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지난해 잠시 중국 베이징(北京)에 갔다가 어느 화상(畫商)에게 북의 미술평론가 리재현의 안부를 물었더니, “근래의 소식을 못 들었습니다”라고 한다. 그런데 지난주 27일 “리재현이 올해 3월 12일 자에 타계하였어”라는 소식을 중국로신미술대학의 한 지인한테서 문자를 받았다. 타계한 지 두 달 보름 만에 그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났고, 나는 담담한 심정으로 멍때리다가 이제 그를 회상한다.
나는 광복 50주년이 되는 1995년 월간 『미술세계』 8월호에 ‘조선미술가인명록’을 발표한 바 있다. 그 인명록에는 일본 총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소속의 미술가들도 다수 포함하였다. 그 인명록을 발표하자 나는 북한미술 전문가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다.
중국의 베이징이나 심양 연길 등지의 화상(畫商)들 대부분, 심지어 미국의 일부 화상들은 내가 월간 『미술세계』에 기고한 글을 복사해 지니고 다녔다. 그들은 남한 출신의 제3국 거주자가 북측 미술에 정통하다는 데 놀라워했다.
1996년초인가? 어느날 일본 도쿄(東京)을 방문하였더니,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일본의 어느 재일본 조선화가(朝鮮畵家)가 리재현의 『조선력대미술가편람』 초판본(1994년)을 내민다. 필자가 국내에서 ‘조선미술가인명록’을 발표한 1995년 직전 해에 나온 책이지만, 아직 국내외 어디에도 소개되지 않은 책이다. 마침, 한 책이 동경의 K 북 센터에 들어왔다며 우선 내게 할당해 준 것이다.
당시 나는 국내로 들어와 이 책을 모 신문에 소개하였다. 나와 리재현(李載賢)의 이상동몽(異床同夢)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후 중국을 여행하다가 한 조선족 지인의 소개로 조우(遭遇)한 적이 있다. 당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내게 “남북의 미술가 모두를 다룬 새로운 미술가편람을 함께 만듭시다”라고 제안한다. 나는 “언제든 할 수 있지요. 그런 날을 기다리며 각자 연구합시다”라고 했다.
이후 97년인가 월북화가 이쾌대(李快大)에 관하여 남에서 나온 책을 해외의 지인을 통하여 그에게 내밀(內密)하게 보냈다. 이어서 리재현은 1999년에 『조선력대미술가편람』 증보판을 내면서 리쾌대 문석오 등을 복권(復權)시켰고, 나는 각기 다른 일본과 중국의 지인을 통하여 증보판을 중복 입수하였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종 배려로 리쾌대와 문석오를 수록하였다고 서문에서 밝혔는데, 내가 꼭 전달받게 하려고 두 책을 각기 보낸 것으로 여겨졌다. 나는 그 고마움에 증보판에서 더 상세히 밝혀진 월북 작가들의 재북 활동을 요약하여 월간 『미술』에 기고하였다.
단 한 번 만났지만, 서로 회화사와 현대 남북 미술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간단히 소통하였던 리재현 선생! 하지만 아무리 정세가 좋아져도 공동 연구를 실현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했다. 나는 재외국민이라는 아웃사이더(outsider)였고, 남북은 직접 대화하게 되어 우리들의 시도는 무의미하였다. 그와의 소통은 인편으로 구두(口頭) 전달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사이더(insider)들은 예나 지금이나 북의 미술에 관심이 전혀 없다.
나는 해외의 화상들을 통하여 간간이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문학예술종합출판사 사장 배민옥과의 불화로 직장에서 철직(撤職)을 당했다는 일은 물론이고, 이후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소식도 두 차례나 들었다.
리재현은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북에서 화가들의 일화(逸話)를 적은 조선화를 집중적으로 그렸는데, 그 화가들의 일화는 북의 화단(畫壇)의 현대사화(現代史話)이다. 나는 리재현의 그러한 작품을 집중 수집한 베이징 C씨의 소장품 수백 점도 일일이 보았다. 그 작품들의 중요성을 직감하고 이를 정리하여 남한에서 화집을 내고 싶었다.
마침 나는 <경인일보>에서 2019~2020년 주최한 황영준(黃榮俊)의 「봄이 온다」 전을 기획 진행하였는데, 후속 전으로 진행할 재북작가 작품전을 ‘리쾌대’와 ‘리재현’ 작품전으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불순(不純)한 사람이 자기 소유의 북한미술품을 후속전으로 밀고 들어와 ‘리재현’이나 ‘리쾌대’ 작품전은 안타깝게도 무산되었다. 악화(惡貨) 아닌 악화(惡畵)가 양화(良貨) 아닌 양화(良畵)를 구축(驅逐)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이것은 남북의 미술교류를 막고 역행한 반 문화적인 일이다.
리재현은 1942년 1월 20일 태어나 2025년 3월 12일 사망하였으니, 북의 평균 수명으로 보면 83세는 결코 짧지 않은 삶이다. 현직에 있을 때 북에서 그가 이룬 민족 회화사와 미술사에 관한 업적은 매우 크다. 편저 『조선력대미술가편람』 초판과 증보판은 고금(古今)의 미술가들을 다루고 있고, 북의 현대미술사를 다룬 책임저자 조인규(1917~1994, 화가이자 평론가)의 『조선미술사②』(1990년, 사회과학출판사)를 심사하였다.
『조선미술사②』의 편성은 당시로는 매우 중대한 일이었고, 이 일을 하는 과정은 리재현이 후일 『조선력대미술가편람』을 편저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미술가동맹 평론분과위원장으로 수행한 현대미술평론에서 리재현의 업적은 가히 독보적이다.
남의 회화사학계 일각에서는 리재현의 연구에서 보이는 일부 미흡함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북에는 남에서보다 현전하는 옛 그림이 적어 회화사 연구에 한계가 있음을 간과한 비판을 위한 비판일 뿐이다.
나는 그의 편저 『조선력대미술가편람』 초판이나 증보판 하나만을 보아도 “그의 민족 회화사에 관한 열정은 남한의 회화사학계 전체보다 컸다”라고 평가한다. 북의 리재현은 다음 세대의 우리 민족미술사학계에 지대한 기본 자료를 남겨 주었다. 언젠가 미래에 우리 시대의 통일미술을 논할 때, 그가 남긴 많은 저서와 논문은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민족문화와 민족미술의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 재외국민(在外國民)으로서 자유로운 시각과 관점에서 나는 리재현이 타계한 지금 그와 스쳐 간 인연을 이렇게 회상하며, 그의 타계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애도한다.
리재현 선생, 좋은 날, 잘 가시오. 오늘 선생을 잊지 않고 이렇게 머얼리서 환송합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