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옛 족보 가운데 문화류씨가문에서 1565년(을축년)에 편찬한 『문화류씨세보』 을축보가 있다. 이 『문화류씨세보』에 관해서는 이미 두 차례 논한 바 있다.1) 이번에는 문화류씨가문에서 발행한 여러 중요한 족보를 종합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1. 문화류씨문중의 족보 편찬
문화류씨는 고려의 건국공신 류차달(柳車達, 880~?)2)을 1대(代)로 하고 있다. 시조는 고려의 건국공신이었지만 6대까지는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하였고 단선(單線)의 계대(系代)로 기록하고 있다. 7대에 류공권(柳公權, 1132~1196)이 급제하여 현달(顯達)하였고, 류공권의 한 사위와 두 아들을 8대로 기록하고 있다.
이후에 급제자가 속출하였는데, 9대의 류경(柳璥)은 급제자로서 재상(宰相)에 올랐으며 최씨 정권을 종식시킨 고려의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었다.3) 이후 문화류씨가문의 내-외손은 조선초 세종조(世宗朝, 1418~1450)에 이르러 지배층에 널리 포진하여 문벌(門閥)을 형성함에 따라 문화류씨는 1423년(계묘년)에 내-외손을 명시한 세보를 편찬할 수 있었다.
필자의 생각에는 계묘보 1책이 편찬된 132년 후에 을축보가 10권10책으로 나왔는데, 132년이라면 보통 한세대를 20~25년으로 볼 경우 1423년 계묘보에 수록된 인물의 4~6대손이 을축보에 수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문화류씨문중에서는 1565년 을축보를 내기 이전에 1423년(계묘년)에 초간 계묘보를 내었고, [표1]과 같이 조선시대에 모두 7종의 중요 세보 및 족보를 내었다. 그리고 [표1]에서 언급한 족보 이외에도 1803년 정사보와 1865년 갑자보 사이에는 규모 있는 파보가 몇 종 나왔다.
그 당시의 중요 파보로는 1827년 정해년에 류굉(柳宏)이 편찬한 정해보 파보(典祀令公派, 判尹公派, 懸令公派, 少尹公派) 14권14책(필서체철활자본)이 있고, 1838년 무술년에 류낙영(柳樂榮)이 5책으로 편찬한 ‘하정공파보’가 있으며, 1847년 정미년에 류승기(柳昇基)가 13권5책(목활자본)으로 편찬한 정미보 파보(忠誠公系, 侍郞公派, 文肅公派, 文簡公派, 掌令公派, 4派 合譜) 등이 있다.
[표1] 문화류씨가문의 중요 세보 편찬
2. 형태 서지학에서 주목되는 1689년 『문화류씨족보』 기사보 판본
1689년 『문화류씨세보』 기사보는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 1634~1684)4)가 자신과 친교를 맺고 있었던 한구(韓構, 1636~1715)5)의 필서체로 1679년경에 만든 금속활자 한구자(韓構字)로 인쇄한 책이다.
이 한구자는 조선시대에 주조된 가장 아름다운 활자 가운데 한 종(種)이다. 이 한구자로 처음 인쇄한 책은 김석주가 1678년에 저술한 병법서 『행군수지(行軍須知)』(1679년 간행)이다. 이것을 보아 이 활자는 김석주가 자신의 저서를 출간하기 위하여 처음 주조(初鑄)한 것으로 보인다.6)
이 한구자는 1695년에 조선 정부가 사들였는데, 조선 정부에서는 이 필서체를 이용하여 후일 두 차례나 더 주조하여 사용한다. 글자 크기가 작고 서체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런데 1689년 기사보의 인출기(印出記)에는 “戊辰(1688)七月日開印于京城南部薰局坊”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1688년 7월에 경성(한양) 남부 훈국방에서 인출을 시작하였다”라는 것이다. 기사보를 인출하기 시작한 1688년이면 이 초주 한구자가 만들어진 지 9년 정도가 된다.
한구자는 민간에서 만들어진 동활자(銅活字)였는데, 우리는 기사보의 간기를 통하여 한구자를 사용한 지역이 1688년의 한양 남부 훈국방인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경성 남부의 훈국방이 어디인지는 확인이 어렵다. 경성 남부에는 광통방(廣通坊) 호현방(好賢坊) 명례방(明禮坊) 대평방(大平坊) 훈도방(勳陶坊) 성명방(誠明坊) 낙선방(樂善坊) 정심방(貞心坊) 명철방(明哲坊) 성신방(誠身坊) 예성방(禮成坊) 등 모두 11방이 있었는데, 훈국방(薰局坊)은 이중 어느 방의 별칭인 것 같다.
흥미로운 점은 1621년 권희(權憘, 1547~1624)가 편찬한 『훈도방주자동지(薰陶坊鑄字洞志)』에 의하면 한성부 남부 훈도방(薰陶坊) 주자동(鑄字洞)에는 예로부터 공명을 탐하거나 이익을 쫓는 사람들이 살지 않고 서책을 인쇄하는 공인들과 독서를 업으로 하는 사대부들이 살아온 곳이라는 점이다. 즉 김석주가 한구자를 주조할 수 있는 기반 시설이 갖추어진 곳은 훈도방인 것으로 보아 훈국방은 훈도방의 별칭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나라에서 임진왜란 이전에 발행한 족보는 대체로 목판본이나 필사본이다. 단 1562년에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이 편찬한 『광릉세보(廣陵世譜)』는 활자본이었다”라고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 1613년에 쓴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新編廣州李氏同姓之譜)』 서문에서 언급하였지만 현전하지는 않는다.
이후로 1653년에 인출된 『평양박씨족보(平陽朴氏族譜)』 초간보는 목활자본이다. 그리고 35년 후에 나온 1688년 기사보가 금속활자 한구자본으로, 이 족보는 문화류씨 가문의 삼간보(三刊譜)이지만, 형태서지학에서는 주목하여야 할 중요한 옛 족보이다.
한편, 1803년 『문화류씨세보』 정사보는 66권27책의 족보로서, 정조조에 주조된 금속활자 정리자로 인쇄되었는데, 조선후기에 인출된 족보이지만 정평이 난 족보이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에 1질이 소장되어 있지만, 국내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옛 족보이다.
3. 1565년 『문화류씨세보』 을축보의 편찬과 해제
현전하는 문화류씨 문중의 가장 오래된 1565년 『문화류씨세보』 을축보는 1476년 『안동권씨세보』 병신보와 상통하는 서술 형태가 많다. 두 종의 세보는 지배층의 과반수를 반영할 정도로 만성보(萬姓譜)에 가깝다.
차이점으로 1565년 을축보는 1476년 병신보보다 89년 늦게 간행되었으므로 수록한 인명의 수효가 방대하고, 편찬 16세기 중반에는 성리학이 심화하여 변형된 사회구조의 여러 모습을 보여 준다.
조선전기의 지배층과 사회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565년 을축보의 편집 과정과 내용상의 특성과 변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문화류씨 1565년 을축보는 1540년 이후부터 1565년까지 사회지배층에 속한 문화류씨 내외손 300여 명이 참여하여 24년에 걸려 완성한 만성보 성격의 옛 족보이다. 을축보 10권10책이 유일하게 진성이씨(眞城李氏) 문중의 이재녕(李在寧, 安東市 陶山面)씨 가(家)에 현전하였고, 이후 1979년 6월 30자에 문화유씨종친회를 발행소로하여 경인문화사에서 10권1책(洋裝本)으로 축소 영인한다.7)
이 책에 수록된 인원은 42,000여 명, 중복되는 인명을 1인으로 계산하면 38,000여 명에 가깝고, 8,000여 명의 문화류씨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같은 성씨가 아닌 사위나 외손이었다. 그러므로 이 세보에는 고려후기에 지배층을 배출한 다수의 씨족을 망라하고 있고, 조선전기 지배층의 거의 7할을 담고 있다.
그러나 1476년 『안동권씨세보』 병신보와 마찬가지로 남성(아들)의 배위(아내)에 대한 기록이 없고, 여성(딸)의 배위(사위)는 충실하게 기록한 편이지만 본관은 밝히지 않았다.
『문화류씨세보』 을축보는 발견 당시 안동 수졸당(守拙堂) 소장본(所藏本)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수졸당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증손 이기(李岐)를 말하는데, 그의 부친이 현풍현감을 역임한 바 있는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 1559~1637)로서 그는 『진성이씨족보』 초간보(1600년판) 편찬을 주관한 바 있다.
1565년판 『문화류씨세보』 을축보 10권10책은 임란 전에 출판된 족보 가운데 가장 방대하다. 내용면에서도 최우선(最優先) 선본(善本)으로, 이 옛 족보는 1476년 판 『안동권씨세보』와 함께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할 가치가 매우 크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1565년판 『문화류씨세보』의 권1 장20의 앞뒷면과 장21의 앞면에 세종(世宗) 때 유영(柳穎, ?~1430)이 경기체가(景幾體歌)로 지은 ‘구월산별곡(九月山別曲)’이 국한문으로 실려 있다.
이 ‘구월산별곡’은 유영이 『문화류씨세보』 초간보(1423년 계묘년, 영락보)를 편찬한 후에 지었다고 하는데, 1423년이면 한글이 반포(1446년)되기 23년 전이다. 따라서 ‘구월산별곡’은 처음부터 국한문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한문으로 지어진 것을 후일 번역하였고, 1565년판 『문화류씨세보』 을축보를 내면서 수록한 것이다.
책의 첫머리 제1권의 앞에는 서문 1장과 범례 1장, 제1권부터 10권까지의 목록 장차 5장, 문화류씨행장 31장, 그리고 이에 이어 장차(張次)를 천자문 천(天)에서부터 상(霜)까지 붙인 44장 등 82장이 있다.
제2권은 천자문 옥(玉)에서부터 신(身)까지가 장차이니 103장이요,
제3권은 발(髮)에서부터 여(與)까지가 장차이니 100장이다.
제4권은 경(敬)에서부터 백(伯)까지가 장차이니 100장이고,
제5권은 숙(叔)에서부터 대(對)까지 100장,
제6권은 영(楹)에서부터 공(公)까지 99장,
제7권은 광(匡)에서부터 수(峀)까지 100장,
제8권은 묘(杳)에서부터 누(累)까지 101장,
제9권은 견(遣)에서부터 상(床)까지 101장,
제10권은 현(絃)에서부터 휘(暉)까지 102장과 발문 3장, 편찬에 간여한 분의 명단 2장 등 107장이 있다.
따라서 1565년판 『문화류씨세보』 을축보는 모두 993장으로 이루어진 한장본(韓裝本)이다. 책판 한 장에 앞뒤로 인쇄면을 판각하니 최소 497장, 최대 499장의 목판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16세기 중반으로는 민간에서 추진한 가장 거질(巨帙)의 출판 작업이니, 1562년에 책의 편찬을 완료하고 목판에 새겨 출간하는 데 3년이 걸렸다.
제10권 끝의 명단 2장은 이 책의 출판과정을 유추해 보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현전본에는 명단이 2장 4면이지만, 원래는 3장 6면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현전하는 2장 4면의 명단 끝 부분은 판에 맞게 꽉 채워져 있고, 현전하는 명단에서 판독 가능한 부분을 분석하여 보면 지역 편중성(偏重性)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현전하는 판독 명단에는 이 책의 편찬과 출간에 간여한 양반 및 관리층, 판각 및 인쇄에 간여한 승려 및 노(奴)까지 들어가 있다.
을축보 제1권에서 제10권 계대까지 문화류씨의 시조 류차달(柳車達)에서부터 19대까지 자손 사위 외손 등을 합해서 모두 42,000여 명을 수록하고 있다. 한 면을 6단으로 나눈 횡보(橫譜)로서 다섯 개 단(段)은 계보를, 맨 아래 한 개 단은 그 아랫대가 나오는 장차(張次)를 적고 있다. 이는 1476년 판 『안동권씨세보』와 같은 편찬 구성이다.
그런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는 ‘문화유씨가정보’ 항목에서 이 책이 모두 11책이며 권1 수권(首卷) 부분이 목활자로 인출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고, 을축보를 ‘문화유씨종친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는 실물을 확인하지 않았고, 또한 제1권은 수권부(首卷部)와 계보의 상계대가 함께 되어 있는 족보 편찬의 기본조차 모르고 기술한 것이다. 1565년판 『문화류씨세보』 을축보, 즉 이른바 ‘문화유씨가정보’로 통칭하는 이 책은 목활자본이 아니라 분명 목판본이며 10권10책이다.
또한 최근에 확인한 바로는 1565년 을축보는 ‘문화류씨종친회’에서 소장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1980년 당시의 소장자 안동 이재녕씨 집안에 계속 소장되어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4. 맺음말 ; 1565년 『문화류씨세보』 을축보의 국가문화유산적 가치
1423년 『문화류씨세보』 계묘보를 낸 이후 142년 만에 1565년 을축보를 내었고, 이후 124년 만인 1689년에 기묘보를 내었다. 기묘보 이후 53년 후인 1742년에 경신보를 내었고, 다시 43년 후인 1766년에 을유보를 내었다. 을유보 이후 37년 후인 1803년에 정리자로 정사보를 그로부터 61년 후인 1864년에 갑자보를 내었다([표1] 참조).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1796년 정사보와 1865년 갑자보 사이에는 1827년 정해보 파보 14권14책과 1838년 무술보(하정공파보) 5책과 1847년 정미보 13권5책 등 규모 있는 파보가 몇 종 나왔다. 즉 문화류씨가문에서는 18세기 영조조부터는 활발한 족보 및 파보를 편찬하였다.
이것은 일반적인 많은 문중에서는 영조조부터 초간보를 편찬한 것과 유관(有關)한 일로서, 양반층 가문에서 영조조와 정조조에 족보 편찬이 일반화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1565년판 『문화류씨세보』 을축보는 조선전기의 사회와 그 인적 구성을 연구하는 데 아주 중요한 족보이므로, 조선전기 여러 문중의 족보학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기본 사료(史料)이다. 그러나 30여 년 전쯤에 대구의 어느 고서점에서 1565년 『문화류씨세보』 을축보를 거래하였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지 않아 현재의 소장처가 확인되지 않는다.
『문화류씨세보』 을축보는 조선전기에 간행한 현전 족보 판본 가운데 가장 방대한 판본이다. 이러한 국가문화유산급 귀중본들은 항시 소장처가 명확히 확인되고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옛 족보는 한 책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어 있지 않고, 지방문화유산으로만 10여 점이 지정되어 있다. 을축보의 소장처를 꼭 재확인하여 국가문화유산 보물로 지정하여야 할 것이다.
5. 추기(追記)
필자는 1993년에 혜원 신윤복의 고령신씨 계대를 확인하여 월간 『미술세계』에 발표한 바 있고, 지난해(2024년) 11월 12일에는 혜원의 고향을 현재의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으로 확증하여 제1차 학술대회에 간여한 바 있다.
학술대회를 준비하던 중에 고령신씨의 대표적인 보학자 신경식 선생은 필자에게 우리나라 옛 족보를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할 필요가 있음을 3~4차 언급한 바 있는데, 이것은 미처 필자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찔러 착안한 것이었고, 이에 금년에 들어와 신경식 정호성 등과 함께 이 사업의 추진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지금 우리들은 “국가가 우리나라의 옛 족보를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것에 인색하다면, 차라리 민간에서 나서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자”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필자는 이제 여기 통일뉴스에 당분간 우리나라의 옛 족보에 관하여 기고하고자 한다.
주(註)
주1) 인터넷 ‘통일뉴스’ 2023년 10월 16일 자에 기고한 ①「1476년 『안동권씨세보』와 1565년 『문화류씨세보』의 사료 가치」와 곧이어 23일 자에 기고한 ②「구월산 삼성사와 문화류씨」이다.
주2) 류차달은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할 때 수레를 제공하여 군량미 조달에 적극 협조하여 삼한공신이 되었다. 대승이라는 관직을 제수받았는데, 당시 고려 삼한익찬벽상 공신 중 2등 공신이 12명인데, 그 중 한 사람이다.
주3) 문화류씨는 고려후기 몽골과의 항전 기간에 분관(分貫)하여 풍산(豐山), 진주(晉州), 선산(善山), 서산(瑞山) 등지를 본관으로 삼아 각기 발전하였다.
주4) 김석주(金錫冑, 1634년~1684)의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현종의 처사촌이자 숙종의 외종숙(5촌)으로서 당시 외척을 대표하는 권신이었다. 대동법을 실현시킨 영의정 김육(金堉, 1580~1658)의 손자로 장원급제자이며 노론의 정치가로서, 비상한 머리와 수완을 지닌 책사이다. 그의 집안은 조부때부터 문벌로 든든한 재력도 있었고 조부 김육이 평생 보급에 힘썼던 인쇄 기술이 가업이기도 했다. 영의정을 지낸 조부 김육의 문하에서 어린 시절 배웠고, 그 뒤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배움을 이어갔다. 효종의 북벌론에 적극 찬성하던 그는 1678년에 『행군수지』를 저술하여 1679년에 금속활자 한구자본으로 간행하였다. 후일 우의정을 역임한다.
주5) 한구(韓構, 1636~1715)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긍세(肯世)이며 호는 안소당(安素堂)이다. 청원위(淸原尉) 한경록(韓景祿)의 5대손이며, 한사덕(韓師德)의 증손이며, 어머니는 유경(柳烱)의 딸이다. 1657년(효종8) 진사시에 급제하고, 1675년(숙종1)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지평·장령·정언·헌납·집의·안주목사 등을 거쳐, 1684년 승지에 올랐고, 80세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그는 시(詩)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필서체로 주조한 금속활자 한구자는 1679년경에 민간에서 주조한 대표적인 동활자이며, 1695년에 조선 정부에서 사들여 상용하였으며, 다시 1782년에 평안도관찰사 서호수(徐浩修, 1736~1799)가 정조의 명을 받들어 초주 한구자를 자본(字本)으로 삼아, 평양감영에서 8만여 자의 활자를 재주하였다.
주6) 김육으로부터 김좌명 김석두 3대에 거친 금속활자 주조에 대한 의욕과 서적 간행에 대한 정열은 우리나라의 서지학상 돋보인다. 김육은 인조와 효종에게 금속활자를 다시 제조할 것을 건의한다. 이후 구리로 금속활자를 제조하여 임진왜란 후 중단되고 있던 금속활자본 서적 간행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의 아들 김좌명은 동과 철의 합금에 관한 연구와 지식을 토대로 하여 현종9년에 무신자를 주조하였고, 그의 손자 김석주(金錫冑)는 숙종초년에 구리를 재료로 소활자체인 한구자(韓構字)를 주조해 많은 서적을 간행한다.
주7) 『문화류씨세보』 을축보 영인본은 원본을 흑백 복사본한 후 대지(臺紙) 작업을 한 후 축소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복사기의 선명치 못한 수준으로 인하여 아쉽게도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상당히 많다. 그리고 이 을축보를 영인하면서, 서지학계가 전혀 간여하지 않았으므로 책이나 광곽의 크기를 재어 놓지 않았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