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 (한국족보 유네스코 세게기록유산 등재추진위)

 

지난 제82회 연재의 서두에서 필자는 “우리나라에서 몇 문중은 규모가 방대하여 대동보(大同譜) 편찬이 거의 불가능한 씨족이 몇몇 있다. 가야국 계통의 김해김씨(金海金氏)와 신라국 계통의 경주김씨(慶州金氏)와 밀양박씨(密陽朴氏), 경주이씨(慶州李氏), 그리고 조선의 전주이씨(全州李氏) 등등은 대동보를 편찬하기가 특히 어렵다. 그들 씨족은 분파가 많으므로 각 분파의 상대(上代) 계보를 정확히 일치하기가 다소 어렵다. 따라서 일부 씨족은 각 파마다 초간보를 달리 낸 경우도 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후 필자는 17~18세기에 편찬된 김해김씨의 옛 족보를 탐색하여 김해김씨도 17~18세기에 적지않게 족보 편찬을 시도하였음을 확인하였고, 이에 관하여 간략하게 논하고자 한다.

1. 김해김씨문중의 현달인(顯達人)

김해를 본관으로 쓰는 김해김씨에는 가야 수로왕계 김해김씨(선김)가 있고 신라 경순왕의 후손 김렴계 김해김씨(후김)1)가 있으며, 사성김해김씨(우록김씨)가 있다. 조선중기까지만 해도 이들에 관하여는 일부 혼동하여 쓰여져 왔으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신라계는 경주김씨나 금녕김씨로, 가야계는 김해김씨로 정리된다.

김해김씨 이외에 양천허씨와 김해허씨 하양허씨 인천이씨 등등이 가야계 씨족이다. 현전하는 가야계 씨족으로 자처하는 씨족은 거의 모두 금관가야계(金官伽倻系) 씨족이다. (후일 기회가 주어지면 금관가야계 이외의 다섯 가야계 씨족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

현재 김씨는 남과 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성씨이다.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김씨나 이씨가 맞는다”라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김씨 중에서도 김해김씨계 수로왕계가 전체 김씨의 41.7%를 차지한다. 2015년에 남한에만 4,456,700명의 김해김씨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여기에 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의 성을 따라 허씨로 분성한 양천허씨(陽川許氏)와 김해허씨(金海許氏), 하양허씨(河陽許氏), 그리고 허씨에서 이씨로 성을 바꾼 인천이씨(仁川李氏)가 있어, 이들을 포함하면 남한만의 인구가 무려 600만 명을 상회하리라 추산된다. 즉 이들 금관가야계 수로왕 자손은 남북을 통털어 최대의 씨족 집단이다.

김해김씨의 계파는 금녕군파를 비롯한 총 142개 파가 세분하여 있는데, 그중에서 김유신 직계의 종파인 3개 파(경파, 사군파, 삼현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3개 파마다 각각 세부적인 인물을 중조로 하여 총 24개의 파로 구분되어 있는 등 계보가 복잡하다. 김해김씨 각 파들은 상(上) 계대의 중시조와 시조를 잇는 계대 기록에 미비한 점이 있어, 각파 상호 간의 촌수를 계산하기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김해김씨에는 가야국(가락국)으로부터 내려왔으니, 신라와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상에서 두각을 나타낸 고대의 인물이 적지않다. 그 대표적인 고대의 인물이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595~673)이라 할 수도 있다.

고려초(958년)에 과거(科擧)가 도입되면서 고려의 과거에 입격한 김해김씨는 문과 3명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과거에 입격(入格, 及第)한 김해김씨는 문과 128명, 무과 536명, 사마시 471명, 역과 59명, 의과 39명, 음양과 15명, 율과 33명, 주학 8명이라고 문중 일각에서는 주장한다.

그런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 중앙정보시스템’에는 조선시대 과거에 입격한 김해김씨는 문과 131명, 무과 1,501명이고, 생원시에는 243명이, 사마시(진사)에는 255명이, 역과 59명, 의과 40명, 음양과 16명, 율과 35명이 나온다. 문-무과와 생원 및 진사시를 합하면, 2,000여 명 이상의 입격자를 배출한 것으로 검색된다.

이들 급제자는 거의 대다수가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의 조선중기와 후기, 그리고 말기에 급제한 분들이다. 즉 김해김씨의 인구는 방대하지만 족보를 만들 정도의 문-무벌(文-武閥) 형성은 대체로 임란 이후로 분석된다.

김해김씨가 배출한 조선조의 정치인으로는 우의정을 지낸 갑봉(甲峰) 김우항(金宇杭, 1649~1723)이 있고, 유명 화가로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16이후)가 있으며, 서예가로는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 1542~1621)이 있다. 종교인으로서는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 1822~1846)이 있고, 근대의 인물로는 열혈 독립운동가로는 의열단장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1898~1958)과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 1890~1923) 등이 있다. 근대의 시인으로는 김영랑(金永郞, 1903~1950)이, 현대 화가로는 세계적인 유화가 김환기(金煥基, 1913~1974)와 한국화가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1913~2001) 화백이 있다. 아울러 현대의 정치가로는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과 김종필(金鍾泌)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2. 현전하는 김해김씨가문의 옛 족보

최근 필자에 의하여 현전 사실이 확인된 17~18세기에 발행된 김해김씨가문의 족보는 모두 14종으로 연대순으로 볼 때 아래와 같다.

①[김씨족보(金氏族譜)], 1624년(갑자보), 초간보, 김덕의(金德義) 편, 1권1책(38장), 목활자본, 소장처 미상. 삽도(揷圖), 四周單邊 半郭 24.0×18.0cm, 有界, 10行19字, 世別6段, 註雙行, 上下內向2葉花紋魚尾 ; 29.2×20.4cm. 비록 38장본이나 상당히 연대가 올라가는 고본이므로 귀중본이다. 이 책의 영인본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는데, 원본 소장처 확인이 필요하다.

②[김해김씨세보(金海金氏世譜)], 1656년(병신보), 김현호(金顯祜) 편. 박윤덕(朴潤德) 서, 1책(영본), 목활자본,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청구기호; 대학원 B13 A21 1). 四周雙邊 半郭 25.3×17.8cm, 有界, 6段 段間4字 小字5字, 上下白口, 上下內向花紋魚尾 ; 34.6×21.9cm.

③[김해김씨족보(金海金氏族譜)], 1686년(병인보), 초간보, 김현도(金顯道) 편, 김이현(金履鉉) 발, 19권19책, 목판본,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청구기호; 대학원 B13 A196 1). 四周單邊 半郭 24.3×17.7cm, 內向2葉花紋魚尾 ; 33.3×22.8cm. 목판본인데 19권19책이라면 17세기로는 상당한 거질(巨帙)로서 주목된다.

④[분성김씨족보(盆城金氏族譜-金海金氏族譜)], 1690년(숙종16, 경오보), 초간보, 송시열 서(1680), 정호 서(1690), 김복귀 편, 2권3책, 목판본, 국립중앙관도서관 소장(古2518-10-1134). 卷首, 卷1-2. 四周雙邊 半郭 25.6×19.0cm, 有界, 世別6段, 上下2葉花紋魚尾; 36.8×23.5cm

⑤[김해김씨족보(金海金氏族譜)], 1701년, 1684년(갑자) 김정필(金廷弼) 서, 1701년(신사) 김세영(金世英) 발. 5권5책, 목활자본,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청구기호; (고) 929.1 김해김나–1~5), 四周雙邊, 半郭 24.5×17.2cm, 有界, 橫6行(11行24字), 內向二葉花紋魚尾 ; 33.6×21.6cm. 표지배접문서(제2책) : 乾隆二十五年(1760)七月初二日牧使金[押]. → 표지 수리(?) 확인 필요.

⑥[김해김씨족보(金海金氏族譜)-경파(京派)], 1754년(갑술보), 김운희(金運熙) 서, 70편9책, 목활자본, 경파(京派) 금녕군(金寧君) 김목경(金牧卿)의 후손 가계를 수록한 파보(6세손 영견, 영서, 영정, 영순의 후손 가계 수록),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청구기호; (고) 929.1 김해김보-1~9). 四周雙邊, 半郭 25.9×17.2cm, 有界, 橫5行, 內向二葉花紋魚尾 ; 34.8×22.2cm.

⑦[김해김씨족보(金海金氏族譜)], 1763년(계미, 영조39) 김익(金瀷) 서-발, 화순 백암동, 3권3책,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청구기호; 古2518-10-1069-3). 四周雙邊 半郭 27.8×19.5cm, 有界, 世別6段, 10行24字, 內向2葉花紋魚尾 ; 37.0×24.3cm.

⑧[김해김씨족보(金海金氏族譜)], 1765년(을유) 김우탁(金宇鐸) 편, 윤봉오-김우탁 서, 6권6책, 목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청구기호; 古2518-10-972-1~6), 四周雙邊 半郭 25.8×17.4cm, 有界, 世別6段, 10行24字 註雙行, 內向2葉花紋魚尾; 32.7×20.9cm.

⑨[김해김씨족보(金海金氏族譜)-上洛君派], 1766년(병술) 김우탁(金宇鐸) 편, 윤봉오-김우탁 서, 5권5책, 목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四周單邊 半郭 25.6×18.1cm, 界線, 世別6段, 11行26字 註雙行, 內向二葉花紋魚尾; 34.0×21.6cm.

⑩-1[김해김씨족보(金海金氏族譜)], 1771년(신묘보, 영조47), 8권8책, 김현상(金顯相) 편, 목활자본, 표제는 분성감씨, 국립중앙도서관 소장(古2518-10-860-1~8), 王陵圖, 四周單邊 半郭 25.2×18.4cm, 有界, 世別6段, 10行25字, 內向2葉花紋魚尾; 35.8×23.2cm. 1694년(甲戌) 김운희(金運熙) 서-김헌장(金憲章) 발.
⑩-2[김해김씨족보(金海金氏族譜)], 1771년(신묘보, 영조47), 4권8책, 김현상(金顯相) 편, 목활자본,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청구기호; (고) 929.1 김해김씨나–1~8. 圖, 四周單邊, 半郭 25.7×17.7cm, 有界, 橫6段, 10行25字, 內向2葉花紋魚尾 ; 34.2×22.1cm.
-1과 –2는 책권수가 다르다. 동일본인지 정밀 대비가 필요하다.

⑪[김해김씨족보(金海金氏族譜)], 1775년(을미보), 김응호(金應瑚) 서, 김우호(金宇鎬) 발, 5권6책, 목활자본,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청구기호; (고) 929.1 김해김그–1~6). 四周雙邊, 半郭 25.0×17.1cm, 有界, 橫6行, 內向二葉花紋魚尾 ; 32.7×21.7cm.

⑫[김해김씨족보(金海金氏族譜)], 1778년(무술보), 김규엽(金奎燁) 서, 8권8책, 목활자본,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청구기호; (고) 929.1 김해김ㅈ-1~8.), 四周雙邊, 半郭 26.1×18.5cm, 有界, 橫6行, 內向二葉花紋魚尾 ; 36.0×22.3cm.

⑬[김해김씨족보(金海金氏族譜)], 1795년(을묘보), 김윤행(金胤行) 발, 1권1책, 목활자본, 고려말 대제학 김진문(金振門)의 아들인 김련(金鍊, 生員公)의 후손 가계를 수록[사군파(감무공파)의 증손인 생원공파 파보,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⑭[김해김씨세보(金海金氏世譜)], 1799년(기미보), 초간보, 김국현(金國鉉) 서, 김명형(金命亨) 발, 6편3책, 수로왕의 51세손이라는 경파(京派) 금녕군파(金寧君派)]의 김목경(金牧卿)을 1세로 하고 있다. 서문은 목판본, 계보는 목활자본. 필자 소장.

이상에서 제시한 14종의 옛 족보 가운데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③1686년 [김해김씨족보(金海金氏族譜)] 병인보는 목판본인데 19권19책이다. 1686년 당시로는 상당한 거질(巨帙)로서 주목된다.

그리고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④1690년 [분성김씨족보(盆城金氏族譜-金海金氏族譜)] 경오보는 불과 2권3책이지만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우암의 문인 정호(鄭澔, 1648~1736)가 서문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주목되는 옛 족보이다.

이상의 옛 족보 외에도 17~18세기에 나온 족보나 세보가 더 있을 것이다. 그런데 김해김씨는 그 일족이 방대하여 조선시대에 나온 거의 대부분의 감해김씨 족보는 파보의 성격을 갖고 있다.

김해김씨의 대동보(大同譜)는 1970년대에 비로서 나왔는데, 이 대동보에서도 각 파의 계보를 집성(集成)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나온 대부분의 족보가 임란 이후에 나왔으므로 대성(大姓)에서 족보를 편찬하는 일은 한계가 크다. 우선 각 파의 상계를 체계적이고 통일적으로 연결하기가 어렵다.

김해김씨문중에서는 17~18세기의 족보와 19세기의 족보, 그리고 20세기의 족보를 각 파별로 시대별로 모아 목록을 만들고 통계를 내는 목록학을 시도하였으면 한다. 정조는 1800년에 붕어(崩御)하였고, 순조는 1834년에 붕어하였다. 김해김씨 각 파에서 1834년 이전에 편찬한 족보를 더 찾을 수 있으면 한다.

조선시대에 보통 족보를 간행할 때 많아야 50부, 보통 30여 부 정도를 찍었다. 수요가 10부 미만일 때는 필사본으로 복제하여 나누어 갖는 것이 경제적이었다. 그러므로 필사 복제도 출판의 한 수단으로 본다. 이러한 족보는 다음 족보를 새로 편찬하면서, 고보(古譜)는 그 생명이 끝난 것으로 여겼다. 잘 보존하는 집안도 있었지만, 소모품으로 여겨 사당이나 벽장에 보관하다가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는 ‘한국족보 유네스코 세게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에서 등재 신청을 위한 현전 실물을 조사할 때 비장(祕藏)된 김해김씨 옛 족보가 더 출현하기를 기대한다.

3. 1690년 [분성김씨족보] 경오보에 관하여

④1690년 [분성김씨족보(盆城金氏族譜-金海金氏族譜)] 경오보 2권3책은 숙종16(1690)년에 김복귀(金福龜) 등이 시조를 비롯한 선대의 사적을 수집하여 편찬한 분성김씨(盆城金氏) 각 파의 합보(合譜)이다.

이 족보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1680년에 쓴 서문에 의하면 의정공(議政公) 김세공(金世恭)의 7대손인 김복귀가 초보(草譜)를 가지고 와 서문을 요청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 경오보는 2권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책은 2편의 서문과 김해김씨의 내력 및 선조들의 각종 사적, 시문, 비명(碑銘) 등을 수록하고 있다.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김해김씨시원사적(金海金氏始原事蹟), 시조대왕사록(始祖大王事錄), 여무왕장적(與武王壯蹟), 고려충숙조공훈록(高麗忠肅朝功勳錄), 김해김씨명서(金海金氏名緖), 김해김씨비명(金海金氏碑銘)이 실려있다. 족보의 편찬방침을 서술한 범례는 없다.

제2책은 권1, 제3책은 권2로 시조로부터 후손들에 대한 사적을 6단으로 세별(細別)하여 서술하였다. 권1의 권수면 바로 좌측에는 분성(盆城)의 연혁을 6행 23자에 걸쳐 간략히 기술한 후 시조 수로대왕(首露大王)에 관한 기록이 시작된다. 보통 각 단에 해당 인물이 몇 세에 해당하는지 ‘○世’라고 기술하는 반면, 본 족보에는 이러한 사항을 부기하지 않았다.

본 족보에 기재된 세대는 시조로부터 71세 내외이다. 개별 인물에 대한 기술은 자(字), 호(號) 또는 관직, 배위(配位), 묘(墓)를 위주로 간략히 기재하였으며, 생몰년은 기재하지 않은 특징이 있다. 각 장마다 천자문의 자호(字號)를 부출하여 열람에 용이하게 하였으며, 선남후녀(先男後女)의 원칙을 준수하여 기술하였다. 양자(養子)의 경우에는 이름 하단에 ‘계자(繼子)’라는 세주(細註)를 부기하였다.

종인(宗人)들의 지역별 분포현황을 알 수 있는 거주지가 관련 인물의 좌측 공란에 판각되어 있다. 예를 들어 권1에는 ‘고부(古阜), 전주(全州) 반곡(盤谷), 고부(古阜) 고교(古橋), 부안(扶安) 상동(上東), 전주(全州), 전주 도례동(道禮洞), 김제(金堤) 공동(公洞), 전주 조촌(助村), 은진(恩津), 만경(萬頃) 서면(西面), 전주 용진(龍津)’이, 권2에는 ‘정읍(井邑), 임천(林川) 홍산(鴻山), 임피(臨陂), 장성(長城), 전주 귀양리(歸陽里), 전주 회포(回浦)’ 등의 지명이 확인된다. 그 결과 거주지의 대부분이 전라북도 지역에 거주하는 인물들임을 알 수 있다. 즉, 한 광역 지역에 고주하는 김해김씨를 위주로하여 편찬한 족보이다.

4. 맺음말 ; 비장된 김해김씨 옛 족보를 더 찿을 수 있기길 기대한다

김해의 옛 지명이 분성이기 때문에 일부 김해김씨는 분성김씨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의 족보 14종은 모두 파보이다. 이러한 김해김씨 여러 파의 파보로서의 초간보가 위의 족보들 외에 더 현전하리라 본다. 그러나 좀처럼 출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한 질의 족보를 찍어야 30부~50부 정도였을 것이고, 집성(集姓) 마을의 수장가(首長家)에서 한 질 정도 보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족보란 새로 편찬되면 이전의 족보는 쓸모 없어진 고본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어 보관하려고 관심을 쓰지 않아 소멸되는 경우도 있었다.

옛 족보, 특히 정조조까지의 옛 족보는 후대에 편찬된 위계(僞系)의 파악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공식 편찬된 족보이외에도 ‘방목(榜目)’이라든가 『잠영보(簪纓譜)』나 『성원록(聖源錄)』(이연향 편) 같은 필사본 종합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필자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한국역대인물 중앙정보시스템’에는 조선시대 과거에 입격한 김해김씨는 문과 131명, 무과 1,501명이고, 생원시에는 243명이, 사마시(진사)에는 255명이, 역과 59명, 의과 40명, 음양과 16명, 율과 35명이 나온다. 문-무과와 생원 및 진사시를 합하면, 2,000여 명 이상의 입격자를 배출”하였다.

김해김씨의 수가 많기는 하지만, 이러한 통계는 대단한 기록이다. 그러나 이들 입격자(入格者) 2,000여 명 모두가 김해김씨의 각 파보 어느 한 곳에 등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부터 1894년 갑오경장 이전까지의 필사본 세계(世系)나 가승(家乘)도 중요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 있어, 특히 김해김씨와 같은 대성(大姓)의 경우에는 이러한 자료도 가볍게 여겨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제 한국족보를 유에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조사에서, 비장(祕藏)되어 있는 1834년 이전에 편찬한 김해김씨 옛 족보를 더 찿을 수 있기길 기대한다.

추기(追記)

보학에서는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무너지기 이전에 나온 옛 족보를 중요시한다. 갑오경장 이전의 옛 족보도 오류(誤謬)는 있지만, 갑오경장 이후의 족보보다는 덜 심하다.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무너지면서 중인(中人) 가문 집안인 경우, 자손들이 서손(庶孫)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적손(嫡孫)의 계대로 편입하여 들어갔고, 그러므로써 일부 중인 가문은 거의 해체되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에서 볼 때 중인도 우리 역사에 많은 공헌한 계층이다. 대체로 조선시대의 중인은 기술직이나 전문직에 종사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오늘로 치면 과학자나 수학자, 또는 동시 통역가나 화가도 있었다. 오늘에는 그 후손들도 나와서 당당하게 문중 활동을 하였으면 한다.

⑪[김해김씨세보(金海金氏世譜)], 1799년(기미보), 김국현(金國鉉) 서, 6편3책, 이 족보는 매우 짜임새 있는 조판(組版)을 보여준다. 서문은 목판본, 계보는 목활자본. 필자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⑪[김해김씨세보(金海金氏世譜)], 1799년(기미보), 김국현(金國鉉) 서, 6편3책, 이 족보는 매우 짜임새 있는 조판(組版)을 보여준다. 서문은 목판본, 계보는 목활자본. 필자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⑪[김해김씨세보(金海金氏世譜)], 1799년(기미보), 6편3책, 계보는 목활자본. 필자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⑪[김해김씨세보(金海金氏世譜)], 1799년(기미보), 6편3책, 계보는 목활자본. 필자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신라계 [김해김씨족보] 김만일(金萬一) 서문본, 1책(84장), 1684년,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신라계 [김해김씨족보] 김만일(金萬一) 서문본, 1책(84장), 1684년,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주(註)

주1) 1684년(숙종10)에 목판본으로 발행한 [김해김씨족보(金海金氏族譜)] 김만일(金萬一) 서문본 1책(84장)은 가야계가 아니라 신라계 김해김씨 족보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古2518-10-816). 四周單邊 半郭 25.5 x 19.6 cm, 有界, 世別7段, 8行字數不定, 大黑口, 無魚尾; 35.4 x 23.4 cm. 版心題: 譜, 內向混葉花紋魚尾, 序:歲在甲子[1684]...金萬一, 表題: 金寧金氏舊譜. 이 족보의 표제에는 [김녕김씨구보(金寧金氏舊譜)]라고 후제(後題)하고 있다. (사진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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