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
단오(端午)는 1년 중에서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날이라 하여 중국, 한국, 일본에서 음력 5월 5일에 지내는 명절이다.
한국에서는 3대 명절 중 하나로 분류하며 다른 말로 ‘술의 날’또는 순우리말로 ‘수릿날’이라고도 한다.
시기적으로 더운 여름 전의 계절이며, 모내기를 끝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기풍제이기도 하다.
단오는 큰 명절이었고, 관공서나 지방 조직이 주체가 되었다.
씨름. 활쏘기, 석전, 그네뛰기, 동네잔치 따위는 공공성이 강하다. 관공서, 지역 유지에서 많은 예산을 들여 행사를 준비한다.
씨름대회를 한다면 최소한 소 한 마리 정도는 상금으로 내걸어야 한다.
장소 마련, 행사 조직과 진행 따위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실제 영등포, 강릉, 영광, 법성포 단오제의 전통이 전한다.
이것은 단오 행사가 지역 단위로 이루어졌음을 증명한다.
[단오풍정]은 단오 공동체 놀이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단오는 1년 중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인데, 그림은 음기의 상징인 여성이 중심이다.
여성들은 개울가에서 멱을 감고 있기에 창포에 머리를 감는 단오 행사와는 관련이 없다. 그냥 더운 여름날의 일상 모습이다.
야외에서 머리를 단장하는 경우는 없다.
머리를 단장하기 위해서는 빗이나 거울, 화장품 따위가 필요하다. 가체를 올리기 위해서는 돕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이 모습은 실내 상황을 의도적으로 밖으로 꺼낸 것이다.
술 짐을 머리에 인 여성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야외에서 술판이 벌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당시에 여성끼리 야외에 모여 술판을 벌이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술 짐을 한 여성이 뜬금없이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단오와 가장 가까운 모습은 그네뛰기이다.
그런데 여성 혼자이다. 그네뛰기는 남녀 공동 놀이이다. 자칫 그네에서 떨어지면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안전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여성끼리 그네를 탈 수도 있지만 밀어주고 잡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혼자 그네를 뛴다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이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잘못된 제목을 붙인 것이다.
잘못된 제목의 한계에 막혀 근 100여 년 동안 엉뚱한 해석을 했다.
신윤복은 이 그림에서 충격적인 표현을 했다.
여성 나체를 그린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 최초의 누드화일 것이다.
조선, 중국과 같은 유학문화권 미술작품에서는 여성의 나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춘화는 예외이다. 춘화는 미술작품이 아니라 기능성 삽화이다. 상품광고 목적의 그림을 작품이라고 하지 않듯이.)
여성의 신체를 드러내야 할 환경, 경제, 종교, 생존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벗는 것보다, 잘 입는 것이 여성의 가치를 높였다.
단순히 여성의 아름다움이나 성적 매력을 표현한 그림이 아니라는 말이다.
삼복 이후로 양기에 눌려있던 음기가 발산된다.
더위가 약해지는 처서(處暑)가 시발점이다.
여성의 몸을 통해 음기가 발현되는 세상을 표현한 것이다.
신윤복은 이 그림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지 않도록 곳곳에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그림 속의 여성은 남성의 눈을 의식하여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그냥 여성 특유의 자연스런 행동을 할 뿐이지.
여성이 남성의 성적 욕망을 자극하거나 유혹하는 행동이나 몸짓을 하지도 않는데, 혼자 흥분하는 놈은 변태이거나 음란 마귀가 씐 것이네.
아무튼 요즘 여성의 섹시한 모습이 대부분 남성의 눈과 욕망에 초점을 맞춘 것과 확연히 구별되지.”
“손을 머리에 대고 하늘을 보는 여성은 도대체 뭐 하는 것인가? 음기의 발산과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
“어떤 사람은 여성이 머리에 손을 대고 고개를 젖힌 모습에서 백치미를 느낀다고 하네. 마치 마를린 먼로가 고개를 젖힌 모습을 연상하는 것이지.
내가 보기엔, 편안하고 나른한 모습일세. 일상적이면서도 편안한 음기를 발산하는 중일세.”
“앞서, 술 짐 여성이 가슴을 노출한 것은, 자녀가 있는 유부녀이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화면 구성으로 보면, 뜬금없는 모습일세. 그런데도 억지로 끼워 넣은 이유가 있네.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 자체가 강력한 여성성, 즉 강한 음기를 발산하기 때문이지.”
“젊은 중이 훔쳐보는 모습은 아직도 이해가 안 되네.”
“대부분 사람은 이 대목에 속는다네.
신윤복은 행여 여성의 벗은 몸을 훔쳐보거나 성적 충동을 일으키는 그림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랐네.
결정타가 바로 젊은 중의 표현일세.
한번 생각해 보게.
반대로 훔쳐보는 젊은 중이 없다면, 오해할 여지가 생기네. 알몸을 드러내고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깊은 안방에서나 볼 수 있는 머리단장, 긴장을 푼 나른한 여성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성적 충동을 일으키기 충분한 요소를 갖추고 있네.
그런데 사회적으로 거세되어 중성화된 중이 여성의 벗을 몸을 보고 성적 충동이 일어날 일은 없네.
감상자가 중에게 빙의되지 못한다는 말일세.
신윤복이 댕기 머리 청년이나 갓 쓴 남자를 그리지 않고 의도하여 중을 선택한 이유일세.
행여, ‘출문(出門)한 중이라도 성적 욕망은 어쩔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림 주제가 완전히 바뀌어 버리네.
주제가 욕망의 출가승이 되면, 주인공은 젊은 중이 되고 여성은 대상이 된다네.
그런데 주인공을 화면 주변에 작게 그리지는 않네.”
“그렇다면, 젊은 중이 훔쳐보는 것은 그림에 긴장감을 주고 감상자의 관심을 유도하는 역할에 한정된다는 말인가?”
훔쳐보는 것은 여성의 가치를 빼앗는 범죄 행위이다. 범죄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경우는 없다. 그림 속의 젊은 중은 음탕하거나 욕망에 찌든 모습이 아니라 맑게 웃고 있다.
“그런 역할은 충분히 성공하고 있네.
하지만 더 큰 의미가 있네.
훔쳐본다는 것은, 여성의 가치를 남성이 빼앗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네. 그래서 범죄가 되지.
하지만 젊은 중과 벗은 여성은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공명하고 있네.
당시, 여성의 사회적 힘은 없었네. 정치나 경제 따위의 사회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이런 여성이 힘을 얻는 방법은 사회적 약자가 되어 강자의 양심을 자극해 배려를 얻는 것일세.
사회적 약자인 불교의 중을 등장시켜 여성을 사회적 약자로 자리매김한 고도의 정치적 표현인 것이지.
결론적으로, 이 그림은 아주 정치적인 그림일세.”
“그런데도 미술평론가나 사람들이 오해하는 이유는 뭔가? 혹시 신윤복이 그림을 잘못 그린 것이 아닐까?”
“신윤복의 그림을 공식화시킨 주체가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평론가였네.
1930년대 간행된 ‘조선명화전람회목록’에는 ‘하층민의 생활풍속을 그린 조선 풍속화계의 백미’라고 했고, 조선에서 미술을 연구했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7~1935)는 신윤복의 그림을 두고 ‘시정촌락 풍속을 정묘하고 농염하게 그렸다.’고 평가했네.
농염(濃艶)은 한껏 무르익은 아름다움인데, 여성에게 사용할 때는 성적 아름다움의 충만(充滿)이 되지.
이후, 신윤복의 그림은 일본인 평론가가 규정해 놓은 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네.”
“껍데기만 보고 조선 여성을 음란하고 헤픈 성적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군.
아무튼, 중인 계층인 화가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네. 그럼에도 신윤복이 예민한 정치적 그림을 그린 이유는 뭔가?”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