로서 신라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 때 중국에서 신라로 입국한 뒤 중국으로 귀환한 오첨(吳瞻)을 도시조로 삼는다. 즉 두 가문(家門)은 서로 다른 인물을 시조로 삼고, 별개의 족보를 갖고 있다.

해주오씨는 이 두 파에서 고려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8명과 사마 2명을,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99명, 생원 149명, 진사 180명, 무과 290명, 역과 57명, 의과 15명, 음양과 2명, 율과 5명, 주학 2명 등을 배출한다. 그 가운데 상신 4명, 대제학 3명, 개국공신 2명, 공신 8명, 청백리 3명이 있다.

오씨는 해주오씨 이외에도 여러 본관의 오씨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706,908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1위로 확인된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오씨는 모두 동성이본동족(同姓異本同族)인데, 해주오씨의 경파(약 40만 명)와 향파(약 6만 명)가 오씨 전체의 60%를 차지한다.

(1) 해주오씨 경파(京派)

오인유(吳仁裕)를 시조로 삼는 종파를 해주오씨(海州吳氏) 경파(京派)라고 한다. [해주오씨대동보]의 〈문양공지석문(文讓公誌石文)〉에 의하면, 오인유는 중국 송나라의 학사로 984년(성종 3년) 고려에 귀화하여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하였고, 해주(海州)에 정착하면서 해주를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1401년 해주오씨는 경파의 계보이다. 경파는 해주오씨(海州吳氏)는 문중에서 가장 번성한 가문이다. 오인유의 14세손 오윤겸(吳允謙)은 관찰사와 좌부승지를 지내고 인조반정 후 노서(老西)의 영수가 되어 대사헌, 이조판서를 지낸 뒤 우의정과 영의정에 오른다. 오윤겸의 손자 오도일(吳道一)은 숙종 때 도승지와 대사헌을 거쳐 대제학과 병조판서를 지냈다. 오윤겸의 현손 오명항(吳命恒)은 병조판서를 역임한 후 분무공신(奮武功臣) 1등이 되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우의정에 오른다. 오인유의 14세손 오정방(吳定邦)은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오정방의 증손자 오두인(吳斗寅)은 형조판서를 역임한다. 오두인의 아들 오태주(吳太周)는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와 혼인하여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졌으며, 오태주의 아들 오원(吳瑗)과 손자 오재순(吳載純)은 대제학을 역임한다.

연일오씨(延日吳氏) 시조 오연경(吳延慶)은 해주오씨의 시조 오인유(吳仁裕)의 6세손 오효성(孝成)의 큰아들이다. 연일(延日; 현 경상북도 포항시)에 세거하던 토착 사족(士族)이다. 오사충(吳思忠)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어 영원오씨(寧遠吳氏)로 분파되었다.

울산오씨(蔚山吳氏) 시조 오연지(吳延祉)는 해주오씨의 시조 오인유(吳仁裕)의 6세손 오효성(孝成)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충렬왕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 平章事)에 이르렀고 동남 변경을 침범하는 왜구(倭寇)를 토벌한 공으로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학성은 울산광역시의 옛 지명이다.

(2) 해주오씨 향파(鄕派)

서기 500년(지증왕 1)에 중국에서 신라로 입국했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오첨(吳瞻)은 태백왕의 25세인 오기(吳起; 초나라 재상)의 45대손이라 주장한다. 오첨(吳瞻)은 왕명으로 김종지(金宗之)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경상도 함양(咸陽)에서 2남1녀를 두고 22년을 살다가 521년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는데 둘째 아들 오응(吳膺)은 나이가 어려 중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그대로 신라에 남아 함양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오응(吳膺)의 9대손 오희(吳禧)는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3남 1녀를 두었는데 그 딸이 고려 태조의 왕비인 장화황후가 되고 오희(吳禧)는 국구(國舅)가 되어 다련군에 봉해졌다. 장화왕후는 고려 2대 왕 혜종의 모후가 된다.

오응의 12대손 오광우(吳光佑)가 980년 다시 송나라에 들어갔었는데, 그의 현손인 오연총(吳延寵)이 문종 때 다시 고려에 건너와 정착했으므로 오연총이 오씨의 중시조(中始祖)가 된다. 중국 사천성 출신의 오연총은 고려에 동래하여 윤관과 함께 부원수로 북변의 여진을 토벌하였으며, 이부·예부·병부상서를 역임하였다.

오연총의 5세손인 오수권(吳守權)은 오현보(吳賢輔), 오현좌(吳賢佐), 오현필(吳賢弼)이라는 세 아들을 두었다. 이들 삼형제는 고려를 침입해 온 거란군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각각 해주군(海州君), 동복군(同福君),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져, 해주오씨, 동복오씨, 보성오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제주에 대다수가 거주하는 군위오씨(軍威吳氏)도 해주오씨 향파에 원류를 두고 있는 동복오씨에서 나뉜 후대의 분파이다.

2. [해주오씨족도]에 관하여

흔히 말하는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말, 특히 한국 최초의 계보라는 말에는 어폐(語弊)가 있다. 몇 문중에서는 각기 자기 문중에 있는 계보서를 한국 최초의 족보라고 말한다. 1476년 [안동권씨세보]가 현전하는 확인된 최고본 세보이기는 하지만 최초의 세보라 하기는 어렵다. 물론 1565년 [문화류씨세보] 이전에 편찬된 1423년 [문화류씨세보]도 최초의 세보라 하기는 어렵다. 아직은 우리나라 서지학계에서 최초의 계보서라고 단언할 수 있는 계보서는 확정한 바 없다.

해주오씨가에서 말하는 1401년 족도(族圖)는 족도라기 보다는 간략한 소목도(昭穆圖) 수준의 세계(世系)를 적은 계보로서는 현전하는 최고본 계보일 수도 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러한 족도(族圖)는 세계(世系)를 기록한 계보(系譜)이기는 하나 세보나 족보라고 칭하는데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 아직 서지학계에서 학술적으로 공개 검증된 바가 없고, 필자도 2025년 6월 현재까지 실물을 탐색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해주오씨족보] 1771년 신묘보에서. 1401년 족도서. [사진 제공 – 이양재]
[해주오씨족보] 1771년 신묘보에서. 1401년 족도서.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러나 경파 문중에 의하면, “여말선초(麗末鮮初)에 경파의 7세 오광정(吳光廷)이 작성하기 시작하였으나 생전에 완성하지 못하고, 차자인 8세 오선경(吳先敬)이 1401년(건문3, 태종원년)에 완성하였다.”라고 한다. 이 [해주오씨족도]는 체계적인 족보라고 할 수는 없고, 특별한 체제에 구애되지 않고 대수(代數)에 따라 후손들을 도식(圖式)한 계보이다.

크기는 가로 112cm, 세로 115cm로서 가로와 세로의 크기가 거의 같다. 그 하단에 ‘전서공휘광정초창(典書公諱光廷草創)’, ‘사인공휘선경도사(舍人公諱先敬圖寫)’라는 주기(註記)가 있다. 이 족도에는 해주오씨를 중심으로, 직간접으로 혼인 관계에 있었던 장흥임씨(長興任氏), 경주김씨(慶州金氏), 수원최씨(水原崔氏), 영흥민씨(永興閔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의 가계도 함께 도식(圖式)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족도는 지질(紙質)을 상세히 살피고, 혼인 관계에 있던 성씨의 상계대와 내용을 교차 탐색할 필요가 있다.

3. 해주오씨 경파 문중의 족보 편찬

해주오씨 경파에 의하여 편찬된 [족도]는 1세 오인유에서 9세까지의 계보가 출생 순으로 수록하고 있는데, 1600년경에 14세 오희문(吳希文)과 오윤해(吳允諧) 부자에 의해 전사(傳寫) 증보(增補)되어 1634년에 편찬한 [해주오씨족보]의 저본(底本)이 되었다고 한다. ‘해주오씨대동종친회’에서는 ‘대동보발간현황’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http://www.haejuoh.net/htmls/haejuo02-7.htm)

[표1] 해주오씨대동종친회(경파)가 주장하는 대동보 발간현황

그리고 2022년도 12월에 해주오씨대동종친회 오재구 회장이 쓴 임인대동보서문(壬寅大同譜序文)에 “족보는 씨족의 역사를 기록한 문화유산이다. 후손이 존재하는 한 계속 기록-유지되어 마땅할 것이다. 우리 해주오씨는 一六三四년〈甲戌譜〉 발간 이래 지금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족보 발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으며, 이번〈壬寅譜〉(2022년)는 그 일곱 번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발간 현황을 검토해 보면 1401년 [족도] 이후 1634년 갑술보가 나오기까지 233년이나 결렸음이 확인된다, 그러므로, [족도]의 진위(眞僞)를 의심하는 보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1401년 [족도]가 편찬된 세보라기보다는 계대를 정리한 세계도(世系圖)임을 말하는 것이고, 1401년 [족도]에 “해주오씨를 중심으로, 직간접으로 혼인 관계에 있었던 장흥임씨(長興任氏) 경주김씨(慶州金氏) 수원최씨(水原崔氏) 영흥민씨(永興閔氏) 행주기씨(幸州奇氏)의 가계도 함께 도식되어 있다.”라는 사실은 이 족도가 해주오씨의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하며, 이미 려말선초에 이러한 세계도가 정리되고 있었던 것은 보편적인 일이 확인된다.

그러므로, 1401년 [족도]는 편찬된 족보나 세보가 아니므로, 233년의 시차는 의당(宜當)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류의 초간보와 수백년 차이나 나는 려말선초의 족도이자 세계도는 더 출현할 수도 있다.

필자가 조사한 조선시대에 편찬한 해주오씨 경파의 주요 세보는 6종으로 [표2]와 같다. 위의 [표1]에서 보는 바와 같이 1771년 신묘보와 1928년 무진보의 157년 사이에 여러 파보가 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표2]를 보면 경파에서 그 157년 사이에 1829년 선 기축보와 1882년 계해보, 1889년 후 기축보 등을 내었다.

[표2] 조선시대에 편찬한 해주오씨 경파 세보 목록

- 1633년 갑술보(甲戌譜) ; 1633년(인조 11) 가을에 16세 오숙(吳䎘, 1592~1634)이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부임 차에 당시 좌의정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 1559~1636)을 찾아간다. 당시 오윤겸은 “해주오씨는 고려 초부터 대성으로 으뜸가는 문벌이며 높은 벼슬을 함으로써 공적이 사기(史記)에 오르고 한때 성(盛)하다고 할 만하더니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오씨가 크게 드러나지를 못하고 있네, 사인공 선경(舍人公 先敬)께서 그려 놓으신 족도를 선친 희문 공과 아우 윤해가 증보(增補)하여 문헌을 만들어 보존하여 오면서 인쇄를 계획할 즈음에 군(吳䎘)의 조부 절도공 휘 정방(節度公 諱 定邦)께서도 애를 많이 쓰셨으나 성취하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내 아우 윤해도 아침 이슬처럼 일찍 사라진 것이 슬픈 것이요, 이번에 군이 근무하는 지방은 우리 고향인 만큼 영광일뿐 아니라 군의 조부와 내가 일찍이 계획했던 일이 이루어질 좋은 기회라 생각되니 마음 써서 군의 봉급에서 얼마쯤 떼어 보사(譜事)를 완성하여 주시게 이리 하면 후세에 출생하는 제족들까지도 서로 친목하고 우애하는 양풍(良風)이 조성될 것이고, 나도 나의 책임을 면하게 되고 군의 조부가 유의하 시던 일도 잘 이루어지게 되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오숙은 “어찌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그러고는 해주에 도임(到任)한 지 한 달 만에 인쇄 직공을 모집하여 족보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다. 해주 지역에는 오씨들이 많이 거주하였는데 이들도 찾아와서 족보에 수록하여 주기를 요청하여 부록으로 등재한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해주오씨 갑술 초간보 1책이 1634년(인조12) 7월에 발간되며, 오숙은 이 일을 끝으로 하여 사망한다.

- 1718년 무술보 ; 1633년 갑술보가 편찬되고 많은 시간이 흘러 족보를 다시 만들어야 할 시기가 되자, 초간보를 편찬한 오숙(吳䎘, 1592~1634)의 손자인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 1668~1716)가 아우 오진주(吳晋周, 1680~?)에게 자료를 수집하여 보첨증보(補添增補)하도록 한다. 이 족보가 1718년(숙종44) 4월에 오진주가 편찬한 족보가 무술보(戊戌譜) 4책이다.

- 1771년 신묘보(辛卯譜) ; 무술보 편찬후 53년이 지나가는 동안, 위첩(僞牒)과 사본(私本)이 나타난다. 이에 새로 족보를 편찬하여 1771년(영조47) 5월에 출간한 족보가 1771년 신묘보(辛卯譜)이다. 이 신묘보는 12편6책본과 4편2책 발췌본 두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이 두 종류는 상호 대비가 필요한데. 발췌본은 처음 분질(分帙)할 때부터 발췌한 상태로 제책한 것으로 보인다.

[해주오씨족보] 경파, 1771년 신묘보, 목활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해주오씨족보] 경파, 1771년 신묘보, 목활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 1829년 기축보(己丑譜) ; 신묘보 편찬후 58년이 된 1829년(고종26, 기축년) 6월에 오태주의 증손자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 1763~1833)이 기축보(己丑譜) 12권12책를 발행한다. 이를 선(先) 기축보라고 한다.

- 1882년 계해보(癸亥譜) ; 남원(南原) 경모재(敬慕齋)에서 오태주의 6대손 오준영(吳俊泳)의 서문을 붙여 계해보(癸亥譜) 6권6책으로 발행한다.

- 1889년 기축보(己丑譜) ; 1829년 기축보 이후 1889년 12월에 다시 기축보(己丑譜) 11권9책을 발행한다. 이 기축보는 지군사공파(知郡事公派) 만 모아서 갑, 을, 병 세편으로 만들었다. 이 족보를 후(後) 기축보(己丑譜)라 한다.

이상의 해주오씨 경파 문중의 족보 편찬은 1718년 무술 재간보를 편찬한 오진주, 1829년 기축 사간보를 편찬한 오희상, 1882년 계혜보를 발행한 오준영 등등은 1663년 갑술 초간보를 편찬한 오숙의 후손이다.

4. 해주오씨 향파 문중의 족보 편찬

해주오씨 향파 문중의 공식적인 족보 편찬 목록은 아직 정리되어 있지 않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해주오씨 경파(약 40만 명)와 향파(약 6만 명)는 그 후손 수가 크게 차이가 난다. 그러니만치 족보의 편찬도 향파가 경파에 비하여 늦게 시도되었다. 필자가 조사한 조선시대에 편찬한 해주오씨 향파의 주요 세보는 5종으로 [표3]과 같다. (이 통계표는 오차가 있을 수 있어 재고정(再考訂)이 필요하다.)

[표3] 조선시대에 편찬한 해주오씨 향파 세보 목록

- 이상의 해주오씨 향파 문중의 족보 가운데 주목되는 족보는 1767년 정해보 2권2책과 1856년 하(夏)에 전라도 곡성(谷城)에 거주하였던 오정현(吳正鉉)이 곡성 도림사(道林寺)에서 발행한 병진보 3권3책인데, 서문을 쓴 사람이 무려 9명이나 되어 다른 족보에 비하여 상당히 많다. 이 1856년 병진보는 횡보(橫譜)로 편집되어 있다.

그런데 1856년 병진보는 2종이 있다. 1856년 병진보의 ‘해주군이상이십삼대(海州君以上二十三代)’에서 일대(一代)로 오첨(吳瞻)을 기록하고 있으나, 족보의 본문 권지1에서는 한 종(가)은 1대로 오인유(吳仁裕)와 2대로 주예(周裔)와 희예(熙裔)를 수록하고 있고, 주예로부터는 경파가 희예로부터는 향파가 내려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한 종(나)은 오종인(吳宗寅)으로부터 시작하여 1대를 주경(柱卿)으로 2대를 희예(熙裔)로 하고 있다.

이를 검토해 보면 (가)가 먼저 출간되었고, (나)는 후에 수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18~19세기에 고려말의 계보를 짜맞추다가 벌어지는 현상으로 족보를 늦게 편찬한 일부 씨족의 옛 족보에서 간혹 보이는 현상이다. 그런데 1856년 병진보 (가)와 (나)를 대비하여 보면, 천장(天張) 한 장 만은 전혀 다른 조판이고, 나머지는 동일한 조판본(組版本)이다.

1856년 병진보 선 출간본(왼쪽)과 1856년 병진보 후 수정본(오른쪽). [사진 제공 – 이양재]
1856년 병진보 선 출간본(왼쪽)과 1856년 병진보 후 수정본(오른쪽). [사진 제공 – 이양재]

- 한편, 1820년 경진보의 서문을 쓴 오연상(吳淵常, 1765~1821)과 1856년 병진보의 서문을 쓴 오취선(吳取善, 1804~?)은 경파에서 배출한 인물이다. 즉 향파의 족보를 편찬하는데, 경파의 인물들이 간여하고 있는 것을 보면, 향파의 족보에서 오차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해주오씨는 경파와 향파 상호 간에는 동족 의식이 강하여 왕래하고 있었음을 말하여 준다.

5. 맺음말

필자는 이상에서 우리나라의 명문(名門) 해주오씨의 개략(槪略)을 살펴보았고, 또한 해주오씨 경파가 1401년에 만들었다고 하는, 이른바 [족도(族圖)]는 세보나 족보라기 보다는 세계도(世系圖)라고 논하였다. 그리고 해주오씨의 경파와 향파가 편찬한 중요 족보를 살펴보았다.1)

조선시대에 간행한 해주오씨의 옛 족보는 경파의 것이든 향파의 것이든 그 현전본이 매우 희소하다. 그것은 경파이든 향파이든 대개가 목활자나 철활자로 인출하였기 때문에, 활자본은 책을 인쇄 후 조판을 흩었으므로 다시 인출할 수 없었던데 기인한다. 우리나라의 옛 족보는 간행할 때부터 한정본이다. 이상 제시한 해주오씨 경파와 향파에서 편찬한 족보의 개략을 기초로 하여, 해주오씨 각파의 계보나 족보, 그리고 파보를 정리하기를 희망한다.

우리나라의 여러 오씨들은 본관이 다른 동성이본(同姓異本)이지만 동족(同族)이라는 혈족의식이 강하다. 이는 귀감이 될만한 일이지만, 문제는 이들 가운데 일부는 스스로를 중국에서 한반도로 동래한 귀화 성씨라는 부계 중심 사회에서의 전 근대적인 사대성(事大性)을 지니고, 2012년에 대만에서 발행한 세계(世界) “오씨대통종보(吳氏大統宗譜)”에 중국 오씨와 무리하게 계대를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씨의 선조가 중국에서 신라나 고려로 귀화하였어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수천 년간 인척을 맺어왔으므로, 이제 오씨는 우리 민족화한 성씨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오씨 족보는 세계적인 가치가 있는 족보이지만, 무리하게 계대를 만들어 놓은 대만의 “오씨대통종보(吳氏大統宗譜)”는 엄연히 위보(僞譜)이므로, 서지학에서 볼 때는 우리나라의 오씨 족보보다 결코 선본(善本)이라 할 수 없다.
 

주(註)

주1) [해주오씨족보]는 대체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족보 목록에는 시조를 기재하지 않고 있어, 족보 목록만 본 상태에서는 경파의 세보인지 향파의 세보인지를 분별하기가 어렵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